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이제 해양심층수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 일본 노르웨이 등 오래전부터 해양심층수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로부터 심층수 생수를 비롯하여 수많은 제품들을 수입, 고가로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늦은 감 있으나 한국도 동해 권을 중심으로 해양심층수에 대한 연구와 활용이 막 걸음마를 떼고 있다.
해양심층수라면 적어도 바다 아래 몇 백m 깊은 계곡을 흘러 다니는 물로, 우선 오염돼있지 않고 표층수에서 얻을 수 없는 영양가가 많이 포함돼 있으며 표층수에 비해 온도가 아주 낮다.
태고 적부터 남북극의 빙하에서 녹아나온 차가운 물이 그 무게 때문에 바다 밑으로 갈아 앉아 바다 밑 깊은 계곡을 따라 흐르는 것인데, 그 물길이 지구를 한바퀴 돌면서 표층으로 올라오는 세월은 몇 천 년에 이른다.
예부터 심층수가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곳에는 신선한 먹이가 많아 고기들이 몰려 큰 어장을 이룰 수 있었던 곳이라 한다.
과히 천년의 물이라 할만 하며 생명의 물이라 할 만하다.
심층수는 사람이 마실 생수생산뿐 아니라 농수축산 분야, 건강 의료분야, 에너지 분야, 환경 분야에도 두루 활용된다.
예를 들어 지구 온난화로 바다 수온이 올라간다면 심층수를 끌어 올려 한대성 어류를 양식 할 수도 있고 여름 더위를 에어컨 대신 심층수를 끌어들여 식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고마운 자원을 그냥 반길 수만은 없다.
심층수를 반기는 이면에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물의 위기’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을 우리는 ‘생명수’라 한다. 사람 몸 속 구성 성분 가운데 70% 이상이 물이라니 그 ‘생명수’ 없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태고에 바닷물과 빛과의 교통이 생명 출현의 신비한 인연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니 물은 생명의 모성(母性)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상징성 풍부한 물은 이렇게 생명의 상징이면서 한편 종교적인 세계, 영성의 세계에서 죽음과 저승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새벽 우물에서 떠 온 정화수 한 그릇이 그 영성이며 불교의 관정(灌頂)의식, 기독교의 세례도 물의 영성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의 상징성은 동서양이 또한 다르지 않다. 고대 동서양 어디서나 이승과 저승 사이에는 강이 등장했다. 고대 그리스 저승 수문장에 해당하는 뱃사공 카론이 죽은 자를 건너 주는 강은 스틱스 강이고, 동양권의 삼도천, 기독교에서의 요단강은 물론, 부처님이 깨달음의 피안으로 정해 놓은 곳도 차안과 물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뗏목을 필요로 하는 곳이 아닌가.
그래서 물의 위기라 하면 바로 생명과 함께 영성의 위기가 된다.
강 호수 바다 등, 물이 고여 있는 곳 가운데 신비함을 간직하지 않은 곳 어디 있을까마는 특히 바다는 짐작키 어려운 그 넓이만으로도 신비롭다.
‘너무 넓거나 큰 것은 없는 것과 같다.’라고 누군가 말했다는데, 그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 종교의 영역일 것이며 바다는 종교적 신비를 간직한 그야말로 ‘해인(海印)’이 아닌가.
그 해인 속 깊숙이 천년을 흘러 온 심층수를 지구 오염의 마지막 대안으로 사람들이 지금 끌어 올리고 있다.
이를 어찌 반기기만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