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 종합 > 기사보기
마음의 차원이 높으면 사계절을 푸르게 살 수 있어요
어저께 금방 콩씨더니 바로 오늘에 콩나무가 됐더라!

오직 안으로만 들어가야 하는 이유


선원과 인연이 되어서 마음공부를 해 나가다 보니 어떤 거 하나 허투루 해 놓은 것이 정말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의식에서부터 재사, 공부 방법, 뜻풀이 경전, 하다못해 선법가까지도 타력으로는 조금도 샐 틈이 없이 만들어 놓으신 것 같습니다. 왜 그토록 모든 것을 오직 안으로만 들어가게 해 놓으셨는지요?


여러분께서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불구하고 이렇게 생활에서 참선이라는 것을 알 양으로 무척 애를 쓰는 것을 볼 때 참 감개무량하고 어떤 땐 너무 기쁩니다. 생활에도 도리가 있듯이 우리가 공부하는 데는 참 도리가 있어야 하고, 중심과 중도(中道), 중용이 있듯이 불가에서도 부처님 법을 진짜로 전수받고 진짜로 내가 정각을 이룰 때에, 어떻게 해야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께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셔야 할 겁니다. 조금이라도 그것이 틀리면 아니 되니까요.
팔만대장경을 보기 이전에 세상 돌아가는 거를 가만히 보십시오. 일체 만물만생이 죽었다 깨어나고 깨어났다 죽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고, 사계절을 통해서 수많은 생명들이 그렇게 봄이면 피고 또는 늦은 가을이 되면 단풍이 지고, 그러는 게 있는가 하면 사계절을 푸르게 살고 있는 게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 인간도 좀 더 차원이 높으면 사계절을 푸르게 살 수가 있다는 얘기죠.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100% 다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인간 되기가 어렵고 또 인간은 됐으나 아주 100% 인간이 돼야만이 진짜 인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어린애를 탄생시켜서 놓으면 그냥 인간이라고 하긴 하지만 100% 어른 사람이 된 것은 아니죠. 그와 같이 여러분이 많지만 그 중에도 완전히 인간이 된 분이 있는가 하면 인간이 덜 된 분이 있고 아직도 한창 자라야 할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도를 이루어도 견성한 것은 금방 태어난 아기와 같다고 그랬습니다. 둘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또 습을 녹이고 그래야 하기 때문에 또 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게 알기만 하면 그건 도가 아닙니다. 내가 남에게 목마른 데 줄 수 있고 내가 먹을 수 있어야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둘 아닌 도리를 알았으면 둘 아니게 나툴 줄 알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얼마만큼 이것이 똑바로 들어가야 되는 겁니까? 지금 컴퓨터라든가 전자기계라든가 이런 것도 글자 하나만 틀려도 그것은 모두가 틀려 넘어갑니다. 숫자 하나만 틀려도 전부 틀리고요. 여러분이 현재에 사시면서도 그러시죠.
그와 같이 우리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행선(行禪)이라고도 하죠.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니까요. 곧장 직선적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활구(活句)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세상이 돌아가는 걸 볼 때에 팔만대장경에 어떻게 그것을 다 쓸 수가 있겠습니까? 팔만대장경이 아무리 잘됐다 하더라도 삼세(三世)를 돌아가면서 이 모든 병풍 둘러치듯 한 이 세계, 우주 만물 이 자체는 아마 ‘팔만대장경은 저리 가라’ 할 겁니다. 왜? 팔만대장경 자체가 그냥 고정되게 쓰여 있지는 않지만, 여러분이 볼 때는 글자로 보이거든요. 글자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 글자 뒷면에, 백지의 뒷면에 또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방 너머 세계가 있고 서방 너머 세계가 있고 남방 너머 세계가 있고 모두 이렇게 있듯이, 이 너머 세계가 다시 또 있고 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니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똑바로 직결하지 못하면 통과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문에 들어설 수가 없어요. 이것을 학술적으로 하고, 경을 읽어서 한다면 문이 있는 것을 찾지만 문이 있는 것 뒤에 문 없는 문이 있다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문 없는 문을 찾기 위해서는 똑바로 들어가지 않으면 통신이 되질 않아서 연결이 되질 않아요.
