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이지젝(Slavoj Zizek)의 “사랑의 윤리학”
한국이 정치 경제를 비롯한 문화의 전환기인 까닭일까. 슬라보이지젝(Slavoj Zizek)의 첫 느낌은 여느 철학자와 남다르다. ‘문화이론의 엘비스’라는 별명을 지닌 유럽 변방의 철학자 지젝. 우연처럼 보이지만 사실 운명이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만남의 순간 경험’을 강조한다. 처음 지젝을 접하는 이들에게 당혹스러울 수 있는 그의 이론은 만만치 않다. 한국인이라는 공업(共業)중생의 위력을 인정하게 된다고 할까. 그나마 통쾌한 것은 닫힌 사고를 향하여 퍼붓는 지젝의 호통이다. ‘경제를 살리겠노라’는 차기 정부의 공약을 지젝이 들었다면 그의 입에서 “너무나도 당연한 당신들 행위의 동기는 과연 무엇인가. 한 부분의 개선이 전체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까” 라는 도발적인 질책이 나왔으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낯설고도 새로운 철학자 지젝이 제안하는 사랑의 윤리학. 만약 지젝이 여래장(如來藏)을 알았다면 ‘모두 아님(NotAll)’안의 모든 것(All)을 재해석 해야만 하지 않았을까. 다시 인간 지젝이 껴안은 습(習)으로 되돌아간다.
#변방에서 대중을 흔드는 슬라보이지젝(Slavoj Zizek)
라캉주의자. 유럽의 정신분석학 철학자로 인정받는 지젝은 1949년 지금의 슬로베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동구권에서는 헝가리와 함께 ‘자유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국가였죠. 락음악은 노동자의 음악이라는 인식과 리바이스 청바지는 암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당시였습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친 후 슬로베니아로 되돌아와 동유럽 개방을 경험한 그는 1990년 최초 자유선거가 진행됐을 때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기도 했습니다. 지젝 철학의 대상은 독일의 관념론입니다. 칸트에서 헤겔에 이르는 흐름을 복원하고자 했죠. 스스로 밝혔듯이 독일 관념론의 회복을 위해 라캉을 활용합니다. 또한 자신의 철학의 많은 부분을 마르크스에 의존하는 좌파 철학자임과 동시에 좌파에서 보일 수 있는 위선 마저도 비판합니다. 지젝은 미국의 세계화 전략에도 비판적일 뿐 아니라 유럽 중심주의적 전망에도 찬성하지 않는 주변부 철학자입니다. 더욱이 지젝이 자본주의 영화에 주목하면서 인간 정신의 깊은 내면에 대해 분석한 저서들이 대중에게 주목받는 요즘. 오늘 강연은 지젝의 텍스트를 읽는 준비 자세를 취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욕망과 충동의 마주보기
욕망은 윤리학이지만 미학 쪽에 가깝습니다. 충동은 거리 없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은 충동과 마주해야 하는데 그 마주함이 끔찍해서 ‘거리를 취하는 것’이 욕망이란 것입니다. 거리가 있으면 환상이 만들어지는 까닭입니다. 지젝은 텍스트에서 히치콕의 <밧줄>을 거론합니다.
수업시간에 선생은 나치를 주제로 학생들에게 말합니다. “약자는 사회에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다.” 이 말을 들은 학생들은 존재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되는 한 학생을 밧줄로 죽입니다. 이 사실을 안 선생은 당혹스러워 합니다. 살 이유가 없다고 말 한 핵심은 이데올로기적인 거리를 계산한 것인데 학생들은 그 거리를 없애고 문자 그대로 실행한 것입니다.
거리를 이야기 하는 미학이 당혹스럽게 된 순간입니다. 비난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 간극을 지적하는 이가 무서운 자가 아니라 그대로 실행하는 이가 무서운 자입니다.
