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고 한다. 서양 문화의 2대 조류 가운데 하나인 헬레니즘에서는 원환적(圓環的)으로 보는 반면 또 하나의 조류인 헤브라이즘에서는 직선적이라고 본다.
불교에서는 시간을 어떻게 볼까? 불교의 시간론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시간의 직선론과 유사하다. 직선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하는 것이며, 계량할 수 있다는 의미다. 불교에는 찰나(刹那)로부터 시작해서 겁(劫)에 이르는 아주 정교한 시간 단위가 있다.
반면에 윤회사상은 원환론적이다. 생명이란 업에 따라 여러 가지 세계에 태어나며, 해탈해서 부처가 되지 않는 한 여러 세계를 빙빙 돈다. 불교의 현실이란 이 돌고 도는 윤회 가운데 그 존재가 현재 처해 있는 위치, 현재 있는 시간을 말한다. 즉 시간을 끊어낸 자리가 현재다. 그 끊어낸 자리에 해당하는 ‘현재’만을 불교에서는 문제로 삼는다. 이 현재란 업이 무르익어서 만들어진 현재다. 이 현재를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과거의 업을 청산하거나 덧쌓기도 하고, 미래의 업을 새로이 만들어가기도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의지작용이다. 업이란 의지작용에 따라 지어가기 때문이다.
유대인인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에는 헤브라이즘적 시간 개념이 들어 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생애를 직선으로 늘어놓고 중요한 심리성적인 변화 시기별로 단위를 끊었다. 인간이란 일련의 심리성욕단계를 거쳐 발달해 가며 다섯 가지의 보편적인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구강기(the oral stage: 생후 1세까지), 항문기(the anal stage: 2-3세), 남근기(the phallic: 4-5세), 잠복기(the latency period: 6, 7세-12, 13세), 생식기(the enital stage:13, 13세)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기가 출생 후 5년까지, 즉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까지의 어린 시절이다. 이때 겪은 심리성적인 사건들이 한 인간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한다고 한다. 이때까지 성격의 기본 골격이 형성되고 그 후는 마무리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인간관을 결정론적이며 비관적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프로이트에게도 원환론적인 개념이 있다. 즉 정신분석을 통하여 어린 시절에 결정된 성격의 변화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변화 역시 핵심 구조는 그대로 있고 표면만이 변화한다고 한다. 즉 약간의 합리성과 약간의 선택의 자유만을 인정할 뿐이다.
정신분석은 인간의 한 생애만을 대상으로 하여 그 안에 갇혀 뱅뱅 돈다. 이에 비하면 불교는 현실을 철저히 파악해 과거와 미래를 뛰어 넘어 마침내 해탈할 것을 추구한다. 직선적, 원환적 시간 둘 다를 완전히 초월하여 대자유를 얻는 것이다.
■불교상담개발원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