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떤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덕이 높은 스님들과 앞으로 세상에서 이름을 빛낼 젊은 스님들이 많이 모여 축복된 그 날을 잊지 않으려고 기념사진을 찍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출가한 사람으로서 사진을 찍어 자취를 남긴다는 일이 어쩐지 낯설고 멋쩍었다. 공부가 부족한 나한테는 정말 분에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한쪽 구석으로 비켜나려는데 어떤 스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스님, 어서 빨리 오세요. 지금 세상은 자기 피알 시대예요. 점잖게 뒤로 빠진다고 누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이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선가귀감> 59장에서 말한다.
貪世浮名 枉功勞形 營求世利 業火加薪.
세상의 헛된 이름을 탐하는 것은 공력(功力)을 잘못 들여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것이요, 세상의 잇속을 찾아다니는 것은 ‘불길처럼 타오르는 중생의 업[業火]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다.
‘헛된 이름’으로 번역한 ‘부명(浮名)’은 실제와는 다르게 지나치게 부풀려서 말해지는 허황된 명성을 말한다. 세속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날리고 그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와 같은 세상의 이름들은 허공의 뜬구름 같이 곧 흩어질 헛된 것으로서 진실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나의 몸이 없어진 뒤 헛된 이름만 이 세상에 남아 있은들 나에게 무슨 보탬이 될 수 있겠는가? 세상의 헛된 이름을 탐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서산 스님은 시(詩)로 말한다.
하늘 멀리 기러기 날아갔는데 / 모래 위 발자취만 남아있구나
저승으로 사람들 가고 없는데 / 쓸모없는 이름만 집에 남도다.
[鴻飛天末迹留沙 人去黃泉名在家]
이 세상 모든 것은 세월 속에서 늘 변하는 것이므로 영원할 것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법은 인연이 모이면 생겨났다 인연이 흩어지면 없어지므로 영원불멸할 실체는 하나도 없는 것이다. 영원할 것 같은 이 세상조차 덧없는 세월 속에서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과정을 거쳐 언젠가는 없어질 것이다. 이 세상을 만든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의 인연이 흩어지면 이 세상의 모습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것인데 그 위에 떠도는 헛된 이름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느 누구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이름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큰 바위에다 자신의 이름을 후세에 남기려고 열심히 글자를 새기고 있는 모습을 길을 지다가다 보게 된 한 스님이 시(詩)를 읊조렸다.
돌을 쪼아 제 이름을 깊이 새기니 / 어리석은 그 모습이 가소롭구나
이 세상도 곧 사라질 거품 같은 것 / 그 이름이 얼마동안 보존될소냐.
[鐫石題名字 山僧笑不休 天地一泡沫 能得機時留]
돌에 자기 이름을 새겨 후대에 보존하려는 이런 헛된 노력이 바로 ‘왕공노형(枉功勞形)’이다. ‘왕공(枉功)’은 공력(功力)을 잘못 들이는 것이다. ‘노형(勞形)’은 공력을 헛되이 잘못 쓰게 됨으로써 공부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이 몸과 마음만 지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헛된 이름을 탐하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은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중생의 무거운 업만 가중시킨다. 이것에 대하여 서산 스님은 “공력을 잘못 들여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얼음조각을 다듬고 조각하여 예술품을 만드는 것처럼 쓸데없는데 자신의 기교와 솜씨를 다하는 것이다[枉功勞形者 鑿氷彫刻 不用之巧也]”라고 말하였다.
‘영구세리(營求世利)’는 ‘세상의 잇속[世利]’에 관심을 갖고 거기에 인연을 맺어 그 이익을 추구하는 것[營求]이다. 마음속에 있는 욕망을 모두 떨치고 세상일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이 수행자의 본 모습이다. 이렇게 살아야 할 수행자들이 재물을 모아 부를 축적하고 명품이나 사 모으며 비단옷을 입었다면 세상 사람들이 보는 그 모습이 어떠하겠는가? 원효 스님은 <발심수행장>에서 “마음 닦는 사람들이 세상일에 욕심을 내는 것은 눈 푸른 수행자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이다[道人貪 是行者羞恥 出家富 是君子所笑]”라고 말하였다.
출가자의 본분을 잊고 세상의 잇속을 찾아다니며 헛되이 세월을 보낸 수행자들이 맞이하는 결말에 대하여 서산 스님은 시(詩)로써 “온갖 꽃을 찾아다녀 애써 꿀을 모으지만 / 그 꿀맛을 맛볼 사람 마지막 그 누구일까?[營求世利者 有人詩云 採得百花成蜜後 不知辛苦爲誰甛]”라고 따끔하게 충고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과 명예, 이성(異性)에 대한 소유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끊임없이 찾아 헤매고 집착하며 살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중생의 업이다. 이 업의 바탕에는 중생의 욕망이 들어 있다. 이 욕망의 불길이 훨훨 타오르고 있으므로 ‘업화(業火)’라고 한다. 세상의 잇속을 찾아다니는 것은 욕망의 불길이니, 욕망을 부리면 부릴수록 그 욕망의 불길은 커지기만 하여 중생의 업화(業火)에 기름을 끼얹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잇속을 찾아다니는 것을 ‘업화가신(業火加薪)’이라고 한 것이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중생의 업[業火]’에 ‘기름을 끼얹어 더 많은 고통을 가중시킨다[加薪]’고 말하는 것이다.
중생의 업은 좋은 물건, 아름다운 소리, 향기로운 냄새, 맛깔스러운 맛, 상큼한 느낌, 자신의 판단 이 여섯 가지 경계에 집착하여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다. 여섯 가지 경계 곧 육경(六境)인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줄여 색향(色香)이라 한다. 이것들이 중생이 살아가는 삶을 추하게 거칠고[추( )] 나쁘게[폐(弊)] 만들어가므로 추폐색향( 弊色香)이라고 한 것이다. 서산 스님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좋은 물건과 향기로운 것들은 사실 불같은 욕망에 불을 활활 지피는 장작에 지나지 않으니 이를 탐하는 것은 불길처럼 타오르는 중생의 업에 기름을 끼얹는 격이다[業火加薪者 弊色香 致火之具也]”라고 말하였다.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