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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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49년 일대장교 골자‘止觀’ 두 글자에 포괄
<1>序說1
본서는 최초로 발심한 사람이 수증(修增)하고 입도(入道)하는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지관(止觀)법문을 총론적으로 밝힌 책이다. 천태지자(天台智者)대사는 일생에 지관법문을 총 네 차례에 걸쳐 설하였다.
그 첫 번째는 원돈지관(圓頓止觀)인데, 형주옥천사(荊州玉泉寺)에 있을 때 설하였다. 이때 원돈묘관(圓頓妙觀)의 이치를 밝혔는데 지금의 마하지관(摩訶止觀)이 여기에 해당된다. 두 번째는 남경와관사(南京瓦官寺)에 있으면서 옅은 곳에서 심오한 경지로 들어가는 수행차제공부를 밝혔는데 지금의 선바라밀(禪婆羅密)법문이 여기에 해당된다. 세 번째는 심천이 일정치 않아 능소능대(能小能大) 할 수 있는 부정지관(不定止觀)을 설하였는데, 지금의 육묘법문(六妙法門)이 여기에 해당된다. 네 번째는 소지관(小止觀)을 설하였는데, 앞으로 지상을 통해서 연재할 수습지관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이다. 이는 동몽지관(童蒙止觀)이라고도 한다. 지관법문을 통해서 시방제불과 역대조사가 지관좌선법요를 수습함으로서 성불견성하였는데, 지관법문이야말로 일체 불교수행의 이치를 포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소지관’이라고는 하나 실로 ‘마하지관’의 총론적인 개론서이며 수행 입도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관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하지관’과 그 우열을 논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소지관’이라는 명칭을 붙인 이유는 그 내용이 끝없이 질펀한 대부마하지관(大部摩訶止觀)에 대비해서 상대적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소지관’은 최초로 발심한 사람의 근기에 맞추어 간략하게 그 작은 부분만을 설하였다. 그러므로 ‘大’에 상대적으로 대비해서 ‘小’를 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다해도 가이없는 작음이므로 일체 지관법문 그 모두가 이 ‘소지관’으로 귀결한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환언한다면 ‘마하지관’은 대지관(大止觀)이라곤 하나 그도 역시 ‘小’에 상대적으로 대비한 ‘大’가 아니라 절대보편한 ‘大’인 것이다.
‘小’라고 말하나 그 ‘小’에는 ‘小’라는 따로의 모습이 없고, ‘大’라고 부르나 그 ‘大’엔 ‘大’라는 따로의 차별상이 없다. 다시 말해서 ‘大’와 ‘小’의 차별이 끊어진 절대보편으로서의 평등법계의 이치를 드러낸 것이다.
대소가 모두 평등법계의 이치를 드러낸 지관으로서 이 둘은 서로가 하나의 이치로 융합하고 자세함과 간략함이 차이가 없이 동시에 모두가 불가사의한 중도지관(中道止觀)으로 귀의한다.
그런데도 대소의 명칭을 달리한 이유는 중생이 처한 차별적인 근기의 알맞음에 맞추려 하기 때문에 대소광략(大小廣略)의 방편적 차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때문에 ‘소지관’이라고 했다.
모든 법은 아무런 조건없이 홀로 일어나지 않고 반드시 상대적인 조건을 의지해야만 그 상황에 걸맞는 도리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 연재하려 하는 소지관법문도 아무런 인연없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인연을 말해본다면 지자 대사에겐 진침(陳鍼)이라는 속가의 형이 있었다. 그 형은 중군참장(中軍參將)이라는 무인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의 나이 사십에 이르러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도교의 신선도를 닦은 장과노(張果老)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길 “그대의 상호를 보니 금생의 수명이 이미 다하여 한 달 이내에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했다.
형은 그 말을 듣고 죽음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출가한 동생인 지자 대사에게 이를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을 물었더니 지자 대사는 말하였다.
“형님이 나의 말을 듣고 수행한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이 가르침 받들기를 원하자 대사는 요점만을 간단히 요약한 ‘소지관’을 서술하여 지관공부를 부지런히 닦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대사의 형은 이 소지관법문을 의지하여 절실한 마음으로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한해가 바뀌어 다시 장과노를 만났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그대가 아직도 죽지 않을 것은 보니 필경 불로장생약을 복용한 게 아닌가” 하였다.
대사의 형은 “아닙니다. 저의 아우가 출가한 지자 대사인데 저더러 지관좌선 공부를 수행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때문에 이처럼 살아 있게 된 것입니다” 라고 대꾸했더니 장과노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불법은 불가사의하여 기사회생을 시킬 수 있는 희유한 법이 있구려.”
이로부터 다시 몇 해가 지난 뒤 진침은 꿈에서 하늘나라에 있는 궁전을 보았는데 그 궁전의 편액에 진침이 살집이 ‘진침당(陳鍼堂)’이다 하고 다시 ‘십 오년이 지난 뒤에 금생의 인연이 다하면 이곳에 태어날 것이다’ 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진침은 그곳에 쓰인 대로 십 오년이 지난 뒤에 모든 친척에게 이별을 고하고 결가부좌한 채로 편안하게 임종했다 한다. 이를 통해서 ‘소지관’은 지자 대사가 그의 속가 형을 위해 그 인연으로 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관법문을 수행하는 자라면 반드시 그 근본취지를 알아야만 한다.
