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은 1963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났다.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고 첫 시집 <늦게 온 소포>와 두 번째 시집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를 냈다. 추상적 인식과 진리를 ‘당신’이나 ‘너’로 은유하여 대상화하는 그리움이 가득한 그의 시집에는 불교 제재 시들이 여러 편 보인다. 이를 테면 ‘별에게 묻다’에서는 “남해금산 보리암/ 절벽에 빗금 치며 꽂히는 별빛/ 좌선대 등뼈 끝으로/ 새까만 숯막 타고 또 타서/ 생애 단 한번 피고 지는/ 대꽃 틔울 때까지// 너를 기다리며/ 그립다 그립다”며 대상인 ‘너’에 대한 아름답고 강렬한 그리움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마음의 액자’에서는 “눈에 멀수록 더 가깝고 크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면서 “어느 날 문득 내게로 오는 것이/ 돈오돈수(頓悟頓修)의 유리 거울이라면/ 끊임없이 가 닿기 위해 / 나를 벗고 비우는 일이/ 원근보다 더 애달픈 사랑이라는 걸/ 마음속의 액자 속에서/ 비로소 깨달은 오늘”이라고 한다. 아래 인용한 ‘부석사의 봄밤’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인 ‘당신’이 누구인지 구체적로 알 수 있게 형상화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가만히 손 대고 눈 감다가
일천이백 년 전 석등이
저 혼자 타오르는 모습 보았습니다.
하필 여기까지 와서
실낱같은 빛 한줄기
약간 비켜선 채
제 몸 사르는 것이
그토록 오래 불씨 보듬고
바위 속 비추던 석등
잎 다 떨구고 대궁만 남은
당신의 자세였다니요. -‘부석사의 봄밤’ 전문
여기서 석등으로 은유된 ‘당신’은 부처나 진리라는 것을 확연히 알아차릴 수 있다. 창작자는 봄날 부석사 여행에서 만난 석등을 통해 부처의 진리가 사찰 창건 당시 전등(傳燈)되어 타오르는 것을 회상하고, 바위 속에 오랜 불씨를 보듬고 불법을 전등하고 있는 석등을 부처의 진리와 비유하고 있다.
‘지평선 가까이 있는 달이 커 보인다?’에서는 사물이 크거나 작게 보이는 것은 거리에 따른 착시현상이라면서 거리와 상관없이 “우리가 그만큼의 거리를 알고 나면/ 비로소 참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 ‘낙산 일몰’에서는 일몰의 반복과 집적을 통해 붉게 타오르는 일출을 상상하고, ‘반신-오층석탑, 동쪽’에서는 석탑이 “깊은/ 산그늘// 혼자 밝히려고” 제 몸을 깎아서 뼈를 쌓았다고 한다. ‘일산 호수공원’에서는 호수에 거꾸로 비추고 서 있는 자작나무 껍질을 벗기면서 “팔만대장경이 따뜻하게 익고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아래 인용한 시는 사투리를 섞은 구어체와 “건강비결?/ 평생 놀았지”리며 기대 배반을 통해 재미를 준다.
개심사 입구 세심동에
어린 할아버지 한 분.
지난 팔월에 팔순잔치 혔제
여그서 한 십 년
취나물이며 은행 말린 거며
커피 사발면 같은 거.
대처에 나간 적 없어
할멈은 일흔 다섯, 살림하지
건강 비결?
평생 놀았지 센 일 안 했어
한량이여
아 취나물 안 살 겨? -‘개심사에서’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