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두
칼럼니스트
몇 해 전 젊은 여성들뿐만 아니라, 사람들마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살을 빼야 한다”는 ‘다이어트’ 열풍이 몰아칠 때 언론에서는 ‘종교가 되어버린 다이어트’라는 표현까지 써서 그 분위기를 잘 보여준 적이 있다.
요즈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영어 교육을 제대로 하겠다”며 갖가지 방안을 내놓고 있는데, 이를 둘러싼 논란을 살펴보면서 “혹 우리나라에서 최대 신도를 가진 종교는 영어가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새 정부의 정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영어 교육 문제’를 둘러싼 이번 논란에 대해서도 모든 책임을 당선자와 인수위원회의 철학 빈곤, 영어 사대주의 등으로 돌리고 비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이런 분위기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일제 강점에서 해방되어 북위 38도선 이남에 미군이 주둔하여 모든 것을 오로지 하던 시절, 영어 몇 마디만 할 줄 알면 높은 관료도 될 수 있고 일본인이 남기고 떠난 이른바 적산(敵産)을 공짜로 차지하여 큰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전쟁 중에 미군들에게 ‘예(yes)’와 ‘아니오(no)’를 제대로 쓰지 못해 순박하기 짝이 없는 시골 농민이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죽어가기까지 했으니, 그 시절에도 이미 ‘영어’는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쥔 전지전능한 신(神)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이런 ‘영어’의 종교화는 지난 1997년 말 이른바 ‘IMF 경제 위기’를 겪은 이래 더욱 빠른 속도로 강화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때까지 괜찮은 회사라고 알려졌던 대기업과 국내 은행들이 줄줄이 외국인 자본가들에게 팔려나가면서, 그동안 회사 일 열심히 하면서 착실하게 살아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일찌감치 미국 물을 먹고 오거나 해서 영어 구사 능력이 뛰어났던 사람들은 오로지 그 한 가지 재주 때문에, 승승장구 출세의 길을 달려가게 된 것이다.
은행에 다니는 가까운 친구가 나와 이런저런 세상 이야기를 하다가 말미에 “그 놈의 영어 때문에…”라며 자조 섞인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내가 바로 “이 사람아, 그래서 상국에 다녀왔어야지. 옛날에 당나라·명나라에 다녀와야 학자나 학승으로 자리 잡고, 고위 관료나 정치가로 출세할 수 있었듯이 요즈음 세상은 미국 물을 먹고 와야 출세한단 말일세”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스운 말을 해준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게 어디 웃어넘길 일인가.
우리 모두 중ㆍ고등학교에서부터 영어에 쏟아 부은 시간과 에너지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도 왜 우리 국민들은 영어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까? 몇 해 전 몽골 여행 중 만난 중학교 1학년 학생은 학교에서 배운 많지 않은 영어 단어를 써서 자기 의사를 정확하고 자신 있게 전달할 줄 알았다. 아마 몽골에서 영어 교육과 공부에 쏟는 노력이 우리나라에 비하면 훨씬 적을 것이 분명할 터인데 말이다. 이건 분명 우리의 외국어 교육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처럼 온 나라가 영어 때문에 시끄럽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되고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설사 떠듬거리더라도 그 안에서 교양인의 품격을 느끼게 되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도 조심을 하며 예우를 하고 자신의 발언 속도를 늦추어 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지금 인수위원회에서 불어오는 ‘영어 열풍’과 ‘영어의 종교화’는 그런 교양인의 기본 자질과는 관계가 없어 보인다. 다른 외국어도 그렇지만, 영어를 통해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접하고, 세상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상국 사람들의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가겠다’는 천박함에서 출발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이는 스스로에 대한 모멸(侮蔑)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 말과 글,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은 없이 앵무새처럼 영어를 말해서 어쩌자는 것인지 답답하다.
마지막 질문, 왜 온 국민이 모두 영어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혹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누리게 될 특권을 골고루 나누는 평등 세상을 꿈꾸어서인가? 미국의 쉰 몇 번째 주로 편입되기를 기대하는 것인가? ‘영어=미국=기독교’라는 등식을 위해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