당시에 진침이 지관을 수행한 목적은 금생엔 수명을 연장하고 다시 다음 생에는 천상에 태어나는데 있었다. 이는 지관법문 가운데서 한 점 겉가죽의 이익에 불과할 뿐 지관의 본지는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대사가 설한 지관법문은 모든 중생들이 불도를 성취하고 생사를 벗어나게 하려는 데에 그 근본의미가 있었으며, 그것이 바로 지관법문의 진실한 의미라는 점이다. 때문에 본서 제일 마지막장인 증과문(證果門)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듯이 구경성불이 목적이지 단순하게 천상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관수행을 함에 있어서 행주좌와 사위의 가운데서 똑같이 지관수행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본서의 제목에선 ‘좌선(坐禪)’만을 말했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좌선을 통한 ‘정(靜)’ 공부가 여타의 일체수행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최초로 발심한 사람이 행주좌와 가운데서 유독 ‘좌(坐)’를 통해서 지관을 수행하면 비교적 그 이익을 쉽게 얻는다. 가령 좌선을 통해서 이익을 얻은 뒤엔 다시 상대적으로 경계를 마주한다 해도 그 모든 조건하에서도 지관수행이 가능하다.
범어 ‘선나(禪那)’는 번역하면 ‘정려(靜慮)’라고 한다. 이는 삼매에 해당되는데 여기에서 ‘정(靜)’은 ‘지(止)’에 해당되고 ‘려(廬)’는 ‘관(觀)’에 해당된다. 담연적적하여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경지를 ‘止’라고 하고 그 고요한 ‘止’에서 동시에 뚜렷하고 분명하게 삼라만상 전체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관(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지(止)’수행을 통해서 ‘정(定)’이 얻어지고 ‘관(觀)’수행을 통해서 ‘혜(慧)’가 일어난다. 이러한 지관법문을 수행하면 바로 그 자리에선 삼매인 ‘정려(靜慮)’가 한결같고 정혜(定慧)가 평등해진다. 그러므로 ‘좌선’을 통한 선 수행은 불가사의한 지관불이(止觀不二) 법문인 것이다.
‘법(法)’은 법칙, 즉 궤지(軌持)의 의미이며 ‘요(要)’는 요도(要道)인데 이는 중요한 관건이라는 의미에 해당된다. 이것이 이 책 제목인 ‘좌선법요(坐禪法要)’의 간략한 의미이다. 좀더 부연한다면 본서는 지관좌선을 수행하는 법칙이며 그 법칙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스스로도 그 자체의 모습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軌生物解 任持自性)
‘수습지관좌선요법(修習止觀坐禪法要)’라는 여덟 개 글자는 본서의 내용을 총론적으로 요약한 제목이다. 이를 통해서 지관수행공부를 전체로 밝혔다. 그러므로 수행인이라면 이상에서 대략 밝힌 지관좌선의 수행방법을 통해서 수행의 길잡이로 삼고 생사를 초월하고 열반을 증득하는 중요한 관문으로 삼아야만 한다. 이 때문에 그 제목을 ‘수습지관좌선요법(修習止觀坐禪法要)’라고 이름 붙였다.
■중앙승가대 교수

쉽게 풀어 쓴 불교 기본교리

세간 실상으로서의 苦海
불자들이 가장 먼저 알아야 될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 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알고 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흔히들 “불법, 불법이다”라고 말하는데 과연 무엇을 불법이라고 하는지 그 문제부터 짚어볼까 합니다. 불법이란 세간의 진실한 모습을 그대로 심도 있게 끝까지 추구함으로써 그 해결점을 제시해 주는 가르침이라 정의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삼계유정(三界有情)들과 그들이 의지하는 신심(身心)과 세계를 총체적으로 유정세간(有情世間)이라고 부릅니다. 이 같은 유정세간의 진실한 모습을 부처님은 과연 어떻게 관찰하고 계실까요.
부처님은 이 문제를 두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모든 유정들이 탐닉하고 있는 세간, 그 진실한 모습을 추구해 본다면 온통 괴로움일 뿐이다.[一切皆苦]”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바라보는 세간에 대한 정확한 관점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고 있는 삼계고과(三界苦果)로서의 괴로움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태어나는 괴로움[生苦], 둘째 늙어 쇠잔해 가는 괴로움[老苦], 셋째 병들어 신음하는 괴로움[病苦], 넷째 끝내 죽어야 하는 괴로움[死苦], 다섯째 원한과 증오 속에서도 피할 수 없이 만나야 하는 괴로움[怨憎曾苦], 여섯째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이별해야 하는 괴로움[愛別離苦], 일곱 째 끝없이 추구하는데도 뜻대로 얻어지지 않은 괴로움[求不得苦], 마지막으로 무상하게 천류하는 오온신심의 집착에 의한 괴로움[無常五聚蘊苦]을 들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여덟 가지 가운데서도 무상하게 천류하는 오온신심이야말로 나머지 모든 괴로움이 의지하는 근본입니다. 그 때문에 노자(老子)도 말씀하기를“나에게 가장 큰 근심이 있는데 그것은 나에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신심이 없다면 무슨 근심이 있으랴”라고 하셨습니다.
일체유정들은 모두가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끝내는 사망으로 귀결됩니다. 그 중간에 간단없이 교차하는 원한ㆍ은애ㆍ탐구 등 어느 것 하나 괴로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처럼 세간의 실체적 모습이 온통 괴로움뿐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러한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이며, 무엇이 괴로움을 부르는 원인이 되는지 알아야만 하겠지요. 이에 대한 정확한 답변으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모든 세간에 충만한 괴로움의 원인은 업(業)일 뿐이다”라고 단정하셨습니다. ■정리=張如舟
2007-09-12 오후 2:3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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