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희 현대불교신문 前 편집국장
“친구야! 새해에 건강하고 행복하길 기도할게.”
2008년 1월 1일 오전 12시 23분.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 묵은해를 흘려보내고 2008년 새해를 맞이하는 환호가 TV화면에 가득한 시간이었다. 핸드폰이 문자메시지 들어왔다고 신호를 보냈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선한 그 시간에 내 오래된 친구 화숙이가 나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덕담을 보냈다. 가슴이 설레고 벅찼다.
환갑이 넘어 문자 보내는 법을 배웠다더니 그는 그 시간에 자지 않고 사랑하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새해맞이를 하고 있었나 보다. 그 이웃 속에 내가 들어있다는 것도 기쁨이었다.
가톨릭 신자인 그가 성모마리아님께 나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충만감이 내 몸에 감돌았다.
1월 1일 오후 나는 화숙에게 전화를 걸었다. 새해맞이 문자메시지를 받고 감동했다며, 어떻게 새해가 열리자마자 문자 보낼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자정미사에 다녀와서 보냈다는 것이다.
내 예감이 맞았다. 예배를 올리며 발원하고 그 마음이 식기 전에 문자메시지에 담아 내게 보낸 것이다. 어찌 내 마음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는 의례적인 새해인사가 아니라 마치 선물을 고르고 포장하듯 정성을 다해 내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보내준 것이다. 40여년 가꾸어 온 우리의 우정은 그렇게 또 다져졌다.
“새해에도 왕성한 활동 기대합니다. 모친께서도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70세가 넘으신 은사님께서 보내주신 문자메시지다. 새해 첫날 나의 가슴은 또다시 벅차올랐다.
“선생님, 어떻게 저까지 챙기셨어요?” 전화를 드렸더니 “뭐 남는 게 시간인데….” 아주 편하게 답하셨다.
여학교 물리선생님으로 시작하셔서 대학의 물리학교수로 정년을 마치신 나의 은사님은 후배교수들을 위해 퇴임 후 강의를 사양하신 그런 분이시다.
지난해 1월, 내가 쓴 책을 보내드렸더니 ‘생각하며 읽느라 인사가 늦었다’며 전화를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편찮으신 어머니를 돌보며 짬을 내서 책을 펴내고 방송 진행을 하고 있는 나를 대견스럽게 여기셨나보다. 그러기에 올해도 그렇게 활동하길 바라시면서 어머니 건강을 기원하는 덕담을 주신 것이다.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나는 은사님과 내 친구의 새 아침 덕담을 떠올리면 가슴이 뿌듯해진다. 그리고 그 기원 덕분에 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어머니 건강도 좋아지시고 나도 건강할 것만 같다.
‘웃는 새해’. 마치 사자성어 화두처럼 짧은 새해 덕담도 받았다. ‘웃는 새해’가 되길 축원해 주는 이 덕담은 축원에 머물지 않는다. 2008년이 웃는 해가 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내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이 덕담을 보내신 분은 아마 자기를 비롯하여 이웃이 함께 그렇게 살아보자며 신년 화두로 삼아 여러 친구 또는 후배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을 것 같다. 나는 그런 분이 선지식이라고 생각한다.
웃는 해는 그냥 되지 않는다. 웃을 수 있도록 정진하고 여러 방면에서 공덕을 쌓으며 지혜롭게 살아야한다. 한 마디로 잘 살아야만 웃을 수 있다. 잘 살려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된다.
나는 수시로 나를 살필 것이다. ‘웃는 새해’를 살고 있는지. 그리고 찡그리거나 화를 낼 일이 생기면 얼른 ‘웃는 새해’를 떠올리겠다.
비슷한 덕담이 또 하나 있다. ‘연시호년 일시호일(年是好年 日是好日)’ 연하카드에 담아 보낸 이 덕담도 내 마음에 새겨졌다.
새 아침에 받은 짧은 덕담이 이렇게 긴 여운을 준다는 것을 나는 올해 아주 깊이 느꼈다.
이제 며칠 후면 무자년 설날이다.
많은 사람들은 ‘복 많이 받으십시오’ ‘건강하십시오’ 등의 덕담을 나눌 것이다. 그 덕담에는 상대방을 생각하는 진정(眞情)이 담겨야 한다. 진정이 담긴 덕담은 생기(生氣)를 발한다. 생기 머금은 덕담은 사랑과 자비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다. 그러한 덕담의 메아리가 가시지 않고 울려 퍼지면 우리들 가슴에서 희망의 등불은 점점 더 밝아질 것이다.
나에게 문자로, 전화로, 연하카드로, 아니면 얼굴을 보고 덕담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더불어 그 덕담의 향기가 공덕으로 피어나도록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