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경덕왕(?~765) 때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 지방의 남자 신도 수십 명이 정성껏 극락왕생을 발원하여 고을의 경계에 미타사를 세우고 만일(萬日)을 기약하여 계(契:결사)를 만들었다. 이때 아간(阿干) 귀진(貴珍)의 집에 계집종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을 욱면(郁面)이라 했다. 그녀는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마당에 선 채 스님들을 따라 염불했다.
주인 귀진은 그녀가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는 것을 보고 미워해서 매일 곡식 두 섬을 주어 하룻밤 동안에 다 찧으라 했다. 욱면은 초저녁에 이를 다 찧어 놓고 절에 가서 염불했는데 밤낮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워두고 손바닥을 뚫어 노끈에 꿴 뒤 말뚝에 메고는 합장하며 좌우로 흔들면서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 때 하늘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절의 스님들이 이 말을 듣고 그녀에게 불당에 들어가 정진하도록 했다. 얼마 안 되어 하늘의 음악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욱면은 몸을 솟구쳐 집 대들보를 뚫고 올라가 서쪽 교외(郊外)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해골을 버리고 부처님 몸으로 변하여 연화대(蓮化臺)에 앉아 큰 광명을 발하면서 서서히 가버렸는데, 음악소리는 한참 동안 하늘에서 그치지 않았다.
<삼국유사> ‘감통편(感通篇)’에 나오는 일화이다. <삼국유사>에는 고귀한 여왕으로부터 비구니, 노비까지 한 사회의 모든 여성 구성원들이 고루 등장한다. 게다가 이들은 깨달은 여성은 물론이요, 관세음보살의 응신(應身)으로서 속진에 물든 남성들의 마음을 정화하여 본래의 불성을 일깨워주는 주인공들로 등장한다. 위에서 욱면 낭자가 사람의 몸 그대로 즉신성불(卽身成佛)한 장면은 가장 드라마틱한 여성 성불의 예를 보여준다.
일연 스님은 이 일화를 소개한 뒤 <승전(僧傳)>을 근거로 욱면의 전생담을 소개하고 있다. 즉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팔진(八珍)의 무리 가운데 계(戒)를 얻지 못한 사람이 축생도에 떨어져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가, 불경을 지고 간 공덕으로 인해 사람으로 태어나 욱면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쉬지 않고 염불을 거듭해서 9년 만에 집의 들보를 뚫고 떠나는 영험을 보였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강원도 건봉사에서 발진화상 등 31명의 스님이 염불정진을 통해서 ‘육신 그대로 하늘에 오른(肉身騰空)’ 예가 있을 정도로 염불은 가장 각광받는 수행이었다. 원효, 의상 대사 등 많은 고승 대덕들이 정토수행의 실천자였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아직도 일부 수행자 가운데는 염불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불법(佛法)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이가 있는데, 이는 헛된 분별심이자 부처님의 방편 교설을 비방하는 큰 죄업이 아닐 수 없다.
염불의 역사는 부처님 재세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함경>에는 3념, 5념, 6념, 10념(十念) 등의 염법이 있다. 즉, 염불(念佛), 염법(念法), 염승(念僧), 염계, 염시(念施), 염천, 염휴식, 염안반, 염신, 염사(念死) 등의 수행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을 생각하고 그 명호를 부르며(여래 10호), 나무불을 표현하는 것에서부터 불법과 승단을 생각하는 삼염법 등으로 설해져 있다.
염불은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결합된 수승한 수행법임을 알아야 한다. 철오 선사는 “염불할 때는 다른 생각[別想]을 해서는 안 된다. 다른 생각이 없으면, 이것이 바로 정지[止:停止, 사마타]이다. 염불할 때는 모름지기 또렷또렷 분명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관조[觀:觀達, 위빠사나]이다”라고 하였다. 염불하는 한 생각[一念] 가운데 지관(止觀)이 함께 갖춰지는 것이지, 따로 지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지(止)는 선정(定)의 원인이며, 선정(定)은 지(止)의 결과이다. 또한 관(觀)은 지혜(慧)의 원인이며, 지혜(慧)는 관(觀)의 결과이다. 철오 선사는 “한 생각 일지 않으면서 또렷또렷 분명함이 바로 고요하면서 비춤[卽寂而照]이고, 또렷또렷 분명하면서 한 생각도 일지 않음이 바로 비추면서 고요함[卽寂而照]이다” 라며, 염불의 수행원리를 분명히 밝힌 바 있다. 불법문중에는 한 법도 버릴 게 없음(佛事門中 不捨一法)을 명심하자. 김성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