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게 살 수 있으려면
스님께서는 늘 내 안의 심봉을 붙들고서 푸르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렇지만 지워진 짐이 많고 가족과 조상의 인연줄이 늘 놓여져 있는데 그 모든 것을 해결하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한 해 동안 푸르게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요?
그래서 우리가 해마다 정초가 되면 촛불재를 합니다. 그렇지만 형식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목탁만 쳤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단, 제각기 마음의 불을 켤 수 있는 그런 정신적인 능력이 필요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연구를 하고 있는 그 자체를 가만히 살펴본다면, 삼천 년 전 부처님께서 미리미리 진리에 관한 건을 다 말씀해 놓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50% 물질계에만 정신이 팔려서 허덕거릴 뿐이지 정신계와 물질계가 합류화해서 돌아간다는 자체를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근본이 몸을 형성시켜서 이끌고 간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정신 차려서 생활을 해 나가지 않는다면 앞으로 어려운 지경이 많이 닥치리라고 봅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말입니다.
해마다 마음의 불을 밝히는 촛불재를 하는 것과 관련하여 여러분이 알아 두어야 할 두세 가지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내가 나를, 참나를 탄생시켜서 상봉하는 겁니다. 현재의 나가 과거에 살던 참나를 발견해서 상봉을 한다면 자유자재권을 얻어서 12대 종손을 건진다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체 만물만생들에게 다 응신으로서 나투면서 어느 것 하나 나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또는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는 그런 모든 진리에 관한 섭류를 터득해서 바로 자유권을 갖는 겁니다.
둘째는 우리가 살다가 죽는다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을 살게 되고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미래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차원에 따라서 과거도 현실이고 미래도 현실이니 영원한 오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시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부모라는 마음이 있고 자식이라는 마음이 있는 것이 바로 전기가 가설돼 있듯이 마음의 가설이 돼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부모나 자식을 위한다면, 내 육신 안에 생명들이 잔뜩 들어서 더불어 같이 살고 있으니 그대로 공했다는 사실을 알고 남의 탓으로 돌리거나 남을 원망하지 말고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려서 나를 밝힐 수 있어야 됩니다.
지금은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생활 자체가 부처님 법이요, 우리들 법이 부처님 법이요, 부처님 법이 우리 법이요, 우리네들 육신이 부처님의 형상이요, 둘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광대무변하고 묘한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양반들을 위해서도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밝히면 둘 아니게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밝혀야만 되는가. 자기가 나온 자리에 자기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 안의 섭류를, 정신계를 도저히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육신이 태어났으면 정신이 다시 태어나야 진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나가서 어떠한 문제를 저지르기도 하고, 지금 현재 상황 속에서 별의별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불을 밝히고 마음공부를 하신다면, 생활을 재료로 삼아서 항상 하실 수 있다면 바로 아래 자손들은 마음이 화해서 바꿔지고, 바꿔지면서 화하게 됩니다. 그 몸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의식들이, 업식으로 남은 의식들이 다 착해지고 밝아지고 보살로 화해서, 말로 하거나 욕하고 때리지 않아도 스스로 밝아짐으로써 일이 풀리고 돌아가신 부모의 영령들도 밝아져서 스스로 천도가 되죠. 자기와 더불어 말입니다.
