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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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속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목표를 둬야!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학교에서는 지수화풍으로부터 끝없는 진화와 발전을 통해서 지금의 인류가 생겼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에서는 지수화풍을 하느님이 만드셨고 인간마저도 하루아침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저의 반 아이들 대부분이 교회에 다닙니다. 이러한 부분을 어떻게 설명을 해 줘야 아이들이 수긍을 할 수 있고 부처님 가르침에도 어긋나지 않을는지요?
처음에 제가 생각하기에 말입니다, 생각해서 아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만 이 지(地) 수(水) 화(化) 풍(風)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수화풍의 성질과 자기 무전자의 그 독특한 맛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만 살아 있다 뿐이지 모든 게 지수화풍이 움죽거리지 않고 침체돼 있는 상태에선 아마 암흑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수화풍이 제각기 살아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너는 너고 나는 나지만 서로 공존해서 우리 어떠한 걸 세우자고 예를 들어서 했다면, 그렇게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지니까 지수화풍은 없어지고 말입니다, ‘공기’로서의 능력이 발생하게 됐던 거죠.
‘공기’라는 그 뜻은 뭐냐 하면 천체를 말하고 능력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개별적인 하나 같으면 그냥 능력이라고 해 뒀으면 좋겠는데 왜 ‘공기’라고 했을까 이겁니다. 모든 뭇 생명들을 소생케 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에 ‘공기’라고 했던 거죠. 그 후에 이름을 지어서 붙였겠죠. 그러면 그것은 어떠한 이름도 없이 그것으로써 무전자의 집단체를 이루었던 거죠. 무전자라 하면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서 ‘공기’로서 전체 아니 닿는 데 없이 닿게 되는 향기와 같은, 에너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걸로 인하여 유전자가 발생된 겁니다.
유전자는 어떠한 역할을 하느냐? 무전자에서 유전자가 발생될 때는 수많은 그 생명들이 유체로서 보이지 않는 그 유전자의 발생이 온 우주에 확산됐다고 봅니다. 그러면 그 유전자로부터 어떠한 것이 형성되었느냐? 유전자로부터 형성된 것이 별성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별성이 다르고 우리 몸뚱이가 다르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별성이요, 그 또한 별성입니다. 그러면 물질적인 차원에서 반짝거리면서 움죽거리는 것을 우리는 무전자에서 유전자가 발생됐다고 말할 수 있죠. 유전자가 모든 생명체들을 소생시켰다는 얘기죠.
그러면 유전자의 생명에 의해서 그 체가 발생이 됐다면 수많은 별성들의 체가 발생이 됐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데에도 무슨 청와대가 있으면 국방부도 있고 그렇듯이, 그렇게 별성들이 발생되고 보니까 거기에서는 무전자의 능력으로써 유전자의 묘법으로써 가지각색의 물질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그 묘법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도 없이 생기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죠. 즉 말하자면 우리의 선의 혼백이든지 악의 혼백이든지, 혼백을 만약에 유전자라고 한다면 차원에 따라서 그 유전자는 달라지는 것인데 만약에 내가 차원이 낮으면 낮은 유전자가 될 것이고 질이 높으면 높은 대로 유전자의 차원은 높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찰나찰나 고정됨이 없이 나투면서 화(化)하면서 그 물질이 발생되는 것입니다. 각체 각급의 그 모습은 다를지언정 어떠한 모습으로서 그렇게 발생되는 그 유체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왔느냐? 별성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거든요. 별은 반드시 북에서부터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해서 이렇게 갔습니다. 그러면 우리 머리와 두 팔과 두 다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일곱 개의 북두칠성이라고 하죠. 그것은 우리가 말하자면 정부의 정치인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정치인들로 하여금 모든 이 생명의 즉, 물질로서의 물체들을 생산해 냈던 거죠. 그런데 생산을 해내려 해서 해내는 게 아니라, 자기의 마음이 이렇게 생각을 한 거면 이렇게 모습이 나오고 저렇게 생각한 거면 저렇게 모습이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깐 묘하다는 거고 그것이 광대무변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나오고 보니까 거기에서 또 갈라진 것은 물의 생명도, 흙의 생명도 독특하게 자기의 근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얘깁니다. 바람도 그런가 하면 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불의 원리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느냐? 지수풍이 한데 합쳐져서 비벼졌기 때문에 거기서 불이 일어난 거죠. 즉 말하자면 우리가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질척질척한 거와 같이 갖다 넣었더니 거기서 벌레가 생기고 가스가 생기듯이 말입니다. 그 뜨거운 거기에서 아늑함이 생기기 때문에 바로 생명체가 일어나는 거죠. 그와 같이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지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광대무변하게 생명과 더불어 물질이 생기진 않았을 겁니다.
