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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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한마음을 갖고 아래로는 내 중생들을 제도하라!
부처님의 골수를 알려면
얼마 전부터 ‘정말 이 부처님의 도리를 알려면 부처님의 골수를 알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앉아서 관해 보기도 하는데 누구한테 여쭤서 빨리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좋은 생각이라고 내가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생각도 놔야 하는지요, 아니면 몇 년이 걸리든 뚫고 들어가야 하는지요?
여러분 속에 있는 의식은 나쁘고 좋고 그런 거를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서없이 나옵니다. 그 의식에서는 망하든지 흥하든지, 좋게 보이든지 나쁘게 보이든지, 밉게 보이든지 뭐 이런 걸 모르고 두서없이 나오게 하는데, 다스리는 것은 나쁜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는 거를 알고 있는 인간의 마음이 다스려야 한다 이겁니다.
다스려서 그 중생들을 제도해야 한다. 그래서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니라. 위로는 한마음을 갖고 아래로는 내 이 중생들을 제도하라. 내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천백억화신이 화(化)하지 못해서, 털구멍을 통해서 나고 들면서 중생을 제도 못하니까 그건 보살이 아니다 이거야. 아무리 ‘보살이다, 이름을 크게 가지고 있다, 부처의 이름을 크게 가지고 있다, 내가 공부를 이렇게 했으니깐 큰 도사다, 내가 이렇게 가지고 있으니까 큰스님이다'''' 이래도 이거 전부 다 오산입니다. 그건 이름일 뿐입니다.
예전에 내가 원주에 있을 때, 어느 동네에서 개가 아프고 소가 아프고 젖소가 아프고 뭐, 별소리가 다 나옵니다. “돼지를 기르는데 그 돼지가 아파서 죽는다면, 우리는 살림을 다 망쳐 버리고 애들을 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내가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부처님이 그때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보살로 화해서 돼지 속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그럼 돼지 속으로 들어가서 돼지가 되었을 때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사람 속에 들어갔을 때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독사를 건지기 위해서 독사 속에 들어갔을 때 독사를 보고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개구리 하나 진드기 하나 안돼 보시는 게 없는 그 마음 자체의 그 무한량, 광대무변한 이 법을 어찌 말로 다 하리까? 한 말씀 하신 겁니다.
그러니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 이걸 떠나서, 모두 여러분은 기복으로 가지 마세요. 바깥으로 찾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바깥으로 찾는다면 부처님께서 ‘너는 내 고깃덩어리만 아는구나. 내 가죽만 아는구나. 내 뼈다귀만 아는구나. 내 골수를 모르는구나.’ 하고선 눈을 감으실 겁니다, 아마. 모두 알아야 ‘저 형상은 내 형상이요, 저 몸은 내 몸이요.’ 이렇게 되는 거고 내 마음 내 생명과 둘이 아닌 게 되죠. 우리 법당에도 부처님을 모셨지만 다 알고 난 뒤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으로 보일 수 있는 그때까지, 부처님으로 보이는 그 부처가 나하고 둘이 아니라는 그것까지 아셔야 합니다.
이 부처님의 마음, 마음자리 골수를 보려면 여러분의 골수를 알아야 부처님의 골수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여러분이 그 마음의 도리를 모른다면 어떻게 부처님께서 일산(日傘) 오백 개를 한데 합쳐서 삼천대천세계에 굴려서, 요리를 만들어서 보여 준 뜻을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성신(自性神), 즉 말하자면 자기 자신! 자기 자신 안이 궁이거든요, 한데 합쳐서 돌아가는 궁. 그 궁, 등(燈) 밝은 그 마음들을 밝은 거기에다가 한데 그냥 합쳐서 탁 주장자를 보여 주니깐 확 밝아지면서 대천세계가 그대로 잘 보이더라 이거죠. 여러분이 좀 더 그렇게만 가실 수 있다면 스스로 그 궁 안의 밝은 등을 그대로 볼 수 있고, 바깥이나 안이나 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머리로 보려고 하지 말고 마음으로 보게 된다는 겁니다.
