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밝히고 안에서 구하려면…
스님께서는 늘 “자기 안에서 구해서 마음을 밝혀 나가고 깨쳐 나가라.”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생활해 가면서 어떻게 살아야만이 마음을 밝히고 안으로 잘 구할 수 있는지 그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만날 했던 말이 그 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아주 진짜로 믿고 절감을 해야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걸 내가 이렇게 말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죠. 아주 급박할 때, 물에 빠져 다 죽어 갈 때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심정, 그 정도가 돼야 ‘아이고, 너만이 할 수 있다.’ 하고 아주 그냥 절박하게 하죠.
미국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일본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요, 나한테 전화를 할 때는 아주 절박하게 합니다. “알았어. 절박하게 관해 봐!” 그러면 그 이튿날이고 그 다음 날이고 전화가 또 뚜르르 옵니다. “아이구, 전화하고 나니까 그냥 멎었어요. 스님, 참 감사합니다.” 이럽니다. 그러면 “응, 네 전깃줄과 내 전깃줄이 둘이 아니게 돼서, 둘이 아닌 까닭에 불이 들어왔을 뿐이지, 내 전깃줄이 제일이고 네 전깃줄은 아니고 이런 게 아니라 네 마음의 전깃줄하고 내 마음의 전깃줄하고 같이 합쳐 놨으니까 불이 들어온 거다. 그러니까 네가 낫게 했다 내가 낫게 했다 하는 것도 없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역시 진정으로 믿어야죠. 자기 뿌리를 자기가 안 믿으면 누굴 믿을 겁니까? 이름을 믿을 겁니까, 형상을 믿을 겁니까? 또 스님네들의 고깃덩어리를 믿을 겁니까? 어떻게 할 겁니까? 당신을 이끌어 가는 진실한 당신을 믿어야죠.
그러니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경이나 각처의 스님네들이 이끌어 주는 그것은 역시 길잡이밖에 안 되는 겁니다. 나부터도 길잡이밖에 안 되는데 방편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거죠. 스님네들이 방편을 안으로 두게끔 썼으면 좋겠는데 바깥으로 기도하고 빌게 만드는 경우가 많아요. 가톨릭교고 기독교고 전부 그래요. 하여튼 모두 바깥으로 기도하게 하고 바깥으로 믿게 하거든요. 주처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건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진짜 자기부터 알아야 일체를 다 알 수 있다고 가르치셨는데 모두 타의에서 구하고 있고 바깥으로 기도하고 있어요.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 세계적으로 봐도 다 그래요. 알라신교니 티벳 불교니 기독교니 가톨릭교니 그런 사람들 다 만나 봤고, 또 어떻게 하나 기웃거려 봤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엇나가는 격이 많거든요.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 뜻을 아예 뒤바꿔 놓고 가르치는 거와 똑같죠.
그러니 우리가 경 한 번을 본다 하더라도 경을 달달달달 외워서 그 이름을 알고 말을 아는 게 아니라 그 진실을 알아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모두 진실한 자기, 못났든 잘났든, 정말 왜소하고 못나서 애쓰는 그러한 사람도 역시 자기 원소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원소 그 자체 불성은 변하지도 않는 거고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고 아주 영원한 겁니다. 그러니 그 영원한 자체의 불성은 사람이 못났든 잘났든 잘 배웠든 못 배웠든 그거를 떠난 자립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마시고 뒤로 물러서지도 마시고 공부 열심히들 하세요.
당장 급하신 분들이나 처음 선원에 나와서 마음공부를 접하신 분들이 있다 하더라도 내면으로 믿고, 당장 ‘주인공 뿌리야, 너만이 알고 있어. 너만이 해결할 수 있어.’ 하고 거길 믿고 진정코 진실한 마음으로 해 보세요, 안되나 되나!
