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양홍 (楊泓.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통역 : 소현숙 (이화여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강사)
주최 : 불교중앙박물관
일시 : 1월 30일
장소 :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리장엄구
‘만들어진 모든 것은 변한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정진해 수행을 완성하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훈이다. 전륜성왕 장례법에 따라 다비식이 열리고, 사리는 중부 인도 여덟 곳에 나뉘었다. 이로써 불탑신앙이 시작됐다. 민중불교가 시작됐다. 역사적인 붓다는 진리의 말씀과 수행공동체로 남았다. 장엄된 사리는 불탑에 모셔져 순례자의 성지가 됐다. 사리는 산스크리트어로 ‘arra’. 참된 수행의 결과로 생겨난 구슬 모양의 유골이다. 중국말로 번역하면 골신이란 뜻이다. 사리가 ‘최고의 종교적 성물(聖物)’임을 알기에 불교문화사에서 자리하는 사리장엄구의 위치는 소중하다.
지난해 10월 출토돼 고고학계와 미술사학전공자들에게 이목을 집중시킨 왕흥사지 사리장엄구는 원통형 청동제 사리함, 은제 사리호, 금제 사리병으로 구성돼 불탑에 안장된 공양품이다. 그중 청동제 사리함은 중국에 전래된 인도식 사리용기를 원형으로 삼아 6세기쯤 백제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나온 왕흥사(王興寺)가 사리장엄구 명문에 조각된 ‘위덕왕 24년’이 아닌 ‘법왕 2년’에 창건됐다고 기록돼 있다. 사리함의 명문 해석이 사학계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의 의미’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가 열린데 이어, 불교중앙박물관은 중국 고고학자 양홍 선생을 초청해 한국과 중국의 고대 사리 장엄구 비교를 통한 양국 불교교류의 관계성을 모색해보는 강연회가 열렸다. 1400년 만에 지상으로 외출한 백제의 숨결을 만나보자.
한국과 중국의 고대 불교 사리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중국 고대의 불교 사리용기에 대해 설명해볼까요.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됐을 때 경전과 불상이 유입됐습니다. 그 이후 불교 건축이 이뤄졌고 사리를 매납하는 방법이 중국에 들어왔지요. 저는 고고학자이기 때문에 주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중국에서 출토된 불교사원 유적지에서 보이는 탑은 인도식이 아닌 변형된 누각식의 중국형태입니다. 원래 인도불탑의 복발형 탑 및 정상의 상륜 등은 축소되고 불탑 꼭대기의 장식적인 부분이 됐습니다. 때문에 중국에서 사리를 매납하는 방법이나 용기도 계속 변화해 인도와는 다른 중국식 특징이 출현했습니다. 중국화된 불교는 한국의 불탑 형태나 사리의 매납 형식에서도 확인됩니다. 때문에 한국에서 발견된 고대 불사리 용기는 형태나 미술사적 측면에서 중국과 깊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현재 고고학적 발굴로 보면 중국에는 유감스럽게도 5세기 이전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빠른 탑지 유적이 북위시대 481년 건립된 하북성에서 발견된 오급불도지(五級佛圖址)입니다. 수ㆍ당시대 들어서야 발굴된 사리탑지와 사리용기가 20여건에 이릅니다. 북조에서 당대에 이르는 시기의 중국 사리탑과 여기에 안치된 사리용기는 대략 네 단계로 구분됩니다. 이를 통해 사리용기의 변화와 특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자료는 불교의 전래와 중국화의 과정을 아주 잘 보여 줍니다. <표1>
주목되는 점은 중국을 통일한 수 문제 양견(楊堅) 인수원년(601)인 2단계 시기입니다. 수 문제는 전국 30주에 사리탑을 건립해 탑 아래에 사리를 안치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때부터 사리의 매납법이 황제의 규정에 따라 진행됩니다. 조서에 의하면 “유리병 안에 금병을 넣고 사리를 그 안에 넣는다. 훈륙향을 개어 뚜껑에 바르고 봉인한다. 30주 모두 동일시각. 즉 10월 15일 정오, 동함과 석함에 넣고 일시에 탑을 건립한다”고 규정돼 있습니다.