봐도 도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 컵 하나를 보더라도 보기만 한다고 뭐 되는 줄 아세요? 보기만 해도 안 되고 갖다가 놨다가 들었다가, 이래도 안 되고 또 이거 있다는 거 소리만 들어도 안 돼요. 도가 아니에요. 단지 이 컵을 마음대로 들고 왔다 갔다 할 줄도 알고, 볼 줄도 알고 들을 줄도 알고, 그 속을 말이에요. ‘이게 지금 어디서 왔나?’ 이거를 알아야 하고, 또 ‘이것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이것도 알아야 하고, 그러고선 요게 요렇구나 하고선 요걸 갖다 주기도 하고, 요걸 갖다 먹기도 하고 이래야 도예요. 예? 이 과정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게 아니라 여러분이 벌써 이렇게 만물의 영장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부처를 이룰 수 있고, 그 마음을 낼 수 있는 대권을 가졌다 이겁니다. 대권이라 하면 여러분이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가졌다. 그러니 그 대권을 얻어라 이겁니다.
아무튼 여러분이 처음에 주인공에 놓는 공부, 무조건 믿고 놓고 물러서지 않는 거. 두번째는 아프거나 어떠한 일이 생겼어도 거기서밖에는 해결 못한다 하고 거기다 맡겨 놓는 거. 한 발짝도 우리가 그냥 떼어 가는 게 없어요. 생각 하나도 그냥 하는 게 없어요.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 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깐요.
그러니깐 거기다가 그렇게 맡겨서 할 수 있도록 이렇게 하되, 자기가 발견이 됐다 하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도 또 거기다가 맡겨 놓고, 역시 거기서 하라는 대로 하지 말고, 하라는 대로만 해서 좋을 일은 하고 하라는 대로 해서 나쁠 일은 하지 말라 이거야, 좋지 않을 일은. ‘아하! 이거 그러면 거기서 왜 그런 거를 시키나. 아! 나의 사람 됨됨이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 테스트해 보는구나!’ 하고선 참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싱긋이 웃을 정도로 그렇게 좋아야죠, 맡기고. 거기에 속아서 그냥 그걸 듣고는 남의 호박 따란다고 호박 따고, 호박잎 따란다고 호박잎 따고, 도둑질하란다고 도둑질하고, 나가란다고 나가고 들어오란다고 들어오고, 이게 온통 무슨 야단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끌어 주는 스승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자기가 걸어 보지 않고 자기가 가 보지 않은 길은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은 바로 이끌어 주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이런 겁니다. 그리고 또 말로만 이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한테 그렇게 해 놓고 여러분이 그렇게 진실하게 이대로 하신다면 나도 거기 대동소이하게 따라 주는 겁니다. 도둑놈이란 게 뭐 망보는 놈은 도둑놈 아닙니까? 그러니까 서로 여러분이나 말을 이렇게 해 드리는 나나 다 도둑놈이 되듯이, 그렇게 말을 해 주었으니깐 나도 책임이 있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하나가 전부 이거는 잘못되면 안 되니까.
또 이거는 잘못될 리가 없어요. 왜? 여기 이 마음에다 맡기기 때문에 잘못될 리가 없어요. 잘못된 사람도 횡설수설하는 거를 ‘여기서 나오는구나!’ 하고 맡겨 놓으면 그 정신병자들이 다 나아요. 본인들이 그렇게 못해서 더디지, 잠깐 그렇게 그랬던 사람은 그냥 금방 괜찮아지죠. 그러니 제아무리 이 세상에서 잘났다고 날뛰고 아무리 권세가 좋고 돈이 많고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 극치적으로 들어가서 본다면 새 발의 피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앞으로 침착하게 생각해 가면서 연구하는 것이 천체 물리를 연구하는 거와 같은 겁니다.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전제하고, 이날까지 이렇게 짧으면 길게 하고 길면 짧게 하고, 이렇게 창살 없는 감옥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되지 않나, 이 창살 없는 인간 게임 속에서 우리는 벗어나야 되지 않나, 이런 걸 꼭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들이 방에서 나오지 않아요
스님, 제 막내아들이 회사에 넣어 놓으면 나오고 방에 들어앉아서 사람 모인 데는 안 가고, 늙은이처럼 한숨만 쉬고 그럽니다. 그런데 저희 할아버지 산소 상석을 놔서 그렇다고 하는 말도 어디서 들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 질문을 올립니다.