되기 위해서만 하는 거는 아닙니다만 그것이 바로 방편이자 바로 부처님께서 불난 집에서 애들을 구하기 위해 “사탕 줄 테니 나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장난감 줄 테니 나오너라.” 이렇게 하는 거와 똑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치심이 아니었더라면 여러분과 내가 이렇게 있지도 않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할 줄도 모를 거고요. 그러니까 감사한 줄 아시고 하여튼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진실히 해 보십시오. 다가오는 그 괴로움을, 애고를, 번뇌를 번뇌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라고 생각하시고요. 그 재료가 있기 때문에 내가 공부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시고 한번 열심히들 해 보십시오.
환자 수가 줄어 힘들어요
저는 현재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는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저 외에 6명의 산부인과 의사들이 같이 근무하는데 서로 환자 수에 대한 경쟁이 보이지 않게 치열합니다. 왜냐하면 병원 측에서 은근히 월급 문제로 경쟁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항상 한마음 공부 하는 사람으로서 정도를 지키려고 하는데 딴 과장들이 정도를 벗어나 좀 치사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환자 수를 늘이려고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큰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닐까 갈등이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어차피 환자도 인연이 있어 만나는 것이라고 자위를 하기도 합니다만 환자 수나 수술 건수가 줄어들 때마다 속이 상합니다. 한편으로는 내 전생의 업보가 현재에 술술 내 앞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실과 한마음 공부와의 갈등 속에 고민이 많습니다. 스님의 큰 조언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다 자기 주인공을 의심하면 죄 받죠. 자기 주인공을 믿지 않고 누굴 믿어요, 세상에? 죽는 것도 누가 대신 죽어 줄 수 없고, 아픈 것도 그렇고 먹는 것, 싸는 것, 자는 것, 깨치는 것, 이 여섯 가지를 아무도 대신 못해 주는데 누구를 믿어요, 자기를 믿지 않고? 자기만이 자기를, 자기 몸을 이끌어 가는데 말이에요. 그러니까 주인공은 이 모든 생명들의 의식을 다스리고 나가는 선장이라고요. 다스리는 선장은 바로 그 체가 없는 마음의 입자를 그냥 수없이 내보내서 어떠한 용도라도 다 해결할 수 있게끔 돼 있어요.
예전에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어느 신도가 말입니다, 애를 가졌는데 가서 보니까 쌍둥이라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와서는 쌍둥이라는데 어떡하면 좋으냐고 그래요. 두 달이 좀 넘었다던가 그랬는데, 석 달이 채 못 됐을 겁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겁나서 애를 쓰니까 내 생각에 ‘쌍둥이는 무슨 놈의 쌍둥이!’ 그러곤 말았거든요. 허어, 그랬는데 나중에 또 가 보니까 이제 쌍둥이가 아니라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낳을 달이 됐는데, 낳을 달이 지나도 안 나와서 병원에 가 보니까 애기가 거꾸로 섰다고 그러더래요, 또. 그래, 생각들 해 봐요. 돈이라도 있고 그런 사람들은 거꾸로 서면 바로 할 수도 있고, 또 자기 몸 망가질까 봐…, 바로 세우는 데도 아주 크게 뭐가 잘못될 수도 있대요. 하여튼 몸에도 그렇고 좋지 않대요. 그런데 그 의사가 하는 소리 좀 봐요. 의사가 하는 소리가 “날더러 거꾸로 된 거 바로 해 달라고 그러지 말고, 저 한마음선원의 대행 스님한테 가서 바로 서게 해 달라고 그래라.”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속으로 웃으면서 “그러겠다.”고 그러고선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러곤 정말 전화가 왔어요. 의사가 그렇게 말하라고 그래서 스님한테 말하는 거라고 그래요. 그래서 그러냐고, “그러면 2, 3일 후에 가서 검사해 봐!” 그랬죠. 그래 그 이튿날 가니까 “어! 바로 됐네.” 이러더라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그게 대수롭지 않은 것 같지만 요만한 거든지 큰 거든지 똑같아요. 실천하는 건 똑같다고요. 인간의 생각으로 이건 너무 커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다 하는 것까지도 바로 거기서 다 해내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주저하고 의심할 상황이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생각할 때는 ‘저 스님은 저렇게 뻥이나 치고,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고 그런다.’고 그러겠지만 그게 아니에요. 이 세상은 그대로 여여하게 초월해서 회전되고 있어요, 그대로. 그러니까 우리 마음대로죠. 우리 마음대로 이렇게 회전을 시키느냐, 저렇게 회전을 시키느냐, 그거에 따라서 살기가 평화롭기도 하고 살기가 아주 어렵고 복잡하게도 되는 거죠.
