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가 올 여름 극장가를 달구고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이무기는 전설상의 동물이다. 어떤 저주에 의하여 용이 되지 못하고 물속에 산다는 큰 구렁이를 이른다. 한강발원지인 검룡소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이무기는 용이 되려고 기다리면서 인근의 가축들을 잡아먹다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무기라고 하면 단순히 용이 되려고 기다리는 구렁이라기보다는 끝내 용이 되지 못하고 구렁이로 머물러 버리고 마는 상태로 묘사된다. 흔히 성공의 문턱에서 좌절하는 경우를 두고서 이무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디워’에서는 착한 이무기와 악한 이무기로 대립각을 세워 서로 승천하기 위한 갈등의 관계를 전개시킨다. 선하거나 악한 이무기에게는 각각 도움을 주는 존재가 있다. 남녀 주인공과 부라퀴가 그것이다. 이들이 서로 쫓고 쫓기는 과정에서 화려한 CG의 영상들이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런데 여자 주인공의 상징성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 여자는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이무기가 승천할 때 꼭 필요한 여의주 그 자체이다. 여의주가 완전히 형성될 때 선과 악은 정체를 드러낸다. 그녀에게는 또 하나의 상징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의 현신이다. 결국 그녀는 선의 승리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지만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자신은 보다 많은 중생들을 구원할 수 있는 보살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녀에게 자신의 희생에 앞서 한 치의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을 보호해주는 남자 주인공에게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그녀의 보호자이면서 동시에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녀가 가는 길을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된다. 남녀가 사랑하는 일이 어찌 저주가 될 수 있을까만 현상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일들이 허다히 일어나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녀는 한 남자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과 숙명적으로 주어진 초인간적인 희생의 갈림길에서 결국 그 남자를 따르는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몇 백 년에 걸쳐 다시 거듭되는 윤회를 면치 못하게 되고, 용의 승천은 미루어져야 했으며, 중생구제의 세계도 요원하게 된다. 결국 그녀의 희생을 위해서는 또 다른 희생을 요구하는 바,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의 희생이다. 그의 사랑이 바로 ‘디워’를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그 남자와 여자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임으로써 선과 악의 대립각에 종지부를 찍고, 널리 중생구제를 서원하는 보살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남녀 주인공의 초월적 사랑은 용의 승천으로 대변되는 더 높은 이상과 보살의 화현으로 표현되는 중생구제의 실현을 이루게 한다.
사실 이 영화가 불교적 세계관만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불교의 포교를 위한 종교적인 영화도 결코 아니다. 변신술과 같은 초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도교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며, 전설을 차용한 것이나 부적을 벽에 붙이는 것은 민간신앙적 세계관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기독교가 널리 퍼져있는 서양으로 그 무대를 옮겨 선과 악의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기독교적 사고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종교적 요소들을 영화의 곳곳에 장치함으로써 이 영화가 반드시 하나의 종교적 색채만을 주장하고자 함이 아니라 이야기가 전개되는 그 시대적 문화와 배경을 염두에 두고서 어느 특정 사상이나 이념을 주장하기 보다는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사랑과 희생, 그리고 초월적 이상과 그 실현을 드러내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영화가 갖는 홍보 파급력은 매우 크다. 소위 뜬 영화의 경우 배우들의 말 한마디와 일거수 일투족이 다 마케팅의 귀한 자료가 된다. ‘디워’에 나타나는 종교성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화가 윤회를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모든 관객에게 윤회를 공부 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최근 불교문학과 영상문화의 관계를 탐색하는 심포지엄도 있었다고 한다. 불교영화의 전성기가 한번쯤 와 줄 날은 언제일까? 기다려진다.
이상호 건설교통인재개발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