어쨌든 지금 그걸로부터 여러 가지로 독특하게 물에서 사는 거는 물의 성질을 따르게 됐고 흙에서 사는 거는 흙의 성질을 따르게 됐고, 또 화(化)해서 사는 생명은 화생으로서의 독특한 가짐가짐을 가지게 됐다 이겁니다. 그러면 공중의 생명들, 그 유전자가 암흑 속의 반딧불처럼 반짝거리면서 집단을 이룬 것도 역시 바람의 성질을 아주 독특하게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렇게 광대무변하고 독특한 맛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이 어디로부터 났느냐 하는 것도 규정돼 있지 않습니다. 원숭이로부터 됐다는 사람, 곰으로부터 됐다는 사람, 공룡으로부터 됐다는 사람, 별의별 사람이 다 많습니다마는 그것은 어디에 한군데로 규정될 수가 없는 것이 자기의 그 유전자의 진화력에 의해서 자꾸 구르면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말하자면 진화력에 의해서 나온 것이지만 독특한 물의 생명의 그 근원을 가지고 있고 흙의 근원을 가지고 있고 바람의 근원을 가지고 있고 그 화함의 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독특한 자기의 본성은 그대로 집착돼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깁니다. 비유해서 우리가 김가면 김가다라는 집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김가를 벗어나지 못하듯이, 그렇게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부터 각종 각체들이 벌어지는 거죠?
그런데 각종 각체들이 벌어지면서, 물에서 진화돼서 나온 것도 인간으로 됐고 흙에서도 인간이 됐고, 화해서 난 것이 전부 억겁을 거쳐 오면서 진화해서 동물로 인간으로, 즉 말하자면 고등 동물까지 진화해서 올라왔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대로 이렇게 많은 진화의 모습을 각각 가졌으니 마음도 각각이요, 몸도 모습도 각각인 것이죠. 어떻게 이렇게 많은 모습이 나와 있을까? 우리가 스스로 연쇄적으로 진화해서 올라오는 그 자체를 현재에 볼 수 있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과거에 내가 그렇게 올라온 것이, 바로 지금도 그렇게 올라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구리가 개구리대로 그냥 있는 것은 아닙니다. 뱀이 뱀대로 그냥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도 고정됨이 없다는 얘기죠. 인간도 인간대로 고정됨이 없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이 그렇게 고정된 게 하나도 없는 마음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도 듣는 것도 보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찰나찰나 고정됨이 없이 이렇게 돌아가면서 자기가 생각해서 진화하는 그 잠재의식에 의해서만이 자기 물질을, 자기 형상을 그대로 자아낼 수 있다는 그런 각자의 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가 이러한 모든 것을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키워가시는 것이 바람직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받고 싶은데…
이런 질문을 드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는 큰 고민이기에 송구함을 무릅쓰고 질문을 올립니다. 스님, 저의 남편은 제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을 해 주는데도 당연한 것으로만 알고 따뜻한 말 한마디 없이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저의 사랑이 부족해서인지요, 아니면 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인지요?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
우리가 돈을 내지 않고 사지 않고 이렇게 생명을 유지하니까 아주 값싸게 생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써 공생·공용·공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이렇게 그 생명을 유지하고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절실히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공심으로서 공용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공체로서 이렇게 일체 만물이 생기고 만생이 이렇게 같이 융합해서 조화를 이루고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는 나, 내가, 내가 줬고, 내가 망했고, 또는 내가 가졌고, 이렇게 생각하니까 항상 그 껍질을 벗어날 수가 없고, 그 습을 벗어날 수가 없고, 그 욕심은 뗄 수가 없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자기의 것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사시는 데 모든 게 자기는 관리인밖에 안 되는데, 자기 겁니까? 돌고 도는 것인데! 돈도 자기 것만이 아닙니다. 돌고 도는 거기 때문에 내 것도 아니고 네 것도 아니고 관리인밖에는 안 돼요. 그런데 자기 거라고 하거든요. 자기 거라고 자꾸 독재를 쓰니까 돈은 생각을 할 때 ‘흥! 네 거라고? 좋아하네.’ 그러고선 가 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돈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관리를 잘해 주면 ‘아! 여기 가면 관리를 잘해 줘. 그러니까 내가 가야지.’ 하고서 스스로 돈이 들어오는 거지 돈도 달아난 거를 쫓아가고 내 거라고 쫓아간다면 한없이 달아나갑니다.