그런데 어떤 사람이 주인공을 찾아도 이렇게 안된다고 할 때, 거기에 대고 내가 뭐라고 말을 해요? 알았다고 그냥 보낼 때도 있는데 그런 때는 그냥 심부름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이고, 또 “관하세요!” 이럴 때는 그 사람이 좀 나은 사람이기 때문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거 왜 관하면 될 거를 그렇게 못 믿고선 못 관하고 그러느냐? 내가 산소에 가도 산소로 쫓아와 그거 해 달라고 그럴 테냐?” 하고 야단하죠. 때로는 그렇게 못된 사람이 될 때도 있어요. 그렇게 막 하니까요. 그렇지만 딱해서 그러지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오늘부터라도 늦지 않았어요. 좀 미련한 듯하게, 똑똑한 척하지 말고 미련한 듯하게 ‘무조건 너만이….’ 그저 보면 보는 대로 이렇게 벌써 부(父)와 자(子)가, 주인공과 자기와 둘 아닐 때는 길에 지나가는 것만 봐도 그냥 ‘아, 저건 안됐다.’ 이러면 그냥 천가가 되는 거예요. 꼭 주인공에다 맡기고 안 맡기고가 어딨습니까, 싹과 뿌리가 한데 붙었는데. 안 그래요? 그러면 그렇게까지 되게끔 돼야죠.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일은 나가서 할 수 있게끔 돼야 됩니다. 구경을 하면서도 벌써 천백억화신으로 나투면서 화해서, 이 우주 전체를 그냥 한 찰나에 다닐 수도 있고 일을 할 수도 있어야 된단 얘깁니다.
그리고 이 공부라는 건 아무리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진짜로 믿는다면 겁낼 필요가 없어요. 겁내지 마세요. 지금 당장 죽는대도 겁내지 말아야 된다 이겁니다. 깨치고 안 깨치고 그걸 떠나서 우리가 진짜로 ‘나를 믿느냐? 내가 나를 믿느냐?’의 문제입니다. 딴 사람은 그렇게 잘 믿으면서 자기를 자기가 믿으라면 왜 못 믿습니까? 진짜로 믿는다면 둘로 보지도 말아야죠. 진짜로 믿는다면 ‘당신은 이렇게 모두 하고 나가니까 이런 것도 당신은 다 할 거다.’ 하고 믿고 나간다면 ‘아이구, 이것 좀 해 주십시오. 이것 좀 잘 가게 해 주십시오.'''' 이런 말 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진짜입니다. 가짜가 아니에요.
