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우 교수의수습지관좌선법요 (修習止觀坐禪法要)
序說2
중생의 심성은 본래 그 자체가 청정하고 스스로가 지혜광명이다. <능엄경>에서는 이를 두고 “중생의 근본마음 자리는 상주불변한 진실한 마음이고, 본성이 청정한 지혜광명 그 자체이다 (상주진심 성정명체 常住眞心 性淨明體)”라고 말하고 있다.
중생의 마음을 두고 이미 진실한 마음이라고 했다면 그 마음의 자성은 청정하고 그 자성은 지혜광명일 뿐이므로 현재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청정한 법계이며 커다란 광명을 간직한 상태이다.
이처럼 중생의 근본마음은 본래 청정한 천진불인데 무엇 때문에 인위적인 지관수행을 해야만 하는가.
대체로 모든 중생들은 무시이래로 최초일념이 무명불각(無明不覺)으로 일어나 그 무명번뇌가 다시 청정한 마음을 가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초 일념무명이 중생들을 끝없는 생사의 세계로 유전시키는 원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의 본래 밝았던 마음이 번뇌의 어두움으로 전환되고, 본래 고요했던 심성이 시끄러운 생사요동으로 뒤바뀌었다. 중생의 자체 마음은 근원적으로 영명하고 그 지혜는 법계의 이치를 철저하게 관조했건만, 무명망상 때문에 지금까지 애매모호한 어둠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본래 불생불멸했던 마음이 끝없이 생멸을 반복하는 망상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은 본래 청정했던 마음을 등진 채 매일같이 오욕육진의 대상세계를 추구하면서 시끄럽게 요동하는 망상을 본래 마음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를 두고 마치 도적을 자기 자식으로 착각하는 경우와 같다고 한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무명번뇌로 껌껌할 때가 바로 그 근본은 원래 지혜광명이며, 생멸로 시끄럽게 요동할 때가 본래적으로 적정한 이치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근본마음자리는 본래 망상으로 요동하는 모습이 아니며, 지혜광명과 번뇌의 어두움이 상대적인 따로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파도와 물이 그 자체의 모습에선 따로의 차별상이 아닌 것과도 같다.
가령 중생이 지관법문을 실천하고 수행한다면 어두운 모습으로 생멸 요동하는 마음을 전환하여 지혜광명으로 본래 고요한 불생불멸의 마음을 환하게 드러낼 수 있다. 즉 ‘지’ 수행을 통해서 생사를 정지하여 열반을 이룰 수 있고 ‘관’수행을 의지해서 생사의 모습인 번뇌를 타파하여 무상정등각을 성취할 수 있다.
‘지관’은 약과 같고 갖가지 탐진치 등의 번뇌와 끝없이 유전하는 생사는 모두가 병이다. 그렇다면 ‘지’라는 약으로 생사의 병을 치료하고 ‘관’이라는 약으로 번뇌의 병을 다스려야만 한다. 따라서 ‘지관’이라는 약은 복용 할수록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그러므로 지관수행을 부지런히 행하면 생사번뇌의 모든 병을 거뜬히 치료할 수 있다.
우리의 자성엔 번뇌가 본래 없고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가 없음으로 역시 생사고의 결과도 없다. 그 자리는 미혹과 깨달음이라는 차별상이 본래 공적하고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점차의 모양도 허깨비처럼 실재하질 않는다. 마치 마니보배에 모든 색깔이 비추기는 하나 그 자체엔 그들 색깔 모두가 본래 없는 것과도 같다. 단지 중생들은 광겁이래로 진흙탕 속에 오염되고 육진경계에 집착하여 본래 있던 청정한 광명이 실제론 가리움 없이 가리움이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마니보배의 광명을 환하게 드러나게 하려면 문지르고 세탁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진흙 속에 가려진 마니광명의 본래 모습이 스스로 나타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렇기는 하나 마니의 청정한 광명은 본래 있기 때문에 인위적인 세탁을 통해서 없던 것을 새삼 얻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위적인 세척을 의지해서 제 모습이 드러날 뿐이다. 이것이 지관수행을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이유이다.
