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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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유럽으로 건너간 차
차가 유럽인들의 미각을 자극하기 시작할 무렵, 유럽에는 각 나라마다 이미 여러 종류의 식물을 달인 음료가 있었다. 영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다양한 허브 차가 있어 가정마다 기침약이나 건강식품으로 이용했다. 커피나 초콜릿은 이미 사람들의 기호를 충족시키며 커피하우스 문화를 이루고 있었기에 차가 뿌리를 내리기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요구됐다. 사실상 지식인이나 귀족들은 쓴 맛이 나는 동양에서 온 ‘차’의 맛 보다는 신비한 동양문화를 지닌 도자기나 다기(茶器)에 관심이 더 많았다.
차와 도자기류는 네덜란드의 상인이나 중국에서 직접 수입하는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유입되었다. 일부 귀족들은 사치품으로 이용했으며, 영국의 일부 가정에서는 찻잎을 오랫동안 끓여 마시고 남은 찻잎에 소금과 버터를 발라 먹는 등 음료보다는 식품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차는 커피와 마찬가지로 약리성에 대한 기대로 의사들의 분쟁거리가 되었다. 코르시카(Corsica) 출신의 의사 시몬 파올리는 중국에서 들어온 차는 유해성분과 중독성이 있기 때문에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에서는 차의 효능에 대한 공개토론을 거치면서 잠시 유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높은 가격으로 인하여 상류층에만 마시게 되어 더 이상 음료로 자리를 잡지 못하였다.
독일에서 차는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문학 살롱에서 인기 있는 음료였지만, 커피에 비해 수입되는 양이 현저히 적었다. 프랑스인과 독일인들에게는 이미 깊숙이 뿌리내린 와인과 맥주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검소한 독일인에게 차는 사치품으로 인식됐다.
네덜란드와 영국에서도 차는 초기에는 가격이 비싸서 귀족들의 사치품이 되지만 국가의 차 정책으로 신사에서 극빈층에 이르기까지 유행하기도 했다. 이것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의 경제적 이익과 영국의 차 수출이 가져온 결과다.
영국에서는 토머스 게러웨이가 1657년 커피 하우스에서 차와 찻잎을 함께 판매해 차 마시는 문화가 빠른 속도로 확산됐지만, 차의 가격이 너무 비싸 커피 하우스에 드나드는 지식인, 상인, 귀족층만이 이용하게 됐다.
커피 하우스 건물 벽에 차가 질병 예방에 효능이 있다는 최초의 선전 광고 포스터가 붙으면서 시민들에게 차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크롬웰(1599~1658)은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정책으로 차에 특별세를 부과하지만 이로 인하여 밀매가 성행하는 계기가 됐다. 단속이 심해지자 교회의 지하실에 있는 유골이 담긴 관속에 향기 나는 차 자루를 숨겨두어 단속을 피하기도 했다. 성직자들이 밀매에 참여하면서 차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밀거래로 구입한 차를 마시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욱 흥미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편 이 당시 차(茶)는 광동어계인 차(Ch’a)와 복건어계인 테(Tay, Te)로 발음됐다. 차(Cha), 차이(cay)는 주로 북경, 일본, 한국, 터키, 러시아 등 육로(陸路)를 통해 전해진 곳에서 호칭되었다. 테이(Tey), 테(The)는 주로 해로(海路)를 통해 전해진 곳으로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스리랑카, 남인도 등에서 사용하는 호칭이다. 영국에서는 차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18세기에 차의 호칭이 ‘티(Tea)’로 통일된다.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2008-02-15 오후 7: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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