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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홍차의 제국
동양에서 가져온 신비한 차와 설탕은 당시 유럽인의 기호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처음부터 영국인들이 차만을 선호한 것은 아니다. 코코아 역시 귀족 부인들이 침대에서 마시는 아침 음료였으나 커피나 차에 비해 가격이 2배나 비쌌다. 1727년 자메이카를 강타한 허리케인은 코코아 농장을 전멸시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했다. 네덜란드와의 커피 수출 경쟁에서 밀려 있던 영국은 자메이카에 커피를 심어 커피를 본격적으로 재배하지만 이미 18세기 중엽 커피보다는 차를 더 많이 소비하게 됐다.
초기에 수입된 영국의 차는 주로 녹차였지만 18세기 말경 홍차를 선호하게 되면서 홍차 수입이 증가했다. 상인들은 찻잎을 크기와 색, 향기, 맛에 따라 분류했다. 녹차는 임페리얼(Imperial,大株茶) 하이슨(Hyson,熙春茶) 싱글로(Singlo, 松蘿茶) 등이 있었다. 홍차는 피코우(Pekoe, 白毫) 수총(Souchon, 小種) 콩고우(Congou, 工夫) 보우히(Bohea, 武夷茶)로 구별됐는데, 이 중 가장 품질이 좋고 비싼 것은 흰 솜털의 빛이 나는 피코우였고 일반적으로 많이 마시는 차는 가격이 저렴한 보우히였다. 영국인들은 뜨거운 홍차에 우유와 설탕을 첨가해 마셨다. 설탕은 당시 부유한 귀족들이나 맛 볼 수 있는 진귀한 것이었다.
한편 영국은 발바도스 섬을 설탕 식민지로 개발해 설탕 무역에서 많은 이윤을 축척하고 자본의 토대를 마련했다. 홍차와 설탕은 보완재 역할을 하며 대중 상품이 되어 영국의 경제 발전을 이끄는 계기로 작용하게 됐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차와 설탕의 소비는 일정하게 증가한다. 이렇게 홍차와 설탕은 중상주의 시대의 전형적인 문화로 막대한 부를 가져왔으며 ‘홍차 제국주의’를 만든다.
홍차의 대명사가 된 얼그레이, 다르질링, 아삼, 실론티 등은 당시 식민지에서 재배된 홍차들이다. 얼그레이는 영국수상 얼그레이 (1764~1845) 백작이 중국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을 때 차 제조법을 알아 영국의 회사에 알려 오늘까지 유명한 홍차가 되었다. 다르질링은 인도의 북동쪽 히말라야 산맥 다르질링이라는 지역에서 재배되는 홍차로 이곳에는 80여개의 다원이 있다. 이곳에서 자라는 차나무는 다양한 종(種)으로 각기 다른 맛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 봄에는 주로 신선하고 은은한 맛과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차가 생산되고, 여름에는 과일 향과 맛이 나는 찻물 색이 진한 차가 생산 된다. 가을 차는 향이 약하지만 진한 맛의 차가 생산된다.
실론 섬 역시 1802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당시는 커피 재배가 성행했다. 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잎 마름 전염병으로 커피나무가 죽게 되어 이곳에 차나무를 심게 된다. 제임스 테일러의 노력으로 차나무 재배가 성공을 거두게 되고 실론 섬은 커피에서 차의 섬으로 바뀌게 된다. 많은 자본가들이 그곳에 차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토머스 립턴은 실론 섬의 땅을 싼 가격에 구입해 차나무 재배를 시작한다. 뛰어난 광고 아이디어로 이미 백만장자가 된 립턴은 ‘산지에서 식탁으로’라는 슬로건을 걸고 차를 팔아 억만장자가 됐고 귀족의 작위를 받게 된다. 이처럼 영국의 차 식민지 정책으로 홍차의 대량 공급이 가능해졌으며, 영국은 ‘홍차의 제국’이 되었다.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2008-02-17 오후 3: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