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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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다면 苦도 없다
나 하나 버리면 천만가지가 다 쉬게 된다
“갈까 말까” 박씨는 무척 망설여졌다. 저녁에 고교동창들 모임이 있었다. 문제는 자신의 형편이었다. 박씨는 몇 개월 전 갑자기 회사에서 퇴출되었다. 그 후 취직을 하려고 무던히도 애썼지만 지금까지 잘 안 되고 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하면 뭐라고 할까. 동창들에게 그 얘기를 해야 하나. 남들이 말하는 백수라는 것. 그럼 뭐라고 그럴까. 아무래도 우습게보겠지. 가기가 싫었다. 그러나 사실 동창들에게 직장 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해야 할 처지였다. 갈등하다가 그래, 가고 보자하고 결정했다.
그런데 막상 친구들을 보자 자신이 없어졌다. 그래서 “야, 잘 지냈냐. 요즘 어때?” 하자 “응, 그렇지 뭐” 하고 대답했다. 저녁을 먹으며 오랜만에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느라고 바빴다. 박씨는 회사 얘기가 나오면 대충 얼버무렸다. 도저히 창피해서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당황스런 일이 일어났다. 한 친구가 “오늘은 00가 한 턱 내지” 하고 자신을 지정하는 것 아닌가. 약 7~8명인 이 모임은 전통적으로 한 사람이 저녁식사 값을 계산하곤 하였다. 돌아가며 내는 것이다. 예전 같다면 “그래, 좋아. 오늘은 내가 내지!”하며 호기 있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대신 머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계산하고 있었다. 최소 8만원은 나오겠네. 어이구! 지난 몇 달간 아내한테 용돈을 타 쓰는 처지다. 하루에 만 원 이상 쓸 형편이 아니었다. 8만원이면 일주일도 더 넘는 용돈인데. 아내에게 뭐라고 그러지.

박씨는 이제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구들에게 “나 오늘 밥값 낼 형편이 안 돼”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실직했다고 말했으면 쉬웠을 것이다. 두 시간도 넘게 회사 잘 다니고 있는 것처럼 거짓말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바른 대로 말한다면 자신이 너무 초라할 것 같았다. 후회가 되었다. 그냥 얘기할 걸….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끝까지 속이기로 했다. 그래, 8만원 쓰지 뭐. 이제 친구들 얘기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자 체면에 이게 뭔가 싶었다. 사십 다되는 나이에 강제 퇴출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울고 싶어졌다. ‘내 꼴이 이게 뭔가.’ 거짓말이나 해야 되고, 마음이 한참동안 들끓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이게 무슨 뜻이더라. 그래, 나는 지금 내 생각만 하고 있어. 내 체면만 생각하니까 창피하고 자존심 상하고 이렇게 두려운 거야. 나도 똑같은 사람인데, 지금 우리나라 실업자가 얼마나 많은 데 나도 그 중 하나일 뿐인데. 왜 이렇게 힘들어 해야 하나. 오직 체면 때문이다. 나라고 항상 잘나가라는 법 있나? 나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내가 없다면 체면이 어디 있나. 박씨의 마음은 점차 편안해졌다. 드디어 말할 용기가 났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 난 몇 달 간 실직했고 지금 돈 쓸 처지가 아니라고. 박씨가 마음속으로 ‘부처님, 난 몰라요. 제가 없다면서요’ 하고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0.1초 차이로 친구 00가 먼저 큰소리로 말하는 것 아닌가. “야. 박00. 오늘은 양보해라. 오늘은 내가 낸다!” 귀가 번쩍 띄었다. 그 친구는 내일 좋은 일이 있다면서 아무래도 자기가 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박씨는 반가우면서도 태연한 척 “그래, 그럼 난 다음에 내지 뭐”하고 대답했다. 어, 이게 어찌 된 거지. 상황이 저절로 바뀌어버렸다. 한 시간 동안 고민하고 있었는데, 막상 고백하려는 순간에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그냥 된 것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나라는 체면을 버리기로 하자 오히려 곧바로 해결된 것이었다. 박씨가 안심하며 감사하는 마음이 들 때 다시 그의 마음에 힘차게 울리는 말씀이 있었다. “나 하나를 버린다면 천만가지가 다 잠을 자고 쉬게 된다.” 황수경(동국대 선학과 강사)
2008-02-01 오전 1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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