그래서 중요하다는 거는, 우리가 죽으면 그 영혼이 더하고 덜함도 없어요. 육근으로부터 육식이 다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형체가 없기 때문에, 부딪침이 없기 때문에,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자기가 살아 있는 양 의식들이 착각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집에서 뱅뱅 도는가 하면 길에 사람이 지나가면 자기도 산 사람인 양 생각을 하게 되고, 강에 가도 빠져 죽을까 봐 강을 못 건너가게 되고, 불바퀴를 넘어서려 해도 타 죽을까 봐 넘어설 수가 없는 겁니다. 또 살아가면서 일체 만물을 보고 살았던 것이 있어서, 무시무시한 뱀이나 귀신들이나 무서운 짐승들이나 그런 생물들이 다 살아 있는 양 그려져 있는 그 환상 속을 실제 자기가 몸이 있는 줄 알고 건너가지 못하는 그런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유롭지 못한 겁니다. 물속의 생명들이 물 바깥으로 나오면 죽듯이 우리 인간도 공기주머니를 벗어나면 죽습니다. 그렇게 벗어나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들을 자유로이 못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자유로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공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벗어나야 자유권을 얻고 자유권을 얻어야 세세생생에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겁니다. 내가 비록 육신으로 태어나지 않아도 일체 만물만생이 나 아님이 없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때는 부처가 되고, 생각을 했을 때는 법신이 되고, 움죽거렸을 땐 화신이 돼서 응신으로 화해서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이 다 원해도 거기에 응하셔서 둘 아니게 건져진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님들만 공부하라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머리를 보십시오. 헤아릴 수 없는 머리카락처럼 인생살이가 벌어진 겁니다. 인생은 짧기도 하며 길기도 합니다. ‘우리는 걸망 짊어지고 나왔다’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의식들이 몸속의 세포 하나하나에도 헤아릴 수 없이 있습니다. 세포에 있는 그 의식들이 뭔 줄 아십니까. 여러분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유전성 업보성 영계성 세균성 인과성, 이 다섯 가지가 빈틈없이 의식적으로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만 짊어지고 이 세상에 나와서 한 철 살다가 다시 돌아가는 겁니다. 모두 자기네 집에서 걸망 짊어지고 놀러 나와서 남들하고 더불어 같이 놀다가 해가 지면 다 자기 집으로, 원점으로 돌아오듯이 지금 인생살이가 그렇다 이겁니다. 짧은 기간에 걸망 짊어지고 나와서 그 다섯 가지 요소가, 악업 선업이 다 합해서 차례차례로 차근차근히 나옵니다. 그 나오는 것을 어떻게 대치를 해야 그 모든 것이 무너지겠습니까. 무너지게 하는 길은 단 하나 있습니다. 나왔던 그 자리에 다시 놓는 겁니다.
차례차례로 나오는 그 모든 것을 나오는 자리에다가 ‘한마음 속에서 나온 거니까 한마음 속에서 해결을 해야잖아.’ 하고 되놓는 겁니다. ‘네 속에서 나온 거니까 네 속에서 해결을 해야지.’ 하고 깊은 마음속에다 말입니다. 뿌리이기도 하고, 이름 해서 주인공이라고 하죠. 일체 만물의 나무들도 잎새 하나하나, 가지 하나하나가 전부 뿌리에 달려서 살고 있습니다. 그 뿌리가 끊어지면 그 나무들이 다 죽듯이 인간도 영혼의 뿌리인 자기가 개개인에게 하나씩 다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뿌리를 믿지 않고 항상 남의 형상을 믿고 형상을 찾고, 이름을 믿고 이름을 찾고, 허공을 믿고 허공을 찾고 이런다면 자기의 그 멋있는 뿌리는 언제나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이쪽 나무가 저쪽 나무를 믿고 에너지를 달라고 아무리 애원하고 빌어도 에너지는 이쪽 나무로 오지 않습니다.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에너지가 나무로 올라가서 그 나무는 푸르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 년에 한 번씩이라도 촛불재를 하면서, 마음으로 항상 불을 밝히면서 생활 속에서 닥치는 일체를 재료로 삼고 행주좌와로써 참선을 하실 수 있다면 더불어 다 밝아지게 되니 열심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발견하고 나서의 공부 과정
주인공 하나를 놓치지 않고 들어가다 보니 생시나 꿈에서나 나 아닌 나가 언제나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를 발견하고 나서 어떻게 수련을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예전에 어떤 귀한 선종 스님한테 어느 스님이 “부처는 어느 것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었답니다. 그러니 “바로 네가 부처니라.” 이런 말을 했답니다. 그 말끝에 스님이 하는 말이 “보림을 어떻게 하오리까?” 했답니다. 그러니까 선종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눈병이 나면 허공에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니 그것을 관찰하라.” 하셨답니다. 눈병이 나면 허공에 꽃이 어지럽게 떨어지니 이것을 잘 관찰하라고 예를 들어서 말씀하셨답니다.
공부를 해서 내 마음을 봤다고 했을 때에 그 때가 공부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사람이 오관을 통해서 듣고 보고, 이렇게 육안으로 보는 것 듣는 것 말고 내 이 여기에, 안으로 굴려서 내 눈으로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짜 보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상대방의 대상이 없으면 습이 일어날 수도 없고 생각이 일어날 수도 없는 겁니다, 마주칠 수가 없으니까. 생각이 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깨쳤다 할지라도 보림하기 위해서, 공부하기 위해서 항상 내가 굴려서 상대방을 보는 것입니다. 보고 듣고 사방을 둘러봐도 내가 체험하고 돌아가면서 그 자리에다 다시 놓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좀 보여진다고 하더라도 본단 말을 바깥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만히 보니까 똥을 누고 가더라. 너는 내가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너는 밥을 먹더라. 내 가만히 보고 있으니까 너는 잠을 자고 있더라.” 이런다면 참나가 ‘아니, 나를 가르치기 위해서 뜻으로써 그렇게 보게 했더니 요걸 가지고 자꾸 장난을 해!’ 이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말없이 쓰되, 말없이 굴리되 그 굴린 자리에 다시 놔라 이겁니다. 알면 자기가 알았지 남이 아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알았어도 아는 게 아니다 이 소립니다. 이때가 애들 사춘기처럼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때가!