그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옛날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처님, 저는 어찌 나쁜 일도 안 하고 이렇게 착하게 사는데 고가 많습니까? 병고도 많고 애고(哀苦)도 많은데 이것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하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과거를 못 보걸랑 현실을 보거라. 현실에 다가오는 걸 본다면 과거에 너희가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있느니라. 현실에 어떡하는가 하고 너를 지켜볼 때에 미래에 어떻게 올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니라.” 이랬답니다.
그러니까 누가 갖다 준 것도 아니고 뺏어 갈 이치도 아니죠. 그러니까 내가 항상 말씀드리듯이, 그거를 녹이려면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속에서 해결을 할 수 있다.’ 하는 믿음을 가지시란 얘깁니다. 한마음이라는 것은, 내 몸속에 악업 선업이 모두 들어 있는 그 의식들이 자기 자신으로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쓰는 대로 움죽거려 주는 것이 이 모습과 생명과 의식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잘 생각해서 이익 되게 하시고 부드럽게 말도 해 주는 보시를 해야 하고, 행도 부드럽게 할 수 있는 행을 해야 하는 거죠. 남한테 착하게 마음을 쓰는 마음 보시가 첫째입니다. 물질이 없어서 물질 보시는 못하나마 마음 보시라도 해야죠. 그리고 남을 원망하고 조상을 원망하고 이렇게 한다면 바깥으로 끄달려서 그 업보는 세세생생에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꼭 그렇게 ‘한마음 주인공 그 속에서 나온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 하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해 주시오’ 하지 마시고요. ‘해 주시오’ 하면 둘이 되니까요. 장갑을 낀 손이나 장갑이나 똑같이 손이 속에서 움죽거려서 장갑이 움죽거리듯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모든 업보를 무너뜨리려면 그렇게 하십시오. 내 주인공만이 나를 이끌어 주고 내 업보를 무너뜨려 주고 나의 병고를 낫게 해 주고 내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줄 수 있다는 그 믿음을 가지세요. 그러니까 진실하게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대로 거기 놓고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이 약해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진통을 참아내야 하는 지경에 있는 사람입니다.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워있으면서도 가족들과 의절이 된 상태라 누구하나 찾아오지를 않습니다. 모두 제가 잘못된 말과 행으로서 가족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마음의 힘이 약해서 고통을 이겨낼 수도 없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해결을 못하고 있습니다. 스님, 저의 마음과 스님의 마음이 한마음이 돼서 이 인과를 좀 어떻게 녹일 수 없겠나 싶어서 질문드립니다.
이거 봐요. 이 도리는 ‘죽든지 살든지, 살리든지 죽이든지 아프게 하든지 안 아프게 하든지 당신 마음대로 해라, 너 마음대로 해라.'''' 하고선 딱 놔버릴 때에 진통도 오지 않을 수가 있어요. 그것을 살 양으로 바둥바둥한다면 그거는 놓을래야 놓을 수도 없고, 거기에 감응이 될래야 될 수도 없고, 불이 들어올래야 들어올 수도 없어요.
힘이 없고 있고가 없어요. 잘 하고 못 하고도 없어요. 그건 믿음이죠. 자기를 믿는 힘! 내가 항상 얘기하잖아요. 수억겁 광년으로부터 끌고 오면서 경험을 하게 하고 쫓고 쫓기면서 경험하게 하면서 이끌고나온 거라고요. 그러면 자기라는 지금 현재의 자기가 무심 도리(無心道理) 속에 부(父)가 있는 그 자체를 그냥, 한마디로 말해서 양쪽이 다 붙어야 이것이 불이, 광명스러운 불이 들어오게끔 돼 있어요. 어떤 사람은 암으로 얼마나 진통이 오는데도 그렇게 하니깐 진통도 하나도 없더라는 얘기예요. 죽고 사는 거를, 그거를 살겠다고 바둥거리고 애를 쓰고 움죽거리면 오히려 더 떨어지게 돼 있어요.