가난도 붙을 데가 없어서 주인공에다 맡겨서 다 일임해 버린다면 ‘어어, 내가 이거 정말 원수를 갚으려고, 저 속을 썩이려고 이렇게 나왔더니 저, 저기 씻은 듯 부신 듯 하니까 에이, 이거 뭐 안되겠어!’ 그러고서는 달리 생각을 하고, 그 착한 마음과 더불어 자기도 그 뜻을 알고서 착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마음 한뜻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망상을 끊으라는 게 아니라 녹이라는 겁니다. 놔서 녹이라는 거지 끊을 게 어디 있습니까? 망상이 없다면 부처를 이룰 수가 없으니 망상을 끊는 게 아니라 녹이는 것이고 한마음으로 돌리라는 것입니다. 한마음으로 굴리고 돌리고 놓고 이렇게 하다 보면…. 내 마음이 ‘저놈, 조거, 너!’ 이렇게 부부지간에 살면서도 ‘너, 두고 보자. 들어오기만 해 봐라.’ 하고 있어 보십시오. 들어오면 엉뚱하게,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게 아니라 엉뚱하게 “야! 뭐!” 그러고 꽥꽥 악을 쓰고 외려 한술 더 뜹니다. 그러니깐 더 싸울 수밖에 없는 거죠. 화목이 찾아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로 본다면, 자기와 같이만 본다면 자비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의리도 나오고 도의도 나오고, 거기에서는 무궁무진하게 자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자비가 그게 향기와 같이 거기까지 바로 풍겨서 에너지와 같이 거기에 바로 여러분이 공생을 하고 있으니까 공심으로 공용을 하고 있고 공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가고 옴이 없이 그 마음의 향기 에너지는 거기까지도 다 밝아지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아, 외려 들어오기도 전에 바깥에서는 ‘아, 이거 미안한데!’ 하고서 들어오게 되죠. 그러면서 “여보! 나 참 미안했어!” 하고서 이런 말 한마디를 들을 때 그냥 겨울에 고드름이 그냥 녹아서 떨어지듯이 그렇게 녹아떨어지죠. 그러한 마음이 녹아떨어질 수 있게끔 만드는 것이 장본인입니다.
사랑을 주는 거지 받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해도 주기만 하면 언젠가는 받게끔 돼 있으니깐요. 내가 해 놓은 거 어디 가겠습니까? 나쁜 일을 해 놨어도 나한테 올 것이고 좋은 일을 해 놨어도 나한테 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랑을 준다면, 자비롭게 의리를 도모하고 참 그렇게 믿는 데에 인내가 있다면, 물러서지 않는다면 모두가 그렇게 조화를 이루고 사랑하고 또 화목하게 이렇게 생활이 진행돼 나가는 것입니다.

위패와 천혼문에 대해서
스님, 올 한 해에도 강건하시어 이 어두운 미망의 사바세계에 지혜의 깨달음을 널리 펼쳐 주시기를 발원합니다. 제가 여쭙고자 하는 것은, 절에서 천도재를 지낼 때 영단에 위패를 해서 올리고 천혼문을 읽는 것을 보게 되는데 위패와 천혼문을 어떤 의미에서 하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가정에서 제사를 지낼 때 위패와 천혼문을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지 그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제사를 지낼 때 위패를 해 놓고 영가를 청하고 그러죠? 건더기가 없으면 영가가 어디 붙을 자리가 없어서 못하니까 위패를 만들어 놓는 거거든요. 우리 인간도 이 모습이 없으면 나 자신의 자성신(自性神)도 없어요. 왜냐하면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거죠. 있다 할지라도 보질 못하는 거죠.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도 내 주인공에다 모든 조상들을 모셔 놓고 그렇게 거기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수십 명의 영령들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이 소립니다. 두드러지지 않으니까 그 세계의 영령들이 그 속에 들어가 보니까 아, 세상이 활짝 뚫렸거든요. 세상이 다 터졌어, 그 속에 들어가 보니까. 지금 현재의 사람이 모두 이 공부를 하고 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부 일체제불의 마음과, 일체 중생이 둘이 아니게 그냥 탁탁 곳곳마다 통하지 않는 데가 없고 곳곳마다 보이지 않는 데가 없고 아, 탁 뚫렸으니 뭘 바라겠어요, 그 영령들이. 그러니까 모두 하나가 되죠. 그러니까 바랄 게 없는 거죠.