주체에게 정말 두려운 것은 대타자에 의해 주체 자신이 정말 결핍되어 있음을 들키는 순간입니다. 내 욕망을 모두 알고 있는 자를 ‘All’이라고 합시다. ‘신’이라고도 하고 ‘실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핍된 사람들의 집합을 일종의 거세된 사람들의 세계. ‘NotAll’. 내부적 분열의 세계라고 합니다. 그 사이의 거리는 환상을 만들고 인간은 그 환상 속에 안주합니다. 현재 우리 인간의 삶은 어떠한가요.
#‘오이디푸스 콤플랙스’가 없는 유일한 자는 오이디푸스이다
오이디푸스의 행동은 무의식적이었기 때문에 죄의식이 없습니다. 이후의 인간은 죄의식을 지니게 됐지요.
한 예를 들어 봅시다. 모든 것을 다 지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보다 모자란 다수가 모여 모의를 합니다. “그를 죽이자.” 살해를 하고 심지어는 사체를 먹습니다. 벨기에 출신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중에 ‘기쁨(1926作·그림)’이라는 작품이 좋은 예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정신분석학 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통일성을 줌으로써 동일화(identification)가 형성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애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살해자의 자식들이 본인들에게 똑같이 자행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법을 만들어 부친살해를 금기했습니다. 아버지 살해가 금기된 세계. 그 법의 예외 대상은 오직 아버지뿐입니다. 아버지는 법과 관계없이 모든 것을 향유하는 절대자가 됐습니다. 원초적인 아버지는 절벽이라는 한계가 정해져 있는 예외적 공간이 됩니다. 여기서 욕망이 탄생합니다. 우리는 들어갈 수 없는 공간. 우리가 사는 법의 세계와 아버지의 낙원 사이에 거대한 환상이 만들어 집니다.
#윤리학의 조건: 낙원이 불가능한 것은 낙원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금기만 없어지면 우리는 예외적 공간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환상이 생깁니다. 아버지처럼 될 수 있다는 낙원을 향한 욕망이죠. 인간은 타락한 천사라는 환상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지젝은 반론합니다. “우리는 타락했다. 구원을 받으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우리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낙원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금기는 불가능이라는 거리두기로 방어를 형성합니다. 점차 신이 없다는 사실을 부인하며, 인간은 신에게 근접함이 금지되었다고 방어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만들어낸 환상, 즉 거리두기의 환상이 바로 윤리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됩니다.
“언젠간 먹고 말거야.” 치토스를 먹고자 하지만 결국 먹지 못하는 TV-CF 주인공처럼, 욕망이 지속되는 접근 불가능함의 전제는 그것 자체가 실현되지 않도록 지연시키며 끊임없이 연기됩니다.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단절의 거리가 있어야만 사랑 또한 지속된다는 것입니다.
#필요는 우연의 방식으로 (헤겔의 말을 빌리자면) 실현되는 것이다
충동은 예외적 공간에서 법의 세계로 하강합니다. 욕망의 상승에 대한 해결이죠. 단절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욕망은 질식하게 되고 환상은 소멸됩니다. 결국 예외적인 공간이 없어진 충동은 ‘Not All’의 세계에서 항상 갈등하고 분열하는 에일리언의 세계가 되는 현실인 것입니다. 예외를 통해서 ‘All’을 성취해야 하는가. 예외적 공간을 없애고 All이 되어야 하는가. 사랑의 윤리학이란 충동윤리로서 진리란 이미 발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결핍 없는 실체가 인간에게로 와 결핍된 주체가 되는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불완전의 결핍과 완전의 결핍이 겹치는 곳. 실체의 결핍을 주체가 알게 되는 순간 모든 분석은 종결됩니다. 이렇게 신은 죽습니다.
#하나의 울림. 그것은 진리 자체가 인간들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
인간의 세계는 기표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로 진리가 들어오는 순간 실체는 주체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윤리학입니다. 인간 속에는 실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과 실체가 될 수 없는 주체가 갈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 속에 들어와 있는 낙원이란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가연숙 객원기자 omflower@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