참다운 태교를 하려면…
참다운 태교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젊은 청년 법우입니다. 사람 하나 잘 낳아서 훌륭하게 키우는 것도 인류 사회를 향한 큰 보시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스님 법문에서 진정 중요한 태교는 임신하기 전에 하는 것이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 법우들이 좋은 인연의 배필을 만나서 가족과 집안을 화합되게 하고 많은 사람을 이익 되게 할 수 있는, 선종의 자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어린애를 낳으려면 임신하기 이전부터 준비를 해야 합니다. 기둥을 세우려면 먼저 마당을 다듬고 공구리를 쳐야 하듯이 어린애가 생기기 이전부터 해야 할 태교가 있는데, 거기에 일곱 번의 고비가 있습니다. 만약에 그 일곱 번의 태교가 아니라면 차원이 높은 인연을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즉 먼저 터를 다듬어야 하듯이, 공자님 어머니가 좋은 영가님을 달라고 해서 공자님을 낳았듯이 임신하기 이전부터 태교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기보다 좀더 나은 인연, 차원이 높은 인연을 만나게 돼서 자식으로 받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어린애가 생기면 거기에서부터 또 태교를 해야 합니다. 즉 석 달 일곱 달 아홉 달, 이렇게 세 번이 태교에 너무나 중요한 이치가 있습니다. 왜 중요하다고 하느냐 하면 그 영도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정수에 입력이 돼서 현실로 나오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도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에 자꾸 나와서 그대로 벌어지는 것을 운명이라고 하고 팔자라고 하는데, 그렇게 입력됐기 때문에 현실로 나오는 거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했던 그대로 받는 건데 이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니저러니 하고 야단들이죠. 그러니까 그런 거를 전부 없애고 어린애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일체의 물이 바다로 들어가서 합쳐지듯이 입력된 모든 거를 보임을 하려면 생활 속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다 거기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일체를 제놈이 한 거고 제놈이 몸뚱이도 형성시킨 거니까 그냥 모든 거를 보임을 해야 되는 거죠. 조금의 의심도 없이 자기 싹이 자기 뿌리한테 의지하고 거기다 보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거짓이 아니니까요. 진정한 공부이자 진실이니까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공부를 하듯이 이 집을 짓는 것도 역시 일곱 번의 과정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터를 닦고 기초를 하고, 그러고선 그게 굳으면 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들고, 지붕을 만들면 그뿐입니까? 기와를 올리고 또 안과 밖의 모든 거를 갖추어야 되죠. 이런 일곱 번의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를 낳는 거와 같이 집도 그와 같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꼭 한마디 해야 할 것은 이 부처님 법이 과학적이라는 겁니다. 이거를 보세요! 우리가 모든 걸 거기다 관하면, 깊은 데다가 진정코 관하면 바로 정수, 자동적인 컴퓨터에 입력이 됩니다. 입력이 돼서 현실로 나오는데 말입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입력이 돼 있거든요. 입력된 대로 나온다 이겁니다. 그런데 나오는 거를 되집어서 거기다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은 없어지면서 새로운 입력이 바로 현실로 나오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이 뜻을 잘 아시면 지금 이 험난한 세월에도 무난히 대로를 걸을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참회의 삶을 살고 싶어요
스님께 삼 배를 올리오며 질문을 드립니다. 얼마쯤 전에 사고로 몸을 심하게 다친 후 관하며 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제가 잘못하였던 부분들이 다가옵니다. 참으로 참회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지어가야 하며 가난과 고독함,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잘못한 일에 대한 회한이 한꺼번에 올 때는 어떻게 관하여 가야 하는 것인지요?
내가 항상 저 나무들 뿌리하고 싹에 대해 얘기를 하죠? 그런데 나무 싹이 있으면 뿌리가 있듯이 누구나가 다 본래 그렇게 달려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네 뿌리는 바로 네 주인공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말을 하자면 일체 우주 전체를 한데 싸서 콩 알갱이 하나로도 할 수 있고, 한 사발로도 할 수 있고 한 주먹으로도 할 수 있고, 아주 없이도 할 수 있단 얘깁니다.