그러게 이 공부라는 것도 그래요, 아주 그냥 악착같이 올라가려고 애쓰지도 말고 내려가려고 애쓰지도 말고, 자연스럽게 그냥 자연스럽게 한 발짝 한 발짝 떼어놓는 사이 없이 떼어놓는 그 자체가 그대로 공부예요. 화두를 받아가지고 모두들 하는 사람이 십년 이십년 삼십년 해도 못 하는 이유가 있죠. 앉아서 좌선을 하면 좌선인 줄 알기 때문이죠. 일어서면 좌선이 아닌 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입선이나 와선이나 행선이나 좌선이나 이런 것이 다 한데 합쳐서 생활 자체가 그냥 참선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모두 그거를 모르고 이거는 아니고 이거는 참선이고 아, 이러니깐 언제 우주 전체를 한데 집어삼켜. 그 한데 집어삼키기 이전에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나라는 내 중생이 바로 내 한마음에 이끌어져야 하고 그래서 악업 선업이 들어있는 것도 과거에, 벌써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하는 게 내가 배낭에다 짊어지고 왔다고요. 그러니 여기서 나오는 대로 입력이 돼서 스스로 나오는 거를 다시 입력을 한다면 바로 앞서에 입력된 거는 없어진다 이 소리입니다.
참 답답하고 어지러울 때가 많아요.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 않는데 그거를 살기를 바라고 그냥 그렇게 하는 동시에 살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그래서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다, 이 도리를 알라 이러는 거죠.

포교에 더 우선을 둬야 하지 않나요!
한국 사회에서도 불교인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노령화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 애들을 보내면 부처님 믿는다고 자신있게 말을 못한답니다. 그래서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너 부처가 되리라’ 하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제는 포교에 더 우선을 둬서 불교도 수를 늘려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예,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천번 만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불교든 가톨릭교든 기독교든 다 타력 신앙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볼 때는. 그러나 기독교를 다니든지 가톨릭교를 다니든지 불교를 다니든지 나는 상관 안 합니다. 단 하나 있다면 자기 주처를 똑바로 보고 자기 주처를 믿고 거기서 물러서지 말아라 이겁니다. 타의에서 구하지 말아라. 불교라는 것이 자의에서 구함으로서 모든 것이 불교지, 그 생명이 어디로 가느냐 이겁니다. 다 생명이에요. 생명을 떠나서 부처님이 어딨으며 생명을 떠나서, 각자 자기를 떠나서 어디 기독교가 있고 예수가 있고 하나님이 있느냐 이겁니다.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 완성이 하나님입니다. 자기 지혜가 바로, 바로 하늘님이고요. 일체 통신력이 바로 한울님이고. 그것이 삼합이 한데 합한 것이 바로 불교예요.
그런데 이거는 그냥 ‘나는 기독교니까’ 하고 말입니다. 걸상을 쪼르라니 동그랗게 놨는데, 요 걸상이 내 걸상이에요. 항상 내리고 타고 내리고 타고 하는데, 자기 걸상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독불장군이 없다는 속담의 말이 있듯이 우리는 공생(共生)·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 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항상 그렇게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겁니다.
여기 보십시오. 저런 나무도 그렇고 전부 일체 만물만생이 다 불자 아닌 게 없어요. 불자는 불자 그대로예요, 불자. 생명에 의지해서 다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식, 불자. 난 무식해서 이렇게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보십시오. 이 불자 중에서도, 도량에서도 이 신도 저리로 갈까 봐 걱정, 이 신도 다른 데로 갈까 봐 걱정, 이런 걱정은 왜 합니까. 안 오면 어떻고 온들 어떻습니까. 그것도 부처님의 뜻이다 이겁니다, 그거는. 나는 그래요. 나는 그전에 법당에서 설법할 때도 그랬습니다. “야, 나보다 더 휼륭한 데가 있으면 다들 가서 들어라. 다들 가거라.” 이랬습니다. 내 거짓말하는 게 아닙니다. 난 그런 것 한 번도 걱정해 본 일이 없습니다.
또 전국의 지원에서 불사들을 하는데 경기가 어려워서 못한다 이런 것도 난 걱정해 본 예가 없어요. 그냥 내가 한다고 생각했으면 그냥 하는 거지, 뭐 그렇게 말이 많고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신도 안 올까 봐 걱정할 것 없어요. 왜? 한 사람이면 어때요? 한 사람만 사람이 돼도 이 세상을 손 안에 쥐고 다 해내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그렇게.