또 반드시 알아야할 것은 본성과 수행의 상호관계인데, 수행이라고는 하나 그것은 본성을 떠난 따로의 수행이 아니고 전체의 본성에서 일으키는 수행이며, 본성이라고 하나 그 본성은 수행을 떠난 따로의 본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수행을 의지해서 본래 있던 성품이 드러나므로 전체의 성품에서 수행을 일으키는 전성기수(全性起修), 전체의 수행에서 본성이 나타나는 전수현성(全修顯性)이어서 본성과 수행이 둘이 아닌 성수불이(性修不二)를 두고 지관을 치우침 없이 원만하게 수행하는 원수지관(圓修止觀)이라고 한다.
‘지관’의 이치는 범부와 성인 모두에게 하나로 통하고 그 의미는 대소승을 함께 아우른다. 가령 ‘모든 악한 일을 하지 말라(諸惡莫作)’ 하는 것은 ‘지’수행에 해당하고 ‘뭇 선업을 적극 실천하라(衆善奉行)’ 함은 바로 ‘관’수행에 포섭된다. 또 십악업(十惡業)을 행하지 않는 것은 ‘지’며, 동시에 십선업(十善業)을 일으키는 것은 ‘관’이다. 이처럼 ‘지관’은 인천지관(人天止觀)이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승지관(小乘止觀)도 있지만 지관의 이치를 원만하게 밝힌다면 대승 삼지삼관(三止三觀)을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진여를 체득하여 망상을 쉬는 체진지공관(體眞止空觀)인데 이는 일체법은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아 그 실체가 없다고 관찰하는 것으로, 이는 소극적으로 세간을 벗어나는 수행법이다. <금강경>에서 말한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과 <반야심경>에 나오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 그 예이다.
두 번째는 방편수연지가관(方便隨緣止假觀)인데 이는 방편이 그 자체 모습이고 방편으로 인연을 따르는 것이 그 작용이다. 공관(空觀)을 통해서 비록 일체법이 그 자체는 공이라고 관찰하나 그 공에 따로 머물지 않고 다시 인연을 따라 집착 없는 마음으로 세간을 구제하면서 세간으로 회귀하는 적극적인 수행방법이다. 이는 <반야심경>에서 말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 그 예이다.
세 번째는 중도지관(中道止觀)을 설명한다면 공(空)과 가(假) 이 둘을 분별하는 마음을 쉬는 식이변분별지(息二邊分別止)와 공과 가가 원만한 중도라고 관찰하는 중도제일의제관(中道第一義諦觀)이다. 이 지관이 지관수행에서 그 극치를 이룬다.
중도지관은 진속이제가 하나의 이치로 융통하고 주관 객관이 두 모습이 아니다. 집착 없는 가운데 청정한 마음을 일으키고 공과 유가 둘이 아니며, 고요와 관조가 하나의 자체이고 세간과 출세간이 일심의 이치일 뿐이다.
비록 종일 중생을 제도한다 해도 제도할 만한 실제 중생이 없고 종일 설법한다 해도 끝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으며, ‘지’ 수행처가 바로 ‘관’ 수행처여서 지에 상즉한 관이고 관에 상즉한 즉지즉관(卽止卽觀)의 오묘한 지관이다.
그런데도 삼종지관을 이처럼 차례로 말한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게 하려함 때문이지 실제로 일즉삼(一卽三), 삼즉일(三卽一)이어서 비일비삼(非一非三)이며 삼이일(三而一)인 원융한 중도지관일 뿐이므로 실제론 삼종차별이 없게 된다.
그러나 지관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초보지관이므로 반드시 좌선법요(坐禪法要)의 차례를 삼종지관의 방편으로 밝혀야만 한다.
따라서 본서는 열 종류의 의미로써 지관수행의 점차를 밝히고 있다.
제1 구연(具緣)에서는 지관수행을 하려면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고,
제2 가욕(呵欲)에서는 오욕(五欲)에 대한 집착을 꾸짖었고, 제3 기개(棄蓋)에선 오개(五蓋)번뇌를 물리치라 하였으며, 제4 조화(調和)에선 몸과 마음을 조화하라 하였고, 제5 방편(方便)에선 방편보조수행을 닦으라 했고, 제6 정수지관(正修止觀)에선 지관을 올바르게 수행하라 하였는데 이처럼 방편과 근본수행이 완성되면 삼지삼관을 원융하게 수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지관법문은 최초 발심한 자가 가장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법문이다. 때문에 제목을 ‘修習止觀坐禪法要’라고 하였다.
■중앙승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