그래서 그런 걸 보되, 급한 일이 있으면 쓰되 그 썼단 말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또 그걸 보되, 듣되 그것은 역시 도반들끼리나 서로 주고받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 얘기하는 거지, 도반들끼리 앉아서 공부하기 위해서 하는 건 좋습니다. “글쎄 네놈이 말이야, 이거를 봤잖아? 그랬더니 이렇게 이렇게 한다고 하더군. 아, 고놈도 고놈이더군, 그래.” 하면서 재미있게 거량을 할 수가 있죠. 그런데 만약에 “ 이렇게 이렇게 하는 거를 내가 봤더니 이러이러하니까 넌 이렇게 이렇게 해라.” 이러는 거는 바로, 선신이 되라고 했더니 귀신이 되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기껏 백의무씨가 되라고 묻어 뒀더니 아, 이건 종다리씨 그대로 있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무짝에도 못 쓰죠. 심어 봤자야 무우도 밑에 안 앉고 종다리만 올라오니깐 뭐 이파리를 먹을 수가 있나, 씨를 쓸 수가 있나요? 그와 같이 아무짝에도 못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만 본다면, 거기에 멈춘다면, 나라는 아만만 서고 아상만 서고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당당하고 도도하되 내 모든 행으로서는 겸손하고 위를 보면 위 보는 대로 아래를 보면 아래를 보는 대로, 항상 엽렵하게 그렇게 자비한 마음으로서 남한테 할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을 잘 가져야 된다는 얘깁니다. 여러분이 말 한 번 행 한 번 잘못하고 돌아가면 잘못된 게 나에게만 미치는 게 아닙니다. 역대의 조사들한테도 미칠 뿐 아니라, 저 끄트머리로 가서는 석존까지 일컬어져 버린단 말입니다. “저 불자들이 하는 일이 저게 뭐야? 저 행동 좀 봐!” 그런다면, ‘불자’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석존이 따로 계신 게 아닙니다. 그분이자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자 나고 내가 여러분이거든요. 그러니 누구를 막론해 놓고.동시에 욕을 먹는 겁니다, 동시에!
뜻은 똑같지만 선지식들이 달리 말을 자꾸 하는 까닭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 뜻을 어떻게 처리하나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랬을 테고, 또 공부하는 사람들이 익었나 안 익었나 그걸 보기 위해서도 그랬고,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놔서 참말 보림을 잘했으면 거기서 싹이 틔어 나올 테니까 그걸 보림을 하게 만드느라고 그랬을 겁니다. 나를 보았다 하더라도 또 잘 터득하면서 체험하면서 안으로 굴려서 보림을 하면서 그렇게 계속적으로 해 나가야 하리라고 봅니다.
이사를 가야 하는데…
따뜻해지면 조금 넓은 평수로 집을 옮겨 볼까 생각 중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사를 가더라도 날짜를 봐야 하고 방향을 봐야 한다는 분들이 계셔서 그것이 얼마나 근거가 있는 말인지 궁금해서 질문을 올립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이사를 가는데 북쪽으로 삼살방이 들어서 계약은 해 놓고 못 갔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처음 공부하는 분들이 그러겠지마는 삼살방으로 가면 집안이 잘 안되니까 죽는다고 누가 그랬답니다. 또 삼살방이 들기 이전에 이사를 가면 가환이 떠나질 않는다. 너는 내년에 꼭 죽을 사주팔자고 삼재가 들었으니까 잘못될 거다. 그러니까 조심해라. 이런 말을 듣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약했으면 자기가 인간이 되기 위해서 그토록 애를 쓰고 고귀한 자기의 생명을 그렇게 형성시켜 가지고 이렇게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어줍지 않은 말에 흔들리고 거기에 따라서 자기가 자기로 살지 못하고선 남의 말에 그냥 휘휘휘휘 돌아가느냐 이겁니다. 그건 그런 사람들의 노예이지 자신이 사는 참사람이 못 된다 이겁니다.