그렇기에 나는 여러분을 이끌어 갈 때에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모두가 없고 당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모두가 있는 거다. 그러니까 너부터 알아라.” 이럽니다. 각자 나로 인해 생긴 거지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이게 똑바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또 내가 있기 때문에 바로 나를 이끌어 가는 나의 선장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놓으라니까 “참, 다 놔지지 않습니다.” 이러거든요. 왜 다 놔지지 않습니까? 모두 자기가 하는 건데요.
모두 그 껍데기 속에 알맹이가 있습니다. 알맹이와 껍데기가 둘이 아니게 만날 자기가 하고 있습니다. 잘했든 못했든 말입니다. 울게 된 것도 자기가 한 거, 웃게 한 것도 자기가 한 거, 즐거운 것도 자기가 하는 거, 슬픈 것도 자기가 한 거, 자기가 있으니깐 된 겁니다. 그게 모두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어렵게만 생각하지 말고 간단히 나로부터 생각하세요. 잘하든 못하든 울든 웃든, 어느 누가 하는가? 그래서 자기로부터 상대가 생겼고 세상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자라면서 ‘어! 이런 거구나!’ 자라 가지고 ‘아! 세계는 이런 거구나!’ 또 어른이 돼 가지고 ‘아! 세계는 우주화가 됐구나!’ 이렇게 아는 겁니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고 움죽거리고, 보고 들이고, 생각하고 하는 게 다 자기가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자기 아닌 자기가 하는 거죠. 부처님께서도 자기 그림자와 자기가 서로 싸운 겁니다. 둘 아니게 싸운 거죠. “너는 내 껍데기 아니야?” 그러니까 껍데기가 하는 소리가 “너는 내 알맹이 아니야?” 하고 말입니다. 얼른 쉽게 말해서 지금 공부해 내려가는 그 모두는 여러분 자신이 하는 겁니다. 남이 해 주는 것도 없고 남이 주는 것도 없고 뺏어 가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을 약하게 보지 마시고 당당하게, 내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입증해서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나를 아주 얕게 생각을 하고 나는 빼놓고 부처님을 위에 모신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그거는 백날 가도 부처님 속에 같이 한자리를 못합니다. 얕보지도 말고 높이 보지도 말고 평등하게 나와 둘 아니게 보세요. 그러면서도 바로 과거에 살던 자기 조상이기 때문에 그 자기 조상으로 인해서 자기 조상을 상봉을 한다면 바로 그게 견성입니다. 일체제불의 마음과 더불어 같이 할 때 그때 이제 성불이고요. 일체 만물만생과 더불어 응신이 돼서 나툴 때, 그때에 바로 열반경지까지, 구경경지까지 이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울어도 자기요 웃어도 자기요, 못해도 자기요 잘해도 자기요, 망해도 자기요 승화가 돼도 자기예요. ‘몽땅 놔 버려야 한다.’ 이런 것도 말입니다, 본래 몽땅 놓고 가는 겁니다. 왜냐? 내 몸속에 그렇게 자생중생들이 잔뜩 들어 있어서 같이 더불어 돌아가니깐 그놈의 게 전부 공(空)했죠, 네? 혼자 하는 게 한 알갱이도 없어요. 혼자 보는 것도 없고 듣는 것도 없고, 말하는 것도 없고 뭐 별게 다 혼자 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 이거는 내가 했다고 내놓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다 얻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다 얻어야 다 줄 수가 있는 거지 다 얻지도 못해 가지고 어떻게 남을 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똑바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또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성금에 대해서


