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김남조(숙명여대 명예교수·시인)
주최 : 전국여교수연합회
일시 : 2008년 2월 15일
장소 : 서강대학교 마태오관
2008 한국 석학들로부터 듣는 새해소망
“전문직 여성들에게 바라는 소망”
Soft Power. 이 시대의 여성 지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전국여교수연합회(회장 신혜경)는 여교수들의 권익보호와 회원 상호간의 유대강화를 위해 창립한지 올해로 10주년을 맞는다. 여성전문인의 사회적 책임과 지도력이 요구되는 요즈음. 김남조 시인은 교육자로서의 학문적 정진은 물론 사회의 어두운 곳과 약한 자를 위한 여성으로서의 역할 발휘를 제안한다.
우선 저는 석학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이 바로 석학이십니다. 왜 여러분들이 제 말을 들으려 하시겠습니까. 새로운 사고, 새로운 논리로 선진적인 여러 가지를 꿰뚫어 보는 분들이신데요. 세월에 대한 이야기, 아직 읽지 않은 미래의 책 한 페이지를 엿보는 호기심으로 제 이야기를 청한 것 같습니다.
관상을 보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한 번 만나면 여러사람들이 신뢰감이 생긴다고 하네요. 그 비결을 알아보니 첫 마디가, “당신은 외로운 사람입니다. 당신은 남모를 고독을 안고 삽니다.” 이렇게 하면 대부분의 손님은 잘 맞춘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연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는 고독하다’는 생각이 있다고 한다면 저는 아니라고 반론 하고 싶습니다. 프랑스의 시인 폴발레리(PaulVallery)는 말 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시고 관찰해 보니 고독이 조금 모자라, 더 깊은 고독을 지닐 방법을 고민하다가 반려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의 농담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로써 고독이란 말이 좋아지면서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 고독을 알고 고독의 관문을 지나면서 성숙하는 것이라면 타인의 아픈 마음에 가려진 음울한 울음을 헤아리는 것이 성숙을 도와주는 효모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몇 일전 숭례문을 지나는데, 상여갈 때 나는 소리를 내며 장례식과 같은 풍경이 펼쳐지더군요. 황량한 풍경 속에 여러 사람이 함께 비통하고 참회를 섞어 오열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이 숙연했습니다. 성전에서도 가장 거룩한 곳은 여러 사람이 함께 울음을 터트리는 장소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마음의 밑바닥을 기울임은 필연 인간의 진실이 있는 까닭입니다. 그 관문을 통과해 나온 이들은 그들만 아는 이해를 통해 친구와 동지를 지닐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모든 나쁘다고 여겨지는 통념에 있어서 그것의 한켠에는 빛을 갖고 가치를 수반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동시에 제가 하는 모든 말은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알고 있던 사실들입니다. 문학하는 이들은 사실 낡은 말들 오래된 생각의 낙엽들을 뒤집어 그 밑의 따뜻한 지열을 되풀이 하는 것일 뿐 다른 사람보다 앞서 무엇을 찾아냄이 아닙니다. 문학가란 사람의 마음을 통과했던 온기를 들춰내는 사람입니다.