죽는다 산다, 생사에도 끄달리지 마세요.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왜냐? 이건 들은 얘기입니다마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천도 좀 시켜 주시오.” 하니까 “허, 본래 살아온 게 없다면 죽을 것도 없을 것을….” 하고선 그냥 갔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러니 천도해 달라고 한 사람이 얼마나 무색하겠습니까만 그거는 그 즉시에 요리가 된 것이고 그 즉시에 천도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이는 물질 본위만 알지 보이지 않는 50%의 그 영향력은 모르고 사시기 때문에 자유권을 얻지 못하시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가랑잎과 같은 몸뚱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을에 낙엽이 진다고 해서 죽는다고 애석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린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이죠.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항상 불이 들어와서 밝아 있다면 불이 꺼졌다 켜졌다 이런 언어도 붙지 않고 항상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죽는다 산다도 없습니다. 나무 이파리로 친다면 나무 이파리가 낙엽이 져서 떨어졌다고 해서 나무가 죽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무가 흙에 가려서 자기 뿌리를 못 보듯이 사람도 천차만별의 속임수에 빠져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뿌리인 참자기를 못 보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을 냈다 하면 법신(法身)이요,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화신(化身)인데 모든 부처가, 일체제불과 중생이 다 여러분 한마음 속에 들었거늘 여러분은 만날 그저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부처님 한 분만이 아니라 또 수많은 부처님한테다가 갖다 놓고 빌어야만 자식과 남편과 부모가 잘되는 줄 아는 그러한 소치는 여러분이 정말 그 법을 모르고 죄를 덮어쓰는 일입니다. 그런 건 덮어씌워 주지도 말아야 하고 덮어쓰지도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행여라도 ‘누가 이리로 가면 나쁘니 이사를 가지 마라. 부적을 가져라. 또 무슨 고사를 지내라. 크게 차려놓고 제사 지내라.’ 이러는 것에 속지 마세요. 여러분이 그런 데 속는다면 여러분은 한시도 벗어날 길이 없을 겁니다. 내가 가고 싶으면 갈 것이요, 하고 싶으면 하는 겁니다. 이사 가는 날도 내가 이날 갔으면 좋겠다 했으면 그게 법입니다. 부처님의 법이에요. 내가 집을 짓고 싶다 할 때에 거기 지으면 그냥 부처님의 법이니 내가 어디 걸렸다 안 걸렸다 이런 것을 논의하지 마세요. 왜냐고요? 고귀한 보배 속에서 바로 자기 마음이 나오는데 찰나찰나 생각 나오는 그 자체가 바로 법음이기 때문입니다.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으려면
지구에 공룡의 시대도 있었고 그 후에 지금의 과학문명보다 훨씬 더 발전된 것으로 알려진 뮤우 문명과 아틀란티스 문명의 시대가 있었지만 탐욕 때문에 핵전쟁으로 한순간에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시대도 정신문명은 저버리고 물질로만 치닫는다면 이전의 문명들이 그러했듯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많이들 합니다. 스님, 어떻게 마음을 내고 살아가야 지금의 문명이 무너지지 않고 더욱 더 발전할 수 있을는지요?
부처님 말씀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예전의 모든 역사, 문화를 본다 해도 모두 사람들이 만들어서 문화가 발전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되지 못하고 지금은 폐허가 되거나 흔적만 남아 있는 그런 나라도 있습니다. 그런 걸 볼 때 어떠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문화나 역사가 그렇게 풍부하게, 졸렬하지 않게 잘 발전이 됐을까. 그런데 왜 지금은 그렇게 폐허가 되고 흔적만 남아 있을까. 그건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다 이겁니다.
그때에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사람들이 잘살자고 이렇게 하긴 했어도, 예를 들어서 일체 만법을 자기의 마음으로 낱낱이 돌려야 할 텐데 마음으로 돌리지 않고 색으로 돌렸다 이겁니다, 바깥으로. 그리고 타의로 돌려서 욕심, 원망, 증오, 싸움으로만 가니까 ‘전체 일체 만법을 내 마음으로 돌리고, 남을 원망 안 하고 내 마음으로 돌린다면 내가 다시 여기 오리라.’ 이런 말을 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만약에 마음으로 돌린다면 석가가 따로 있고 어디 예수가 따로 있겠습니까. 그 문화를 발전시킨 그분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분들이 다 대인입니다.
