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조는 <소요당집> 서문에서도 ‘대사의 시는 맑고 훤하고 담박하여 마치 허공을 지나는 구름 같고 달이 냇물에 비친 것 같았고, 적절한 언어와 절묘한 비유가 빛이나 모양의 저쪽을 뛰어넘고 있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선사의 시문을 유심히 볼 것 같으면 모든 게송이 그저 시인의 절묘한 시구나 기발한 발상을 언어로 나타낸 시가적(詩家的) 입장이 아니라, 앞 모두에 서산 대사가 준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다’와 같이 이미 선가에서 전래된 시를 편안하게 그냥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바로 선사들의 꾸밈없는 마음 자체에서 찾을 수 있고, 오직 후학들을 위한 간절노파심절만 있기 때문이다. 이러함은 선시의 한 특징이니 여시한 평평범범, 이것이 선장들의 솜씨라 할 것이다.
소요당 태능은 서산 대사의 전법제자이며 오늘날까지 그 문손이 전해 내려오는 휴정의 4대 문파 중 하나다. 사명당 유정은 서산으로부터 경을 잇고 소요당과 편양당 언기는 선을 이었다. 그리고 정관당 일선이 각각 한 파를 이루고 있다.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
一株無影木
불 속에 옮겨다 심으니
移就火中裁
새봄의 비를 가져 오지 않아도
不假三春雨
흐드러지게 핀 저 붉은 꽃
紅花爛漫開
-소요 태능
위의 게송은 제자 霽月 守一(제월 수일)에게 준 5수 가운데 하나이다. 진리를 전하는 염송적 전법게이다. 선가의 선시는 시구가 독창적일 수도 있으나, 진리 자체에 계합될 때, 예부터 전해 오는 선게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시를 짓는데 근본이 있기보다, 학인을 깨우치게 하는데 목적이 있게 때문이다. 저 뻥 뚫린 선장의 지극한 간절심 때문일 것이다. 일체가 그대로 실상이요 그것이 그대로 진여 화엄법계이기 때문이다. 앞의 서산대사가 소요에게 준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騎牛更覓牛)” 역시 예부터 내려오는 게송을 그대로 주고 있다.
1행의 “한 그루 그림자 없는 나무” 역시 선시의 반상합도의 수사법이다. 무한실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A는 A가 아니므로 A이다’가 되는 A=?의 표현이다. 즉 ‘나무’(A)가 ‘나무 아닐’(?) 때 그림자가 없고, 2행과 같이 ‘불 속에 옮겨다 심을 수’있다는 표현이 가능해진다. 이럴 때 미당의 시 < 내가/돌이 되면//돌은/연꽃이 되고//연꽃은/호수가 되고//내가/호수가 되면//호수는//연꽃이 되면/연꽃은//돌이 되고 (-연꽃이 되면, 전문)>의 시세계와 포개어 지며, 무한하고 아득한 저 속의 세계 소식이 3행과 4행에서와 같이 “새봄의 비를 가져 오지 않아도(不假三春雨)/흐드러지게 핀 저 붉은 꽃(紅花爛漫開)”으로 천만번 되 피고 되살아나고 다시 사라지고 다시 살아나고 차조동시(遮照同時)의 소식으로 오게 된다. 이것들 흔히 문자의 표상 밖이라 하지만, 선장들은 이것 역시 문장 밖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선가에서는 별무기특(別無奇特)이란 말이 있다. 진실로 별난 것이 없음이 선가의 가풍이다. 선시의 맛을 표집하면 단순(單純), 명징(明澄), 청량(淸凉), 표일(飄逸), 검박(儉朴)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 역시 소요의 시에서 주된 풍광을 보여준다.
인조 27년(1649)에 입적을 하며 다음과 같은 열반송을 남기니 세수 88세, 선납 73년이다.
해탈이 해탈아니니
解脫非解脫
열반 어이 고향이리오
涅槃豈故鄕
취모건 서슬 푸르른데
吹毛光 燦
입으로 칼날을 부딪임이여!
口舌犯鋒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