그 모두를 콩 하나로 해서 짊어지니까 짊어질 수도 없이 무겁더랍니다. 그런데 그거를 어떡하면 빨리 해소를 시킬 수 있나. 그래서 그냥 무조건 관하라고 그런 겁니다. 진짜로 믿는다면 믿는 것만치 없어질 거고, 믿지 못하고 뭐를 얻으려고만 한다면 자기 정성에 의해서 그것이 조금 나을 뿐이지 없어지거나 그런 것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현재만 살려고 그러지 말고 세세생생을 살기 위해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 그걸 벗어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짊어진 콩 한 알갱이를 산더미 같은 산이라고 그런다면, 우리는 산 하나를 짊어지고 다니는 셈이죠. 그런데 ‘그 무거운 거를 그냥 다 놔라.’ 이 소린데, 그러면 그렇게 진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기 주인공이라는 자기 자불을 진짜 꼭 믿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면 알죠. 눈 뜨고 보고 귀를 기울여 듣고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형성시켜서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만든 자가 누구냐는 얘깁니다. 자기 종자인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종자라는 근본인데, 그 근본으로 인해서 자기가 생겼다면 그 근본에다가 다 놔야죠. 진짜로 믿고 놔야죠. 하는 것도 먹는 것도, 똥 누는 거, 뭐 일상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그놈 때문에 움죽거리게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산 하나다 해도 되고 콩 한 알갱이다 해도 되는데, 그 콩 한 알갱이가 짊어질 수가 없으리만큼 무겁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그거 하나를 없애려고 한다면 진짜로 믿고 무조건, 가난하든 부자든, 돈이 있든 없든, 밥을 굶든 먹든, ‘굶지 않게 해 주는 것도 너고, 살리는 것도 너고, 길을 걷게 하는 것도 너고….’ 이렇게 전부 다 주인공이 하는 것임을 믿어야죠. 자기 모습이 자기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님 머리 위에 상투를 이렇게 하나 해 놓기도 하고, 또 때로는 부처님을 이마에다 새겨 놓기도 하고, 지금도 해 놨지만 때로는 금으로다 이렇게 해 놓은 것은 바로 그게 크고 좋아서가 아니죠. 그 뜻으로 볼 때는 ‘텅텅 빈 모습이다. 텅텅 빈 모습인데 무엇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갖추어 가지고 계신다.’ 하는 거죠. 텅텅 비고 없기 때문에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거지, 뭐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을 수가 없죠. 오장 육부가 다 있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내 손도 빈 손 부처님 손도 빈 손, 내 발도 빈 발 부처님 발도 빈 발, 부처님 몸도 빈 몸 나도 빈 몸, 빈 몸이니까 빈 마음, 함도 없이 하고 가는구나.’ 하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 이 모두를 알 양으로 애를 쓰지 말고 모두가 공했다는 거, 우리가 공해서 함이 없이 하면서 지금 생활을 하고 간다는 거, 그러니까 모두가 수억겁 전년서부터 인과로써, 인연으로써 둘이 아니게끔 돼 있다는 거, 그러니까 모두 그 뜻만 대략 알면 그냥 믿고 가도 된다 이겁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바보에게, 아무리 가르쳐도 모르니까 빗자루를 하나 줬단 말입니다. ‘너는 이 빗자루 하나 가지고 항상 쓸고 털고 그래라.’ 하고요. 거기서 터득을 한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수없이 안다 하더라도 아는 것을 다 놔야 된다. 아는 것을 다 놓지 않는다면 그 아는 것 때문에 길고 짧고, 이렇고 저렇고, 이론이 많아서 외려 갈 길을 더디게 만든다.’ 이런 소리죠.
그러니까 일거수일투족을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하되 함이 없이 해라. 공했으니까 너는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라는 거죠. 왜, 텔레비전이나 극장 스크린에 화면이 이렇게 나오죠? 화면에서 별짓 다 하죠? 그렇게 연기한 사람이 집에 앉아서 보니까 자기가 그렇게 별짓 다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저거는 내 환상이 저렇게 하고 있고 나는 그냥 여기 앉아서 그걸 보고 있다고 하겠죠. 그렇게 온통 모든 것을 환상으로 살고 있는데도 우리는 진짜처럼 사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어디 다치거나 그런다면 그냥 야단나죠. 그러나 환상인 것을 알면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이런 것이 다 무심하게 돌아가죠. 알게 되면 얼음판을 걸어와도 아주 편안하게 걸어올 겁니다.
그래, 사람들이 강을 건너는데 얼음이 두껍게 얼었더랍니다. 그런데 고기들을 잡느라고 얼음을 깨 놓은 자리가 큰 것들이 있어서 잘못 걸으면 풍덩 빠져서 야단들이 나니까 조심스럽게 걸어오는데, 스님네 둘은 하나도 거침없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냥 오거든요. 옆에서 오는 사람들은 모두 두리번두리번거리고 간이 콩알만 해서 오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다 건너와서 물었어요. “스님, 스님! 스님네들은 이 강을 건너오시는데 겁이 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나는 이 강을 건너온 사이도 없는데 어떻게 겁이 나겠소?” 하더랍니다. 그거와 같이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 그냥 사는 바 없이 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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