그러면 사람의 생각으로서 이 세상 어느 곳에다 내놔도 손색이 없죠. 그렇게 되게끔 돼 있어요. 그랬는데 우리가 완벽하게 안다 하면 우리 마음에서 벌써 다 모셨고 다 해결을 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놓고서 판결을 한 거죠. 어머니 아버지든 형제든 누구든 이 세상을 놓고 보여 주고 들려 주고 앉혀 주고 하면서 판결을 한 겁니다. 그분한테 판결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더하고 덜함도 없이, 배고프다 배고프지 않다가 없이 이렇게, 즉 말하자면 도리천 좌(座)에 전부 한자리를 하게끔 하는 거죠.
그러는 반면에 위패는 써 놓되,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이거를 새로 또 물 한 그릇 떠 놓은 데다가 사르는 거는 해방을, 즉 말하자면 영혼을 붙들어매 놓지 마라 이런 겁니다. 위패에 붙들어매 놓으면 영혼이 거기에 부착이 돼 가지고 산 사람도 귀찮고 죽은 사람도 귀찮을 겁니다. 또 위패를 해 놓더라도 그렇게 태워야 하고 천혼문을 써 가지고 읽더라도 그 천혼문하고 위패하고 둘 다 다 태워야 됩니다.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어떤 절에 가 보면 벽면 가득히 위패를 붙여 놓는데 지금 시대에 그게 걸맞습니까? 첫째, 걸맞지 않고 둘째, 또 우리가 고상하지도 못한데다가 영령들을, 조상님들을 모실 때 그것은 모셔서 붙들어매 놓는 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미국에 부모들을 모셔다가 영어를 못하니까 그냥 방에다 가두어 놓고는 그냥그냥 자기네들만 돌아다니는 것과 같이, 조상들을 꼼짝 못하게 위패를 해서 붙여 놓고선 그냥 자유스럽게 나고 들지 못하게끔 해 놓는다 이겁니다. 그러니 어찌 조상을 나의 생명과 같이, 내가 또 조상이 되고 자식이 되고 조상이 되고 하는데 거기다 꽁꽁 뭉쳐 놓고선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지낼 때 부모를 모셔다가 대접하고서 그냥 또 자유스럽게 해드릴 수 있게끔 위패를 태워 드리는 겁니다. 태워 드릴 때도 물을 큰 그릇에다 떠다 놓고 향 피워 놓고 초 켜 놓고 태워 드리는 겁니다. 지금 자식들을 가두어 놔도 죽겠느니 살겠느니 하고 비뚜로 나가고 야단들인데 아, 체가 없다고 조상들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즉 조상이고 조상이 즉 우리들이니깐요. 그렇게 해 놓는다면 그 조상들이 빨리빨리, 우리가 개선을 해서 빨리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 진짜로 그거를 잘 생각을 해 보셔야 됩니다.
그렇지만 위패를 꼭 해 놔야만이 되는 건 아닙니다. 꽃 한 송이라도 갖다 놓고 그렇게 하면 되고요, 또 위패를 해서 써 놓지 않는 대신에 천혼문을 씁니다. 이거는 일체 조상님들 어떠한 분이라도 이게 할아버지의 아들이 있고 아들의 또 아들이 있고 이렇게 되는 거니까. 따지고 보면 죄 친지 아닌 게 없으니까 일체를 다 넣어서 나는 덜 먹었다, 나는 왜 안 찾느냐 이렇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 일체를 넣으면 됩니다. ‘일체 조상님들 모두 부처님 자리에 한자리를 하시고 이렇게 좋은 데로 한자리를 하십시오.’ 하고 이렇게 천혼문을 써서 이렇게 해 드린다면 너무나 좋은 일이죠. 그리고 주인공에 나중에 다 맡기시면 되고요.