저는 개인적으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죄송스럽게도 저 혼자 수습을 하지 못하는 문제를 가지고 큰스님 친견을 두 차례 했습니다. 저번 달에 한 것까지 세 차례 했습니다만 저는 정성금을 큰스님께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가운데서는 항상 감사하고 너무나 감사한 마음에 스님께 드리고 싶은 금액이 제 나름대로 정해졌습니다. 언젠가는 큰스님께 뭐 과자값으로 드려야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정해 놓고 있었는데, 저번 달에 제가 조그마한 사업체를 하기 위해서 어려운 일에 부닥쳤습니다. 그 일이 허가를 받게 되는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여 허가를 못 받게 되는 어려운 상황에 처했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공부로 하려고 했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또 큰스님을 친견을 하게 됐습니다. 친견하면서 조그만 저의 마음의 표시를 큰스님께 올렸습니다. 그리고 내일이면 건축 허가를 받아서 착공에 들어갑니다. 큰스님, 감사합니다.


지금 말씀을 길게 하셨으니까 긴 거를 한번 짧게 해 보십시다. 그렇게 또 누가 묻걸랑은 그러세요. “네 마음대로 해라! 적게 하든 많게 하든 너희들 마음대로 해!” 이렇게요. 그리고요, 이렇게 하는 거를 내가 굳이 말씀해 드릴 일이 있습니다. 내가 이 일만 되면 꼭 시주하겠다는 금액을 자기네들 마음으로 정해 놓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 건 대체적으로 없어요. 그런데 이제 드문드문 이게, 처음 오셔서 얼마 안 되는 그런 사람들이나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요, 그렇게 자기 마음으로다가 금액을 정해 놓게 되면 ‘그렇게 하겠다!’ 이렇게 해 놓고 그게 됐는데도, 그거를 안 한다 이겁니다. 이러면 그거는 됐다 하더라도 딴 게 문제가 일어난단 말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남의 물건은 가져가고 물건값을 안 갚으니까, 얼른 쉽게 말해서 그렇단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런 걸 이렇게 해 주시되 그 금액을 지어 놓고 ‘내가 이런 걸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단 있다면, 자기 마음으로 ‘그저 이런 게 이렇게 잘되면 어떡하든지 그저 불사도 하고 그러는 데 좀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고 다만 얼마라도 자기가 새 돈으로 정성껏 이렇게 해서 담아서 하면 대치가 될 것을, 그냥 그렇게 자기가 만들어 가지고 고생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만들어 가지고 고생을 하는 여러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뿐만 아닙니다. 사람이 생활 속에서 살아나가는 것도 그렇게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 놓고 “아이고, 죽겠다.” 그러곤 옵니다. 이거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이 길잡이 노릇 하기가 얼마큼 어려운지 모릅니다. 옛날부터 사람 셋 끌고 가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그러더니 정말입니다. 언제나 누가 스님 앞에 갈 때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러고 묻걸랑 “네 마음대로 해라.” 이렇게 하세요, 꼭! 자기네들이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자기네들이 할 일이지 않습니까!
또 부처님 앞에 갖다가 보시하거나 그러는 건 왼손으로 할 때 바른손이 모르게, 그렇게 무심으로 해라 이겁니다. 자기가 먹은 거고 자기가 쓴 거니까. 자기가 가져갈 거고 말입니다.
누구를 잘살라고, 누구 병 낫게 내가 약을 해 주느라고, 그렇게 누굴 위해서 해 주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먹고살기 위해서고, 자기가 살기 위해서, 자기가 먹기 위해서, 자기 낫기 위해서, 자기가 하기 위해서 갖다 하는 거지. 그러면 일체 만물만생이 다 같이 사니까, 같이 돌아가니까, 그쪽에서도 아! 하고 거기에 닿는 게 있거든요. 그러면 그쪽에서도 또 도움을 주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 자기 주처에서 의사도 나고 약사도 나고, 판사도 나고 관세음도 나고, 문수도 나고 전부 그렇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같이 공해서 돌아가니까요.

참선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요?


