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번뇌가 떨어진 고요한 마음자리인 부처님의 세상은 참으로 부처님만이 알 수 있고, 순수한 깨달음이므로 오직 깨달은 조사 스님만이 알 수 있다. 중생의 알음알이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도 이 자리를 어떤 경계로서 안다고 말씀하시면 그 순간 중생의 알음알이에 떨어지게 된다. <선가귀감> 81장에서 말한다.
神光不昧 萬古徽猷 入此門來 莫存知解.
신령한 빛 밝은 광명 영원토록 빛이 나니 이 문 안에 들어와서 알음알이 두지 말라.
신광(神光)은 자신의 모든 번뇌가 사라진 고요한 부처님의 마음자리에서 일어나는 본지풍광(本地風光)이니, 이 빛은 신령한 빛으로서 어둡지 않은 밝은 광명이다. 만고(萬古)는 만고천추(萬古千秋)를 말하니 신령스런 밝은 광명이 그 끝이 없이 아주 오랜 세월 영원토록 빛난다는 것이고, 휘유(徽猷)는 신령스런 밝은 광명이 훌륭한 가르침이나 아름다운 도리로서 환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중생의 세계를 벗어나 이 문 안으로 들어서면 부처님 세상이 되는데, 이곳은 중생들의 모든 알음알이가 사라지는 곳이다. 여기서 알음알이를 일으키면 다시 중생계로 돌아가기 때문에, 선사들은 여기에서 다시 중생들의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고 한다. 이 내용을 풀이하여 서산 스님은 말한다.
神光不昧者 結上昭昭靈靈也 萬古徽猷者 結上本不生滅也 莫存知解者 結上不可守名生解也 門者 有凡聖出入義 如荷澤所謂 知之一字 衆妙之門也.
‘신령한 빛 밝은 광명’은 이 책의 첫머리에 있는 “밝고 밝아 신령스러워서”라고 한 말을 매듭짓는 것이고, ‘영원토록 빛이 나니’는 “본디 생겨난 적도 없었고 없어진 적도 없었으니”라고 한 말을 매듭짓는 것이며, ‘알음알이 두지 말라’는 “이름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서는 안 된다.”라고 한 말을 매듭짓는 것이다. ‘문(門)’이란 ‘범부와 성인이 드나든다’는 뜻이 있으니, 이는 마치 하택 스님이 “앎[知]이란 한 글자가 묘한 온갖 이치를 드러내는 문이다”라고 말하는 뜻과 같다.
<선가귀감> 1장에서 “여기에 ‘그 무엇’이 있는데, 본디 밝고 밝아 신령스러워서 일찍이 생겨난 적도 없고 없어진 적도 없었으니,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모양을 그릴 수도 없느니라[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 不曾滅 名不得 狀不得]”고 하였다. 여기에서 ‘그 무엇’은 ‘부처님의 세상’을 말한다. 중생의 언어로써 무어라 말할 수 있는 마땅한 표현이 없기에 억지로 갖다 붙인 ‘그 무엇’이란 부처님의 세상은 어둡지 않아 밝고 밝아 신령스러우므로 ‘신령한 빛 밝은 광명’이라고 하니 ‘신광불매(神光不昧)’라고 한다. ‘신령한 빛 밝은 광명’은 본디 생겨난 적도 없었고 없어진 적도 없었으므로 그 모습 그 자체로 영원토록 빛이 나고 있는 아름다운 가르침이니 만고휘유(萬古徽猷)이다. 이 자리는 중생의 알음알이가 모두 끊어진 곳이다. 영원히 변치 않고 빛나는 ‘그 무엇’이 중생의 인연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지만 그 모습에 붙인 이름이나 형상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선가귀감> 4장에서 이것을 “온갖 이름을 억지로 갖다 붙여서 혹 마음이라 하고 혹 부처님이라 하며 혹 중생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름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서는 안 된다. 그 밑바탕에서는 모든 것이 옳지만 여기서 한 생각 움직이면 근본 뜻에 어긋나느니라[强立種種名字 或心或佛或衆生 不可守名而生解 當體便是 動念卽乖]”고 표현한다.
起於名狀不得 結於莫存知解 一篇葛藤 一句都破也. 然 始終一解 中擧萬行 如世典之三義也. 知解二字 佛法之大害故 特擧而終之 荷澤神會禪師 不得爲曹溪嫡子 以此也. 因而頌曰.
아! “이름도 없었고 모양도 없었느니라.”고 하는 데서 시작하여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으니 중생에게 한데 얽혀 있는 모든 시비와 갈등을 한마디 말로 모조리 타파하여 버렸다. 그러나 처음과 끝에서 ‘한 가지 앎’이라고 말하고 있으면서 그 가운데 ‘온갖 수행’을 들어 보이고 있는 것이, 마치 세속의 고전인 <중용(中庸)>이 ‘하나의 이치’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여 중간에서 ‘온갖 일들’을 이야기 하다 마지막에 다시 ‘하나의 이치’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其書始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 이런 ‘알음알이’란 올바른 불법을 깨치는 데 커다란 해악이 되기에 특별히 그 내용을 들어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하택 스님이 조계의 맏아들이 되지 못한 것도 이 알음알이 때문이었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선가귀감>을 저술하고 있으면서도 서산 스님은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고 한다. 이는 하택 신회(荷澤神會)가 “앎[知]이란 한 글자가 묘한 온갖 이치를 드러내는 문이다[知之一字 衆妙之門]”라고 하였지만 황룡 사심(黃龍死心)은 “앎[知]이란 한 글자가 온갖 재앙을 불러오는 문이다[知之一字 衆禍之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우리의 ‘앎’이 부처님의 영역에 있을 때는 신령한 빛 밝은 광명으로서 온갖 신통 작용이 나오게 되나, 중생의 영역에 있다면 아는 경계 하나하나가 모두 알음알이로서 번뇌덩어리라는 의미이다. 이 ‘앎’이 부처님의 영역에 있으면 모든 중생을 살리는 활(活)이 되지만 아니라면 모든 중생을 죽이는 살(殺)이 된다.
육조 스님이 “나에게 ‘그 무엇’이 있는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니 그대들이 알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요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라고 대답하였던 하택 신회는 육조 스님의 법을 이어받지 못했다. 이는 중생의 알음알이로 대답하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선가귀감>에서 온갖 예로 선가의 종지를 밝히고 있지만 이것이 중생의 알음알이로 풀이하고 있다면 눈 푸른 달마 스님을 조롱하는 짓이다. 서산 스님은 게송으로 말한다.
如斯擧唱明宗旨 笑殺西來碧眼僧. 然 畢竟如何. 孤輪獨照 江山靜 自笑一聲 天地驚.
이처럼 온갖 예를 들어 종지를 밝혔으나 이는 눈 푸른 달마 스님을 조롱하는 짓이로다.
그렇다면 끝내는 어떻게 할 것이냐?
아! 휘영청 달이 밝아 강산이 고요한데 저절로 터지는 웃음소리! 천지가 놀라도다.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