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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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선사(6)
묻되, 외상 설법은 안하십니까?
답하되, 곡차나 주면 그 핑계로 횡설수설…

경허 스님이 천장암에 머물던 어느 날, 시자가 스님에게 여쭈었다.
“스님은 누구든지 곡차에 안주를 가지고 와야 설법을 하시고, 그냥 와서 물으면 소나 닭 보듯이 아무 말씀도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스님께서는 선불이라야 설법을 하시고 외상설법을 아니 하시는 것입니까?”
“에이, 이놈아,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자리는 본래구족(本來具足)하여 사람사람이 다 구족하게 갖고 있거늘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곡차나 주면 이것을 핑계하고 이 소리 저 소리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니냐.” (경허집)

경허 스님은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수행자들이 불법의 도리를 물으면 종일 말없이 앉아 있곤 했다. 대신 누구든지 곡차를 올리며 법문을 청하면 곡차를 마시고는 하루 종일이라도 법문을 했다고 한다. 이런 광경을 자주 지켜보던 시자가 ‘스님께서는 만인 앞에 평등하셔야 할 도인이신데, 어찌 (곡차를 대접하는 여부에 따라) 그렇게 편벽하십니까?’ 하는 항의성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시에 아직 안목을 갖추지 못한 만공 스님이 곡차를 대접하지 않은 수행자들이 불법의 도리를 물었을 때 경허 스님이 침묵한 것을 대답을 회피한 것으로 본 것은 물론 잘못된 견해이다. 경허 스님이 묵묵부답한 것은 마치 유마 거사가 불이법문(不二法門)을 묻는 문수보살의 질문에 양구(良久), 즉 ‘잠자코 말하지 않은(默然無言)’ 것과 다름이 없다. 이를 한 번의 묵언이 우뢰와 같은 법문이라 해서 ‘일묵여뢰(一默如雷)’라고 한다.
<유마경> ‘불이법문품’에 보면, 여러 보살들이 저마다 불이법문에 드는 견해를 말하고 나서, 보살들이 문수보살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드는 것이냐?” 고 묻는다. 이에 문수보살은 “내 뜻으로는 모든 법(진리)이 말할 것도 없고(無言), 이를 것도 없으며(無說), 보일 것도 없고(無示), 알릴 것도 없어서(無識), 모든 질문과 대답을 초월한 것(離諸問答)이 바로 둘 아닌 법문에 듦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이어 문수보살은 유마 거사에게 묻기를 “무엇이 보살이 불이법문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하니, 유마 거사가 이때 잠자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문수보살이 찬탄하며 “좋고도 좋습니다(善哉善哉). 글자도 언어도 없음이니,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둘 아닌 법문에 듦입니다” 라고 찬탄한다. 개념과 언설의 차원을 초월한 말없는 대답을 본 문수보살이 유마 거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위 선문답에서 경허 스님의 양구를 이해한 수행자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이도 있을 것이다. 양구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 가운데 곡차를 대접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허 스님은 안주 삼아 마지못해 불법을 논할 뿐인 것이다.
불법은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에 한 법도 설할 수 없지만, 동시에 일체 법을 설해야만 불법이 끊어지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8만4000 법문을 설하시고도 한 글자도 설한 바 없다고 하신 뜻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고인들은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고 하면 경을 비방한 것이요, 한 법이라도 설한 바가 있다면 부처님을 비방한 것이다”고 했다.
입을 열면 불ㆍ조사의 뜻에 어긋나고 입을 닫으면 불법을 전할 방도가 없으니, 과연 어찌 해야 할까. 누가 불법을 물으면 경전에 집착하거나 매이지 않고 경전을 자유자재로 굴리며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8-02-16 오후 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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