안녕하십니까? 불교 경전 공부와 참선에 관심이 많은 30대의 직장인입니다. 참선을 어떻게 시작해야 되는지 어디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지 막막하여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참선이라는 거, 예전의 스님네들은 ‘참선이라는 것은 꼭 해야 된다’ 하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아주 제 일등으로 쳤죠. 그러면 어떤 것이 참선이냐. 참선은, 행선도 참선이요 좌선도 참선이요 입선도 참선이요, 모든 행 전부가, 일거수일투족 전부가 참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모두 ‘아! 결제가 되면 한 철 선방에 가서 나야지. 앉아서 좌선을 해야 그것이 으뜸이지.’ 요렇게 변경이 돼 버렸단 말입니다, 마음이. 육신 떨어지면 마음도 떨어지고, 마음 떨어지면 코도 떨어지고 입도 떨어지고 다 떨어질 것을 뭐가 그렇게 쓸모가 있다고 그렇게 이 육신을 가지고 매달리고 그렇게 해야만 됩니까?
마음이 주인공에 모든 걸 일임을 시켜서 놓는다면 모든 것이 편안하고, 편안한 반면에 반드시 내가 생각을 하면 바로 자(子)가 되는 것이고 생각을 안 하면 부(父)가 되는 겁니다. ‘부와 자가 둘이 아니니라’ 하는 뜻은 ‘부가 자로 가면 자가 돼 버리고, 자가 부로 오면 부가 돼 버린다’ 하는 얘기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걸 어떻게 생략해서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가만히 있으면, 마음을 가만히 두면 부가 되는 것이고, 즉 말하자면 부처님이다 이 소립니다. 또 마음을 내고 움죽거렸다 하면 그것이 바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법신(法身)이자 화신(化身)입니다.
내가 움죽거릴 때는 부처가 아들로 가고, 또 내가 가만히 있으면 움죽거렸던 게 바로 부로, 자부처로 온단 말입니다. 그러니 이건 체가 없는 거라 왔다 갔다 해도 왔다 갔다 함이 없이, 함이 없이 그냥 가고 옴이 없이 그대로, 그대로 자가 될 땐 자가 되고 부가 될 땐 부가 되고 이런단 말입니다. 그 도리를 아실 것 같으면 우리가 수많은 유생(有生)이나 무생(無生)이나 전체, 즉 말하자면 저 물이나 산이나 들이나 어느 곳을 막론해놓고, 보이지 않는 데 영계, 유령, 유체 또는 세균이나 또 사람들 사는 마음, 천차만별로 마음 차원에 따라서 우리가 주인공에 모든 걸 일임하는 겁니다.
참, 구지 스님이 손가락 하나 척 들었다고 하니까 손가락을 보는 사람이 있는데, 손가락이 아니라 우주를 든 겁니다, 전체를.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손 든 것도 방편이니 손 들 것도 없이 내가 ‘아! 이런 건 이렇게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되자 바로 주인공과 함께 하는 거죠. ‘승보(僧寶)도 그러하니라. 불(佛)과 법(法)이 둘이 아닐진대 승보도 그러하니라. 승보는 그냥 따라가느니라.’ 이러거든요. 이 육신은 그냥 따라가는 거죠. 마음이 생기는 대로 그냥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불과 법과 승보가, 불과 법이 즉, 아비와 자식이 둘이 아니게 돌아갈 때는 승보도 그러하니라. 몸은 그냥 따라가느니라.’ 이런 거죠.
그렇다면 참선이라는 것은 주인공에 모든 것을 놓고…. 그 참 도리를 안다면 어떠한 거든지 못할 게 없고, 어떠한 거든지 주인공이 하는데 내 거라고 할 것도 없고 남의 거라고 할 것도 없을 겁니다. 모두는 내 것도 아니면서 전체 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따로 내 것이 있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일체 한생각에는 나도 건질 수 있거니와 남도 건져 줄 수 있는 그런 여건의 능력이 바로 샘솟듯 한다 이겁니다. 그래서 감로수가 돼서, 그 감로수로써 양식을 삼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 그냥 우리가 평상시에 앉고 싶으면 앉고 서고 싶으면 서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뭐 똥 누고 싶으면 똥 누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이럴 때 그냥 그 용도에 따라서 내 앞에 닥치는 대로 가는 그 자체가 바로 참선이자 그냥 도예요. 그러니까 행주좌와(行住坐臥)를 그대로 하시란 말입니다, 그대로. 우리가 앉아서 참선할 사이가 없는데도, 시간이 없는데도 참선한답시고 시간을 내서 앉았다면 그건 참선이 아니에요. 진짜 참선이라는 것은, 똥 누면서도 진짜 진실히 돌아간다면 이거는 참선이 돼서 그게 공덕이 되는 거고요, 공심(共心)으로 돌아가는 게 공덕이에요. 공심으로, 한마음으로 돌아가고 한마음으로 움죽거리고, 한마음으로 먹고 한마음으로 살고, 한마음으로 용을 하고 이러는 모든 것이 그대로 공덕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저것 따지고 이렇게 산다면 자기를 보기까지, 참 자기가 자유스럽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참 힘듭니다. 그러니까 직선적으로 들어가세요. ‘그냥 생활 자체가, 당신이 보고 듣고 하고 만나고, 식구들하고 같이 어울리고 사랑하고 돈 벌고 하는 그 자체가, 바로 그 당신 주인공 뿌리에서 나오는 거니깐.’ 하고 거기다가 다 맡기고 믿고 일임하고, 꺼내 쓸 때는 거기서 또 꺼내 쓰고, 이렇게 하시는 것이 그대로 참선입니다.

내가 어디서 왔나요?


제가 친하게 지내고 존경하는 분께 “내가 어디서 왔습니까?” 하고 물으니 “부처님 마음에서 왔다”라고 대답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걸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과연 어디서 왔나요?