그러니 불자가 많아야 되겠다 적어야 되겠다 이걸 떠나서, 내 가정에 어떤 일이 있는데 어떻게 관(觀)해야만 됩니까 이럴 때, 기도라는 건 없어요. 왜? ‘아, 내 주인공밖에 해결할 수 없어.’ 이렇게 하면 했지, 관하면 했지 ‘나를 잘되게 해 주시오.’ ‘이거 왜 안됩니까? 해 주시오.’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건 벌써 둘이 되는 겁니다. 이게 기도예요.
이게 기도지 난 기도라는 거는 언급하지 않거든요. 직접 관해라. 목마르면 직접 마셔라 이런 소립니다. 내가 자고 싶으면 그냥 자고. 야, 이 하늘이 열 쪽이 난다 하더라도 내가 자고 싶으면 자는 거죠. 아니 지금 죽으면 어떻고 이따가 죽으면 어떻습니까. 좀 이따가 죽은들 아 그깟 놈의 것 죽든 살든 어차피 이 낙엽도 떨어질 거, 귀찮게 그걸 왜 움켜쥐고서 죽을까 봐 겁내고 이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 고를 생기게 합니까. 그러니 좀더 놓아서, 죽고 사는 데도 놓고 생사도 놓고 그렇게 갈 수 있어야만이 이 모든 것을 벗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가 낫게 하는가요?
이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게 암환자라든지, 현대 의학으로써 나을 수 없는 그런 병들도 선원에 와서 공부를 해 나가다 보면 낫는다고 합니다. 그럼 스님께서는 스님이 낫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주인공이 낫게 하는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에도 기도원이나 그런 데가 있어서 예수님께 다 맡기면 예수님이 알아서 다 낫게 해 주신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요?
그러면 항상 바깥의 노예가 돼야 되지 않을까요? 항상 빌어야 하고, 항상 낫게 해 달라고 빌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불교에선 그렇질 않아요.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즉,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 세세생생에 벗어나려 하는 사람들은 말입니다, 이 마음은 체가 없어서 너와 나와 말을 할 때, 벌써 이 전기가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해지는 순간이에요. 합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둘이 아니기 때문에 한쪽에서 네가 불이 들어오게 했다 내가 불이 들어오게 했다, 이렇게 할 수가 없단 얘깁니다.
알아듣겠어요? 양쪽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져야 불이 들어오죠. 그런데 이쪽 놈이 했다고 할 수도 없고 저쪽 놈이 했다고 할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말을 하는 순간에 이 마음과 마음은 전기와 같이 탁 붙어서 불이 들어왔다 이겁니다. 그랬는데 어떤 놈이 낫게 해 줬다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네 마음, 내 마음이 둘이 아닌 데서 불이 번쩍 켜진 거죠.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을 생각을 할 때 때리든지 안 때리든지, 욕을 하든지 욕을 안 하든지 부모는 자식을 무조건 사랑을 해요. 그거를 자비라고 해요. 무조건 하는 것이 자비예요. 거기 이유가 붙어서 사랑을 한다, 뭘 한다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지 받는 것이 사랑이 아니에요. 진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자비가 될 수 없다는 얘기예요. 그래서 여기서는 업보가 붙을 자리가 없다는 걸 강조하고 병이 붙을 자리가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체가 없는데 병 붙을 자리가 어디 있겠어요? 없다는 그 자체는 너무 고정되게 있지 않고,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고, 걸어온 자체가 없고, 말한 자체가 없고, 이름을 부른 자체가 없어요. 자체가 없이 돌아가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말이에요. 그러고 돌아가니, 그걸 비유해서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아갈 때 아주 보이지도 않지요? 그런데 그렇게 돌아간다면 먼지 앉을 게 있나요? 우리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의식이 그런 거를 몰라서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사니까 그렇지, 이거 하나도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거예요. 이런 물컵 하나에도 지수화풍을 통해서 바로 우주개공이 있듯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거를 가지고 부처님이 낫게 해 주셨다고 안 하고 ‘당신네들이 할 수 있다. 당신네들이 낫게 했다.’ 이런 말을 하냐 하면, 여러분이 한 열매가 열려서 익어서 만 가지 맛을 내게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모르기 때문이죠. 그냥 자기가, 자기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상대도 없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낫게 했지요. 안 그런가요? 업보도 자기가 짓는 거요, 선보도 자기가 짓는 거요, 바로 애고도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이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자기가 무너뜨리는 것이니 모든 것을 하는 것도 자기가 하는 것이라는 걸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2008-02-25 오전 9:4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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