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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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선사 (4)
묻되, 아직도 쌀 자루가 무거우냐?
답하되, 어떻게 달려왔는지 모릅니다

경허 선사와 만공 스님이 탁발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만공 등의 쌀자루에는 쌀이 가득했다. 길은 먼데 몹시 무겁고 피곤했다. 선사가 만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거우냐?”
“예.”
“그러면 내가 무겁지 않은 방법을 가르쳐 줄테이니 너도 따라 하거라.”
그러자 만공은 귀가 솔깃하여 “예, 스님” 하며 대답했다.
선사는 마침 물동이를 이고 지나가는 젊은 아낙네의 양귀를 잡고 입을 맞추었다.
“에그머니나!”
여인은 비명을 지르고 물동이를 떨어뜨리고는 마을로 달려갔다. 이 소문이 곧 마을에 퍼지고 급기야는 몽둥이를 든 마을 사람들이 두 사람을 잡으려고 뛰어나왔다.
“저 땡중 놈들을 잡아라!”
선사는 이미 저 멀리 도망가고 있고 어안이 벙벙하던 만공은 놀라서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경허 선사가 말했다.
“아직도 무거우냐?
“그 먼 길을 어떻게 달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내 재주가 어떠냐? 무거움도 잊고 그 먼 길을 단숨에 달려왔으니 말이다.”

유명한 이 선화(禪話) 역시 무애자재한 행위를 통해 제자에게 심법(心法)의 이치를 깨닫도록 하는 경허 선사 특유의 심지법문(心地法門)이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혹시나 깨치지 못하고서 먼저 막행막식(莫行莫食)하는 무애행부터 흉내내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불법을 비방하는 자일뿐이다. 또한 단순히 파계(破戒)했다는 이유만으로 경허 스님의 무애행을 비판하는 것 역시 마치 ‘대통 같은 소견으로 비방하는’ 단견에 불과하다. 큰 코끼리는 토끼 길에 노닐지 않고, 큰 깨달음은 작은 절개에 구애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위의 선화는 무겁고, 가볍다고 하는 우리의 느낌이 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음을 일깨우고 있다. 마음속에 ‘한 물건(一物)’도 없다면 무겁다거나 두렵다는 생각이 발붙일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 때문에 이 선문답은 2조혜가 스님이 달마 대사를 찾아가 “마음이 불안하니 안심(安心)의 가르침을 주십시오” 라고 법을 청했을 때, 달마 대사가 안심법문을 베푸는 장면과 흡사하다. 달마 대사가 “너의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오너라. 너에게 안심을 주리라”고 했을 때, 혜가 스님은 “마음을 찾아 (팔까지 자르며) 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달마 대사는 “나는 이미 너를 편안케 하였다”고 일깨우는 장면이 그것이다.
불안하거나 무거운 마음, 그 어떤 마음이든 찾아본들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마치 ‘토끼 뿔’이나, ‘거북 털’처럼 허깨비로만 존재한다. 보고 듣고 감각하는 대상들 역시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은 “일체의 함이 있는 법(有爲法)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불안하고 무겁고 두려운 마음으로 허둥대거나 고통스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죄는 본래 자성이 없고 마음 따라 일어나니 마음 만일 없어지면 죄업 또한 사라지네. 죄가 없어지고 마음도 소멸하여 두 가지가 텅 비어지면 이를 이름 하여 참다운 참회라 한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8-02-15 오후 6: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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