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은 산업 혁명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사회 질서가 변화되고 문화적 변형이 이뤄진다. 상공업의 발달로 상인이나 기업가라는 신분이 형성되어 기존의 귀족계급과는 또 다른 신분으로 사회의 중요한 경제 요소로 등장한다.
서민들의 실직적인 소득 상승으로 인해 고가(高價)의 설탕과 차, 담배 등의 소비가 증가했다. 17세기 커피 하우스에서 커피를 애용했던 사업가와 지식인들처럼 노동자들은 산업 현장이나 거리의 광장에서 차를 즐겨 마셨다. 더욱이 기업주들은 산업화 시대에 걸맞게 노동에 지친 근로자를 위해 ‘차 마시는 시간(tea break)’을 따로 두어 잠을 쫓고 피로를 풀어주기도 한다. 이것은 생산력 증진을 가져왔으며 보건적인 역할까지 하여 그들에게 차는 가난하지만 마실 수 있는 사치품이 됐다.
또한 런던에 새로운 형태의 티가든(tea garden)이 등장했는데, 멋진 다기(茶器)에 담긴 차와 음식이 준비되고 다양한 공연이 이루어는 분위기 좋은 장소였다. 최초의 티가든은 ‘복스홀 가든’이다. 이곳은 격조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출입하는 장소로 자연스럽게 남녀가 만날 수 있어 특히 많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티가든마다 규칙이 있었는데 젊은 남성이 젊은 여성의 옷자락을 밟으면 사과하는 의미로 차를 대접해야 하는 곳도 있었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커피하우스는 이미 알코올 판매로 인해 상업적인 장소로 변했고, 우아하고 세련된 분위기에 어울리는 티가든은 점차적으로 늘어났다.
한편 도자기 산업의 번성으로 인하여 차를 마시는데 필요한 다기류가 발달했다. 도자기 회사의 홍보로 차(茶)와 다기류(茶器類)는 여성들의 최고의 소비품목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도자기 판매업체인 웨지우드(Wedgwood)사는 차 도구를 홍보하기 위해 차 시연을 보이기도 했으며, 광고를 하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이처럼 차와 다기류는 누구나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귀족에서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즐겨 마시는 국민적 음료가 되었다.
차가 대중화되자 영국 정부는 중국에서 수입하는 차만으로 부족하여 차를 직접 생산하는 정책을 펼친다.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 정보를 수집하였으나 구체적인 자료는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계속적인 조사를 통해 차 재배에 적당한 인도 일부 지역을 조사하여 마침내 아삼(assam)지역에서 야생차를 발견하고 이곳에서 차를 생산하기로 결정한다. 인도 윌리엄 벤팅그(William Bentinck) 총독은 차나무 재배를 위하여 1834년 ‘차업(茶業)위원회’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차나무 조사와 재배방법에 대하여 연구를 하게 된다.
하지만 야생 차밭을 차 산업으로 변화시키기에 아직은 역부족이었으므로 중국차 재배 기술을 도입하여 점차적으로 시행하였다. 1838년에 이르러 아삼의 차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따라서 동인도 회사는 기업가들이 차 플랜테이션을 설립하도록 하여 토지 임대료와 차에 세금을 부과하여 막대한 돈을 벌게 된다. 초기에는 노동력의 부족으로 인해 차밭 관리가 소홀해 질 낮은 차를 생산했으나 점차 차를 만드는 과정이 기계화되면서 생산비용을 절감하였다. 점차적으로 영국에서 중국의 차는 인도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