또 천도를 시킬 때도 그렇습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그렇고요. 음식을 잘 차려서 이렇게 해 놓는다면 ‘너는 언제나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고 이렇게, 쓰고 단 거를 먹어 가면서 고생을 해라.’ 하고 묶어 놓는 겁니다. 아시겠어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밥 한 그릇 가지고 이 세상 만물만생을 다 먹이고도 밥 한 그릇은 되남았느니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까요? 짜고 달고 그런 거, 맛이 없고 있는 거 그런 거를 쭉 차려 놓고선, 자꾸 관습에 얽매이고 집착에 얽매이고 그러게끔 만들어서 오히려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이치가 지금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많이 차려 놓고서 그런다면, 그 음식이 맛있고 맛없고 덜 차리고 더 차리고, 이런 데만 집착을 하고 온통 그냥 이집 저집 일가친척으로 다니면서 살아 있는 것처럼 내 말도 듣지도 않고, 내가 와도 본 척 만 척하고 이런다고 사단이 벌어지죠. 그래서 죽은 집에 가서, 죽은 사람이 자기가 죽었다는 걸 인정 안 하고 산 걸로 생각을 하고, 거기 어정거리다가 일가친척이 오면 자기를 본체만체했다고 탁 그냥 그럴 수가 있느냐고 떠다박지르면 그게 병나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은 이 마음공부를 필연적으로 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생활 자체가 교재고 생활 자체가 바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재료니깐요. 이제 위패도 그, 재(齋) 지내는 거와 결부해서 지금 얘기를 했습니다. 사람을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나셨지 해롭게 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나신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당시에 말씀하셨고 말씀하신 게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지금까지도 그냥 여여하게 살아계시고, 죽는다 산다 하는 게 없이 그냥 계십니다. 그러니까 말씀하신 대로 그 뜻을 받아서, 우리가 잘 심사숙고해서 듣고 생활 속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데에 목표를 둬야 되겠습니다.

물질적인 발전만이 전부가 아닐 텐데…
지금의 시대는 물질문명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지만 그런만큼 심성에 관한 문제는 너무 등한시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폐해도 심각하여 자연훼손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정신문명의 피폐함으로 인해 모든 것이 경제적인 논리로만 해석되어지는 것 같습니다. 물질적인 발전만이 전부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바라보고 마음을 내야 하는지요?
우리는 머리로 물질과학을 연구하는 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마음으로써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체 만법의 만물만생이 전부 진화해서 고정됨이 없이 모습을 바꿔 감으로 해서 이렇게 광대무변하게 세상이 펼쳐졌다는 것을, 확산됐다는 것을 알게 되면 머리로써 돌아가는 이 오신통을 넘어서야 한다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오신통 다섯 가지, 이게 지금 세상에 컴퓨터나 모든 걸로 나와 있습니다마는 영원한 자기의 무전자의 컴퓨터가 그렇게 무전자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유전자의 다섯 가지 요소가 다 자기한테 들어 있는 겁니다. 그건 왜? 지수화풍이 한데 합쳐진 하나의 유전자입니다. 유전자가 바로 그 다섯 가지 요소를 부리고 있습니다. 부리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다섯 가지에 말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연구할 때에 똑똑히 연구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컴퓨터에 우리 인간이 말리고 있고 자유자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꼭 심부름을 해야만이 컴퓨터가 움죽거리게 돼 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영사기나 천체망원경이나 또는 무전기나 탐지기나 이런 것이 다섯 가지가 다 표면적으로 나와 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한테 영원히 이 무전자의 유전자로, 무전자의 능력에 의해서만이 그 유전자 바로 거기에 공(空)해 있다는 겁니다. 자연이 거기에 공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물질적으로 연구해 낸 겁니다. 연구해 냈어도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면 절대로 그건 움죽거릴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데로 나오는 것, 일체 모든 살아가는 생활이 그대로 심성과학이며 도며 진리라는 뜻입니다. 이 생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두? 우리가 앞으로 자라나는 애들을 키우면서 그 자라나는 애들이 또 주인이 되면서 일꾼이 되면서, 우리가 이러한 정신을 갖지 않고는 앞으로 더욱 더 힘에 겨운 문제들이 많이 벌어지게 될 거고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러한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당연한 문제겠죠.
여러분도 지금 살아 있으면서 이 도리를 모르고 몸이 있을 때에 벗어나지 못한다면 아마 그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대로 팔짝팔짝 뛸 겁니다. 나로서는 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근중하고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우주간 법계(宇宙間法界)의 문제도 그렇지만 우리 앞에 닥쳐오는 문제를, 왜 이렇게 내가 이 자리에서 얘기를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깊이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한생각에 가정을 이끌어 나가며, 내 몸을 이끌어 나가며, 사회를 이끌어 나가며, 국가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의 도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정치하는 사람도 지금 균형을 잡아서 물바람이 칠 때는 바로 물바람으로 막아야 하고 불바람이 칠 때는 불바람으로 막아야 하고, 흙바람이 불 때는 흙바람으로 막아야 하는, 그러한 보이지 않는 세계 또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잘 이끌어 나가면 보이는 세계로 잘 이끌어지는 그런 도리를 정치하는 사람일수록 잘 알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잘못 끌고 가면 온 국민이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니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우리 스스로 생각해 봄과 동시에 이렇게 해서 모든 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 자체에서 우리가 잘 살펴봐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2008-01-15 오전 9: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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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