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날 밭에서 땀을 흘리고 일하던 농부가 부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일년 내내 힘들게 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는 땀 한 번 흘리는 법이 없이 먹고 사는 부처님이 못마땅하여 물었다. “우리는 밭을 갈고 씨를 뿌려 열심히 곡식을 가꾸어 먹고 사는데 당신네 비구들은 왜 하는 일도 없이 밥을 얻어먹고 사는 것이오?” 부처님은 농부에게 “비구들은 마음의 밭을 갈고 씨를 뿌려 많은 사람에게 좋은 법을 나누어주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의 밭을 일구기 위하여 신도들의 공양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출가한 스님이다. 그런데 이 스님들이 따뜻하게 옷을 입고 배불리 먹고 사는 데에만 급급하여 시주의 은혜를 저버린다면 이들의 과보는 어떻게 될 것인가? <선가귀감> 62장에서 말한다.
於噫佛子 一衣一食 莫非農夫之血 織女之苦 道眼未明 如何消得
아! 부처님의 제자들이여! 그대들이 입고 먹는 한 벌의 옷과 한 그릇의 밥에 농부들의 피와 땀이 어리지 않은 것이 없고 베를 짜는 아낙들의 땀방울이 스며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도에 대한 안목이 밝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시주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불자(佛子)’는 부처님의 제자로 부처님의 아들이란 뜻이다. 불교를 믿는 사람은 남녀노소, 승려와 속인을 가릴 것이 없이 누구나 다 부처님의 제자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 새로운 삶을 통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세상을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 제자로서 자신의 지혜로 참 성품을 깨우치지도 못하고 올바른 인과(因果)도 잘 알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부처님과 신도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시주를 받아 죽을 먹으면서 축원하되 그 참뜻을 알지 못한다면 이 또한 단월의 정성에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 시주를 받아 공양을 하고 염불하면서 부처님의 깊은 이치를 알지 못한다면 이 또한 성현에게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겠는가?[得粥祝願 不解其意 亦不檀越 應羞恥乎. 得食唱唄 不達其趣 亦不賢聖 應 愧乎]”라고 말하였다.
야운(野雲) 비구도 <자경문(自警文)>에서 도(道)를 닦는 수행자의 첫 번째 마음가짐을 ‘부드러운 옷이나 맛있는 음식 같은 공양물을 함부로 받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농부들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뒤에 곡식이 되어 나에게 이르기까지는 이 공양물에 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것이다. 농부들이나 베를 짜는 처녀들의 피땀 어린 땀방울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죽어간 벌레나 짐승들의 희생이 얼마나 되는지도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와 땀으로 나만 이롭게 하는 일은 참으로 옳지 않다. 그런데 하물며 땅속에서 꿈틀거리는 미물일지라도 소중한 그들의 생명을 죽여 나만 살고자 하는 마음을 수행자의 처지에서 감히 어찌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농사를 짓기 위하여 땀을 흘린 농부라도 굶주림의 고통이 늘 도사려 있는 것이요, 베를 짜는 여인네라도 매서운 추위에 자신의 몸을 가릴 옷조차 없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하물며 땀 흘리는 일이 없이 오랫동안 손을 놀리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 수행자라면 추위와 굶주림을 싫어하는 마음을 어떻게 낼 수 있겠는가? 부드러운 옷이나 맛있는 음식에 들어간 그 깊은 시주들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이 공양을 받는 일은 도 닦는 길에 크나큰 장애가 될 것이다. 떨어진 옷이나 거친 음식이라 하여 시주의 은혜가 가벼울지라도 고마운 마음을 지닌다면, 시주에 대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커다란 음덕(陰德)을 쌓게 될 것이다. 이번 생에 참마음을 밝히지 못한다면 한 방울의 물도 시주의 은혜를 갚기 어려울 것이니라[自從耕種 至于口身 非徒人牛功力多重 亦乃傍生損害無窮 勞彼功而利我 尙不然也 況殺他命而活己 奚可忍乎. 農夫每有飢寒之苦 織女連無遮身之衣 況我長遊手 飢寒何厭心. 軟衣美食 當恩重而損道 破納蔬食 必施輕而積陰 今生未明心 滴水也難消]”
수행자의 몸에 걸치는 옷과 입에 들어가는 한 톨의 쌀, 거기에는 길쌈하는 여인네와 농사짓는 농부의 피와 땀이 어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시물(施物)을 받아쓰는 것을 그냥 생기는 공것이라 생각한다면 이는 커다란 잘못이다.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린 사람들의 은혜를 갚지 않고서는 그 과보를 견디어 낼 수 없는 것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인과(仁果)의 법칙이며 인연(因緣)의 소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시주의 공양을 받는 일은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경(經)에서도 “수행을 하지 않고 신도의 공양물을 축내는 것은 큰 도적”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겁나는 일이다. 이 이치를 알고 있는 야운(野雲) 스님은 밥 한 술이 농부의 땀 한 말이요 시주의 핏물 한 말인 줄 알고 “이번 생에 참마음을 밝히지 못한다면 한 방울의 물도 시주의 은혜를 갚기 어려울 것이니라[今生未明心 滴水也難消]”고 말하였다. 서산 스님은 말한다.
傳燈 一道人 道眼未明故 身爲木菌 以還信施
<전등록>에서 이르기를 “옛날 어떤 수행자는 도에 대한 안목이 밝지 못했으므로 죽어서 목이버섯이 되어 시주의 은혜를 갚았다”라고 하였다.
가나제파(迦那提婆) 존자가 비라국(毘羅國)에 간 일이 있었다. 그곳에 살던 정덕(淨德)이라는 장자의 집 정원수에 커다란 목이버섯이 자라는데 아주 맛이 있었다. 둘째 아들 라후라다(羅?羅多)가 그 버섯을 늘 따먹었는데 따내면 바로 다시 생겨나는 이상한 버섯이었다. 정덕은 집으로 초청한 가나제바 존자에게 이상한 버섯 이야기를 하고 그 까닭을 물었다. 전생의 일을 환하게 알 수 있었던 존자는 그 연유를 정덕에게 설명하였다. 정덕의 집안에서는 일찍이 한 스님에게 오랫동안 지극정성으로 공양을 올렸는데, 그 스님이 도를 깨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시주 받은 은혜를 생전에 도를 깨달아서 갚지 못했기에 그 스님은 시은(施恩)에 보답하기 위하여 금생에 목이버섯이 되어 갚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생에 도를 깨치는 것만이 시은에 보답하는 길이니 야운 스님은 도를 닦는데 전념하는 수행자의 맑은 삶을 게송으로 말한다.
菜根木果慰飢腸 松落草衣遮色身 野鶴靑雲爲伴侶 高岑幽谷度殘年
풀뿌리와 나무 열매 음식을 삼고
나무껍질 풀줄기로 몸을 가리며
뛰노는 학 푸른 하늘 구름 벗 삼아
높은 산 깊은 계곡 도를 닦으리.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