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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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을 좀먹는 오욕 반드시 끊어야
此五欲法 與畜生同有 一切衆生 常爲五欲所使 名欲奴僕 坐此弊欲 沈墮三途 我今修禪 復爲障蔽 此爲大賊 急當遠之
다섯 가지 욕구에 대한 법은 인간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세상 밖의 전혀 다른 영역인 귀신ㆍ축생ㆍ하늘나라 신선세계에도 인간세상과 마찬가지로 욕구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들은 오욕을 마주하는 오근(五根)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관찰해보면 삼계육도 일체중생은 항상 오욕의 지배를 받는다. 이에 따라 욕계 중생들은 욕계탐애[欲愛]를 추종하는 종이라고 하겠는데, 욕계중생들은 욕애 가운데 빠져있기 때문에 오욕에 가리워 각자 지은 업의 정도에 따라서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지게 된다.
삼악도에는 화도(火途) 혈도(血途) 도도(刀途)가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중생들은 불길이 아래, 위로 덮치면서 영겁토록 불속에서 타는 고통을 받는데, 이를 ‘화도’라고 부른다.
다음으로는 축생의 세계에서는 크고 작은 짐승들이 서로 잡아먹고 피차가 피를 마시는 괴로움을 간단없이 감내해야만 하는데, 이를 ‘혈도’라고 한다.
다음으로 아귀도 가운데서 가장 힘이 센 귀신 왕으로부터 갖가지 칼과 지팡이로 때리고 팽개치는 참지 못할 고통을 끝없이 당하는데, 이를 ‘도도’라고 한다.
우리가 이미 선정을 닦은 후 다시 오욕에 침몰하여 그 장애를 당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본래 밝은 본성을 좀먹는 큰 도적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오욕을 화급하게 멀리해야만 한다.

如禪經偈中說
生死不斷絶 貪欲嗜味故 養寃人丘塚 虛受諸辛苦 身臭如死屍 九孔流不淨 如厠蟲樂糞 愚人身無異 智者應觀身 不貧染世樂 無累無所欲 是名眞涅槃 如諸佛所說 一心一意行 數息在禪定 是名行頭陀
범부중생은 무량겁 이래로 변함없이 삼계육도에서 윤회를 반복한다. 육도에서 중생들의 생사가 단절되지 않는 이유는 오욕을 탐애하고 그 맛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오욕이 비록 오진경계라고는 하나 그것은 각각의 차별적인 종류와 그에 따른 차별적인 맛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범부중생이 그 맛을 본 뒤에는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가 힘들다.
세간 사람들이 오욕에 집착하는 모습을 관찰해 보도록 하자.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주변환경 가운데서 어떤 것이 탐애할만할 색욕이 아니고, 어떤 것이 들을 만한 소리가 아니며, 또한 냄새를 맡고 맛에 집착하는 오욕의 경지가 아닌 것이 있겠는가.
중생들은 오욕의 맛에 탐애를 하기 때문에 생사가 단절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원한을 길러 그와 함께 무덤 속으로 들어가듯이 어리석고 부질없이 모든 괴로움을 허망하게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는 한갓 수고스럽게 본래 없는 괴로움을 스스로 조작하여 파도가 끝없이 움직이듯이 그칠 줄 모르는 것과 같다.
몸에서 나는 냄새는 죽은 시체와 같이 악취가 나고, 몸의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물질이 흘러나온다. 예를 들면 눈에서는 눈곱이 끼고, 귀에서는 귀지가 나오고, 코에서는 콧물이 흐르고, 소변과 대변에서는 냄새나는 물질이 나온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이같이 청정하지 못한 허망한 육신 때문에 끝없이 오욕을 탐애한다.
이는 마치 화장실에 벌레가 오물 가운데서 그 더러움을 모른 채 청정한 경지로 착각하고 쾌락으로 즐기는 것과도 같다. 중생들이 오욕에 탐착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 이유는 살피고도 타파하지 못하고, 안다고 해도 그 허물을 투철하게 꿰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리석은 사람의 몸은 비록 외형은 다르다 할지라도 청정하지 못한 오욕에 집착하는 점에 있어선 실제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은 외면적으로는 청정한 몸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러운 물질로 가득 차 그 냄새를 이루 다 감당할 수가 없다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이를 비유하자면 하나의 아름다운 꽃병에 더러운 것을 담았다가 하루아침에 그 병이 깨지면 모든 더러운 물질이 밖으로 흘러나와 그에 대한 혐오감을 참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몸과 마음을 탐욕으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훌륭하게 관찰한다.
세간의 즐거움에 있어서 거기에 허물이 없고 욕구가 없다면 걸림도 없게 된다. 이는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걸림이 없는 경지인데, 걸림이 없으면 생사에 대한 공포도 없고, 공포도 없다면 꿈처럼 뒤바뀐 망상도 멀리할 수 있다. 이것이 지혜로운 자의 오욕에 대한 관찰이다.
이를 진실한 열반이라고 하고, 또는 청정실상이라고도 하고, 또는 불생불멸이라고도 말한다. 그 경지는 다름 아닌 우리의 자성청정심이 여기에 해당된다.
우리의 마음에 종일토록 망상이 어지럽게 일어나기 때문에 생멸도 쉬지 않는다. 이것은 고요 적정한 열반을 전환하여 망상으로 요동하고 생멸하지 않는 자성청정심이 생멸을 일으키는 경우에 해당된다. 여기에 이르러선 우리가 본래 지녔던 청정한 열반을 실제로 등지지 않는 상태에서 등지게 된다.
따라서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이 설했던 탐욕의 상념에서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며, 번뇌를 전환하여 올바른 법칙으로 들어가야만 한다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오욕을 멀리 버리고 육근을 하나로 거두는 일은 즉 육식의 어지러운 망상을 일념으로 회귀하는 데는 별다른 길이 없다. 단지 일념으로 수행하여 안으로는 육근을 거둬들이고 밖으로는 육진을 반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심으로서 전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본래 고요한 자성인 청정한 선정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와 같은 수행을 번뇌를 털어내는 두타행이라고 한다.
요컨대 수행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오욕경계로 어지럽게 흩어진 마음을 하나의 무념으로 거둬들이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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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1 오전 10:5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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