요즘 사람들에겐 내가 시쳇말로 이렇게 합니다, 못 알아들을 테니까. 천체망원경도 있고 무전통신기도 있고 탐지기도 있고 컴퓨터도 있고 책정기도 있고 영사기도 있다고요. 다 있는데 대뇌로 한번 한생각이 돌아가면 다 통과가 되게끔 돼 있어서 자동용이다 이겁니다. 자동력으로써 우리는 지금 자동기를 쓰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교가 어떠니 기독교가 어떠니 가톨릭교가 어떠니, 이것이 내 것이고 저것이 네 것이고, 분별하고 싸우다 보니까 요만한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전부 싸워야 돼. 뭣이 네가 잘나고 내가 잘났습니까? 이 세상 일체가 다 생명 없는 게 없는데. 안 그렇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생물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한마음 아닌 게 하나도 없이 일심(一心)으로 돌아가고 바로 공체(共體)로 돌아가고 공식(共食)하고 있고 공용(共用)을 하고 있거늘 어찌 독불장군이 있다고 그렇게들 야단들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돼서’라고 하는 것은, 내 참나를 발견하지 않는다면 한마음으로 돌아가는지 거꾸로 돌아가는지 그걸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 수 있으며, 남을 모르는데 어떻게 우주의 섭리를 알 수 있으며 바로 대천세계(大千世界)의 근본을 알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우주세계의 근본을 모르는 것은 내 근본을 모르는 거와 같기 때문에 우주세계의 근본을 모른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우주세계의 근본을 모르고, 우리가 한마음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저 행성이나 위성 또는 정보원처럼 일하는 별성의 살림이 우리네 살림살이와 똑같은 걸 모릅니다. 다른 게 하나도 없어요. 국방도 정치도 다 있는 겁니다. 없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우리가 한마음 한뜻이 돼서 조화를 이룬다면 우주 개발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또 우주 개발이라는 것은 세계적으로 다른 데다가 우리의 좋은 씨를 공급을 해서 다른 집에도 그 씨가 생산이 되게끔 하는 것이 개발이요, 또는 생산이 돼서 잘된다면 바로 우리의 동네집이 된다 이 소리입니다. 혹성 하나하나, 별성 하나하나가 나 아님이 없으니 내 동네 아님이 없고 내 행동 아님이 없고, 내 모습 아닌 게 없어요. 여러분한테 내가 항상 이런 말을 하죠. 내 마음의 불씨 하나가 온 누리의 전체를 태워 버릴 수도 있다고요. 온 누리의 전체를 태워 버릴 수 있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 갖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자석력이나 전자력, 자동력, 통신력 이 모두가 바로 원소의 근본으로 하여금 전체가 돌아가고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사람은 변질되고 죽는다, 이건 허망하다 이러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변질되고 허망한 게 아니라 항상 지속된다고 봅니다. 여러분이 애당초에 죽는다고 하는데 죽는 게 어딨습니까. 이 세상에 난 것도 없는데 죽는 게 어딨습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찰나에 나서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찰나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죽는 게 아니라 눈 깜짝할 사이에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굼벵이가 지붕에서 먹은 생각이 있어서 떨어진다는 얘깁니다. ‘어, 굼벵이가 지붕에서 떨어지네.’ 이러는 찰나에, 굼벵이는 바로 매미로 옮겨갑니다. 요거를 하나 예를 들어봐도 옮겨가는 거지 죽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본래 지수화풍 근본에서, 흙과 물과 이러한 데서 미생물이 생겨서 그 생물로 인해서 모두가 이렇게 진화돼서 살고 있듯이, 우리는 그렇게 나와서 위로는 바람과 태양이 우리를 감싸 주고 자라게 해 주듯, 어머니가 애를 낳아 놓으면 아버지가 벌어서 다 키우듯이 돼 있다 이겁니다. 그렇게 해서 온 것이기 때문에 본래의 지수화풍이 죽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 본래 살아나온 것도 아니고요.
본래 있기 때문에 본래 나온 거고, 본래 나왔기 때문에 본래 그 자리에 있는데, 지속되고 있으면서 자꾸 옮겨가고 모습을 바꿔 놓을 뿐이지 뭐가 죽고 산다는 얘깁니까? 옮겨 놓고 바꿔지는 그 사이에, 찰나찰나 옮겨가는 고정됨이 없는 생활 속에 어찌 거기 인과응보가 붙으며 유전이 붙으며 또는 업보가 붙으며 생사윤회가 붙겠습니까.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일렁거리면서 우리는 지금 리듬을 타고 가는 겁니다. 옮겨 놓고 지금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그걸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우주의 개발이나, 세계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꽃이 피게 만들어 놓을 수도 있고 또는 역사나 문화나 모든 게 달라지리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