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징자 칼럼니스트
화려하고 강렬한 음색을 지닌 날라리라는 전통악기가 있다. 날라리는 농악마당에서도 한판의 굿마당에서도 불교전통 음악인 범패에서도 가락의 주도권을 잡아 한 마당 가득 생명감을 불어 넣는다. 그것이 궁중 전통 제례악으로 가면 ‘태평소’라는 이름을 얻고 그에 걸 맞는 장엄한 선율을 뽑아낸다.
2월 25일 치러지는 17대 대통령 취임식에 그 태평소와 큰북을 합쳐 둥그런 곡선으로 처리한 ‘태평 고’라 이름 붙인 엠블럼이 등장한다. 대표적 전통 리듬 악기와 멜로디 악기가 합쳐 ‘함께 가요’라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목말라하는 조화로운 삶에 대한 기대를 부풀려준다.
그동안 대통령 취임식 때마다 시대적 상징성을 보여주는 멋진 엠블럼이 등장했고 그때마다 우리는 새로 출발하는 정권에 대한 기대감을 지니곤 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지난 취임식들에 비해 이번 취임식에서는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봉과 황, 암수 한 쌍의 그 봉황이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둘러싸고 있는, 지금까지 대통령 문장(紋章)으로 쓰이고 있는 그 봉황문장을 취임식에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당선인이 평소 권위적으로 보아온 그 문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인 모양이다.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는? 당선인이 개인적 신념이나 호오(好惡), 아니면 민주주의 국가에 절대군주시대 지배자를 상징했던 것을 왜? 라는 식의, 당선인 자신의 ‘해석의 폭’을 가늠하게 하는 거부반응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추측해 보면 그동안 그 문장을 후광으로 참다운 권위가 아닌 꼴불견의 권위주의를 휘둘렀던 몇몇 전직들 때문에 봉황문장이 도매금으로 함께 꼴불견이 된 것은 아닌가? 그런 점에 대한 당선인의 거부감이라면 여기에 동의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거룩한 말씀이라도 그것을 쓰는 사람에 따라 말씀이 거룩해질 수도 더럽혀질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안다. 문장(紋章) 역시 마찬가지다. 문장이 상징하는 인물이 어떻게 처신해 왔느냐가 그 문장을 빛내기도 하고 더럽히기도 한다. 하켄크로이츠가 나치 때문에 이미지가 더럽혀졌다면 같은 문양이라도 불교의 법륜이나 기독교의 갈고리 십자가는 성스러운 기호가 된다.
봉황은 서양의 불사조인 피닉스, 불교의 성스러운 새 가릉빈가와 같은, 인류가 상상의 나래를 펴 만들어 낸, 오색 깃털에 아름다운 음색으로 노래하는 최고 최선의 상징물이다. 이 새들 만큼 아름다움과 평화, 상서로움을 드러내는 신조(神鳥)도 없다.
봉황문장은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 대통령 문장으로 태어나, 역사와 전통을 만들며 나름대로의 권위를 만들어 왔을 것이다. 지금 청와대 곳곳에 새겨져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 사용하는 집기며 선물용으로 제작되는 물건들에도 새겨져 있을 것이다.
다행히 취임식 이후 그 문장을 계속 쓸 것인지, 아니면 가능한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는 아직 결정내리지 않았다 한다.
그러할 리 없겠지만 만약의 경우 이를 폐기한다면 공연한 참언(讖言과 讒言)의 온상을 만드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아니 벌써 일각에서 터무니없는 말이 들리기도 한다.
몇몇 전직들로 하여 봉황문장의 권위가 우습게 되었다면 새로 취임하는 분 스스로 경멸받아 마땅한 권위주의 아닌 진정한 권위를 회복해서 문장의 권위도 함께 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낮은 데로 임하고, 불교적으로 하심(下心)해 그 초발심을 잊지 않고, 그리고 천성적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한 당선인이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을 이루려 그 천성을 십분 발휘한다면 당연히 대통령도 봉황문장도 ‘진정한 권위’를 찾을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