당 고종과 무후시기를 거쳐 무종의 폐불에 이르는 3단계 시기에는 사리용기 형태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변화의 주역은 측천무후입니다. 현경5년(660) 3월. 법문사 불사리를 동도 낙양의 궁중에 봉양할 때, “황후가 견 1000필에 해당하는 침의장(寢衣帳)을 희사하여 사리를 위해 금관과 은곽을 만들었다. 아홉 종류로 조각이 아주 정교하고 섬세했다”는 기록이 당나라 도선(道宣)이 지은 <집신주삼보감통록(集神州三寶感通錄)>에 있습니다. 이런 형태가 전국 각지로 퍼졌습니다. 탑을 만들어 불사리를 안치할 때 무후가 시작한 새 형식이 새로운 규범이 돼 사리용기가 제작됐습니다.
당대의 석조 보장은 경산사의 ‘석가여래사리보장’이 대표적입니다. 당의 융성기에 만들어진 제148굴 서벽 벽화처럼 당대 돈황 막고굴의 열반경변상도(涅槃經變相圖)에서 녹정형 덮개를 가진 화려한 영장 안에 관곽이 놓여있음이 보여집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국과 통일신라 사리장엄구의 연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림1>
불교는 중국의 중원지역에서 유행하기 시작해 요동반도를 거쳐 고구려에 전해집니다. 이후 한반도 남부의 고대국가까지 전파됐습니다. 백제는 중국 남조와 잦은 왕래를 통해 지속적으로 불교를 교류했습니다. 따라서 남조의 사리 안치법과 용기는 자연스럽게 백제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 되면서 백제의 불교 사리장엄 공예법이 전수됐습니다. 당대에 들어 통일신라와 당의 관계는 매우 밀접해집니다. 불교 전파와 상호 교류 또한 빈번했을 것입니다.
<삼국유사>권3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의하면, “진흥왕 때인 대청(大淸)3년 기사년(549)에 양나라 사신 심호(沈湖)가 사리 몇과를 가져왔다. 선덕왕 때인 정관(貞觀)17년 계묘년(643)에 자장법사가 부처의 두개골과 부처의 어금니와 부처의 사리 100립과 부처가 입던 가사 한 벌을 가져 왔다. 그 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 탑에 보관. 하나는 태화사 탑에 보관. 하나는 가사와 함께 통도사 계단(戒壇)에 보관했다”고 전합니다.
한국과 중국의 문헌 기록을 통해 역사상 고대로부터 불사리를 포함한 불교문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서 발견되는 고대 사리장엄구 또한 이러한 문헌 기록을 증명합니다.
최근 부여 왕흥사지 탑지에서 발견된 한 세트의 사리 용기는 중국의 북조에서 수를 거쳐 당초에 이르는 시기의 사리장엄구 형태와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청동제 사리함(舍利函) 안에 은제 사리병을 넣고. 은제 사리병 안에는 다시 황금으로 만든 작은 사리병을 넣었습니다. 순금으로 제작된 맨 가운데 용기 안에는 사리가 아닌 맑은 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런 다중 용기의 사용은 중국의 법문사 지하궁에서 발견된 부처의 지골 사리를 담은 장엄구와 유사합니다. <그림2>
왕흥사지에서 발굴된 사리함에는 ‘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 위덕왕 24년(577)에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비로운 조화로 셋이 되었다(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고 각인된 명문이 있습니다. 이 명문에서 사리장엄구의 제작연대를 확인할 수 있지만 해석에 논란이 많습니다. 해석대로라면 현존하는 한반도의 사리장엄구중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가 출토된 것입니다.
한국과 중국의 고대 사리장엄구는 양국 간 밀접한 문화교류의 산물입니다. 왕흥사지 사라장엄구 출토를 계기로 지속적인 학술 연구를 통해 양국의 고고학적 발굴 진행이 더욱 심화될 것을 기대합니다.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백제 왕흥사 특별전’을 4월 20일까지 개최한다. 문화체험실에서는 ‘청동제사리함 명문 탁본과 해석해보기’행사를 실시한다.(041)833-8562~3
가연숙 객원기자 omflower@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