평범한 이는 행복을 원하고, 지혜로운 이는 가치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선 행복을 탐냅니다. 그 행복 안에 가치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점차 그 행복에서 물러서고자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진 공통 이념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평범한 사람이고 가치보다 행복의 대열에 서고자하는 본심이더라도, 어느 때에 둘 중 하나를 가질 수밖에 없다면 울면서라도 가치의 대열에 서는 것이 교육 받은 우리들의 양심이라고 봅니다. 노력하려 하고 극기하려 해야합니다. 삶이란 세계와의 결혼이라고 했습니다. 자신만의 두꺼운 껍질을 벗어내고 무한정 먼 거리에 다가가는 사이에 많은 만남과 이별의 과정을 통해 점차 자기를 확대해야 합니다. 전체 안에서 편안하게 되는 것 이것은 마침내 삶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랑으로 육체가 영혼 안에 포함된다’는 맥락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 한 구절을 들겠습니다. “한 송이의 장미는 천의 장미이다. 그리고 그 이상이다. 한 송이의 장미와 천의 장미가 같을 수 없는데 같다”고 했습니다. 한 송이의 장미는 그것만으로도 완벽한 것, 가득한 절대 가치입니다. 여기서 천이나 만이라는 숫자는 의미를 상실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세상은 너무나도 빨리 변화합니다. 네 살 된 아이가 할머니 핸드폰을 만지면서 금방 할머니의 사진을 찍습니다. 뭔가 너무 정신없고, 우리는 대행 업자에게 많은 부분을 위탁하면서 속도상승의 시대에 1초를 아끼는데 인간의 한계를 넘어 100년을 소비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때에 한 쪽에 목소리가 있어 본질을 말합니다. 오늘 여기 있는 우리야말로 그 본질에 대한 소리에 관심을 지녀야 한다고 봅니다. 사람의 본질에는 천부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나라사랑은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터득합니다. 부모공경과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찬미도 그러합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는 어느날 아침 동산을 올랐습니다. 눈 먼 한 소녀가 연꽃으로 만든 목걸이를 엮어 걸어주었습니다. 시인이 말하길 “두 눈에 눈물이 샘솟듯 넘쳐났네. 너는 꽃과 매한가지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스스로 눈 감아 모르고 있구나.” 눈 먼 소녀가 자신의 어여쁨을 스스로 못 보듯이, 꽃이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못 보는 것처럼, 그리고 그 두 가지의 눈 감은 진실의 아름다움이 이 시인에게는 감탄을 넘어 묵언의 눈물을 샘솟게 한 것입니다.
시인 파블로네루다(PabloNeruda)의 시 ‘토마토에게 바치는 찬송가’는 제가 큰 충격을 받은 작품입니다. 우리가 채소 혹은 과일 아니면 그 언저리로 여기는 토마토에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올려 모아 찬송합니다. 보편화 되고 오랜 세월 방치됐던 가치를 어떤 한 사람이 지적합니다. 관습 속에 잠들어 있던 귀중함을 찾아낸 것입니다. ‘식칼이 가슴을 쪼개면 압도해 오는 붉은 심장의 향기’라고 말입니다. 이 자리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때는 물러서고 내려앉으며 관용하자는 것입니다. 너무 위태롭게 달려가는 발걸음에 대한 쉼을 당부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진정 이래도 좋은가’하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내 죽음의 시기를 보고서에 의해 내다볼 수 있는 시대, 신의 영역이 인간의 영역 속에서 개발된 시대, 이런 현실은 ‘하루아침 꽃동산에 눈 먼 소녀를 만났네. 그는 두 손으로 가녀린 열 손가락으로 화환을 만들어 내 목에 걸어주었네. 그 순간 나는 두 눈에 샘솟는 눈물을 겉잡을 수 없었네. 소녀여, 너는 꽃과 매한가지, 스스로 너의 어여쁨을 눈 감아 아득히 모르고 있나니.’ 우리 인간은 사실 상당히 영광된 존재입니다.
저는 어느덧 노년기에 들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은 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과 이제 겨우 삶의 낯설음이 가시려 하는데 내 생애가 저물었다는 점입니다. 항상 낯설어서, 언제라도 적응이 안됐는데, 이제야 삶이 맛 들여지고 친숙해졌는데, 이제부터 살줄 알 것 같은데 벌써 생은 저물어 갑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여든 살이 되면 어떻습니까.” 답한다면 “참 좋습니다. 노년을 위해 준비된 선물들을 받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걸핏하면 잠이 안 오고, 조금만 상처 입으면 면도날 끝으로 그은 듯 실오라기 같은 유혈이 흘렀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훨씬 말도 적어지면서 바라보는 쪽으로 침착합니다. 이제 겨우 어린이와 젊은이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해야겠다는 축복도 하게 됩니다.
석학으로서 새해 소망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돼야하는가. 우선 전체를 생각하는 바라봄이 필요합니다. 전체의 타당성과 가치를 봅시다. 그리고 성심과 성의를 다하여 마음을 기울여 서로의 가슴과 가슴의 교감을 확산합시다. 대화 속에서 우리는 지혜를 가져야겠습니다. 화술의 선수란 말 안에서 개발을 하고 언제나 풋풋한 화제로 말의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에 맹인들의 오케스트라 관련기사가 났더군요. 고도의 집중력으로 노력한 결과입니다. 사람에게 신비한 어떤 번역의 기술이 있어서 우리를 감동케 할까요. 하나의 보물과 같은 작은 우주를 선물 받은 인간의 축복인 것입니다.
가연숙 객원기자 omflower@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