‘내가 어디서 왔는가’ 하는 것은 물론 이렇다 저렇다 돌고 도는 물과 같은 것이지만 말 한마디 규정해서 아귀 짓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내가 알면 아는 대로 안다는 것을 세우지 않고 말할 수 있고 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 마이크가 있다고 합시다. 마이크 안에서는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옵니다. 지금 마이크의 근본은, 우리가 씀씀이가 없다면 이 마이크는 소용이 없죠.
이전도 아니요 이후도 아닙니다. 단지 화창한 날씨에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물이 흘러 돌 뿐입니다.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다 이 세상 살아나가는 데 모든 게 근본이 있습니다. 근본은 마음의 근본이겠지요. 그런데 그 마음마저도 세울 게 없으니 어디로부터 세울 게 없는 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내가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이것은 ‘계단이 없으면서도 한 계단이 있고 한 번 죽기 어렵다 했더니 두 번 죽기 어려워라. 두 번 죽기 어렵다 했더니 세 번 죽기 어렵더라.’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 번 죽어서 알고 두 번 죽어서 몰랐더니, 세 번 죽고 보니까 알고 모르고 혼비백산이 돼 버렸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줄창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물론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다고 그런 소리는 무슨 소리냐 하면, 억겁을 거쳐서 진화가 돼서 나왔지만 그것이 바로 오늘에 의해서 모든 게 규합이 됐다는 얘깁니다. 그건 무슨 소리냐 하면, 어저께 금방 콩씨였더니 바로 오늘에 보니깐 콩나무가 됐더라는 얘깁니다. 그와 마찬가집니다, 그 뜻이.
그러니까 억겁을 거쳐 나왔다 할지라도 이 몸 하나 난 것이 전체 그 습으로 인해서 두리둥실 뭉수리처럼 다 짊어지고 안고 이고, 이러고 바로 오늘의 내가 지금 살고 있죠. 전자의 살던 습을 지금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자라 하면 여자의 행동을 하는 습을 가졌고, 남자라 하면 남자의 습을 가졌고, 또는 애들하고 있으면 애들하고 같이 하면서 어른이라는 습을 가졌고 또 어른 보면 나는 젊은이라는 습을 가졌고, 살림살이의 모든 전체, 맛이 있다 맛이 없다, 이 모든 전체 이날까지 살아온 습에 의해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두 마디는, 글자는 똑같지만 사람이라고 해서 차원이 똑같은 바가 없습니다. 비유한다면 넝마도 있고 깡통도 있고, 무쇠도 있고 동도 있고, 금도 있고 은도 있고 이렇듯이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 서로 만나서 사는 것도, 서로 모이는 모임도 끼리끼리 모인다는 얘깁니다. 그건 왜? 자기의 습에 의해서 차원대로 자기 모임이 그렇게 모이게 되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인과라고도 합니다. 자기 습에 의해서 인과를 짓고, 인과를 지음으로써 그 습을 떼지 못하면 바로 그게 유전으로 변화하고, 유전으로 변화한다면 자기가 생각하고 아끼고 그러던 착을 둔 데에 꼭 유전성이 거기에 붙어 돌아가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얽히고설키고 그렇게 붙어 돌아가고, 끊임없이 끄달리면서 이렇게 여직껏 내려온 거죠.
그러면 앞으로도 그렇지 않은가. 습을 뗀다고 하기 이전에 내가 떼려고 하는 마음도 공이요, 또 내 몸도 공이다 이겁니다. 그러면 붙을 데가 없는데, 떼려고 하는 게 어디 붙을 데가 있느냐는 얘깁니다. 붙을 데가 없는데 뗄 거는 어디 있느냐는 얘기예요. 본래는 있다 없다가 흰 구름과 같은 겁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하죠?
그래서 우리가 일체 유생 무생의, 만 사람의 마음의 꽃이 향기로써 이 우주를 덮는다면, 우리는 이 마음이 어떻고 저 마음이 어떻고 이렇게 갈라서 사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꽃의 향기와 같아서 마음이 그렇게 똑똑하고 착하고 어질고 도의 의리 사랑을 저버리지 않는 지혜 높은 그런 넓은 사람이 있고, 또는 이 도리를 알아서, 공한 도리를 알아서 자기의 아상도 세우지 않고 욕심도 착도 두지 않고 둥글둥글 걸리지 않게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바로 법신이자 부처인 것이죠.
2008-02-16 오후 8:25:52
 
 
   
   
2024. 11.22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