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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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없는 기둥이 하늘을 받칠 수 있어야!
(지난 호에 이어서)
전자의 대덕 스님네들의 말씀을 응용한다면 예전에 덕산(德山) 스님 얘기를 귀가 아프도록 들으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느냐? 설봉(雪峰) 스님은 제자로서 공양주를 하셨고, 암두(巖頭) 스님은 대중을 이끄는 분이었고 또 덕산 스님은 조실로서 계셨는데 아, 사시마지가 지나도 종을 울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종을 울리지 않고 하니 바리때를 들고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얘기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앞서 얘기를 다 들으셨을 테니까.
덕산 스님은 바리때를 들고서 오온(五蘊)의 법계(法界)를 위로나 아래로나, 일체제불과 중생이 다 같이 공양하고 그릇을 비워가지고 막 돌아서는데 어린아이가 소리를 질렀단 말입니다. 무슨 소릴 질렀느냐 하면 “늙은이가 종도 안 울리고, 북도 안 치고, 목탁도 안 쳤는데 바리때를 들고 어슬렁거리느냐.” 이러거든요. 얼마나 눈이 멀었으면 오고 가는 그 그림자만 보고 말을 했느냐 이겁니다.
그런데 설봉 스님은 또 암두 스님한테 ‘저 늙은이가, 그렇게 악을 쓰니깐, 그냥 고개를 푹 수그리고 그냥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니까, 빽! 악을 쓰면서 하는 소리가 말입니다, ‘아, 말후구(末後句)를 몰랐구나!’ 그 늙은이가 말후구를 몰라서 그랬구나! 이랬으니 얼마나…. 이것은 한쪽에서는 눈이 멀고 한쪽에서는 귀가 뜨이지 않았어. 그 소릴 듣고 그렇게 하질 말았어야지, 지혜가 있다면. 귀는 띄었으나 귀가 띄지 못했어. 눈은 떴으나 눈이 뜨이지 못했어.
내가 생각하는 것은 역시 그것을 화두 삼아서, 사구를 화두로 삼아서 그렇게 한 것은 방편으로 잘 하셨다고 보는데, 그래도 효자가 그것을 함정에 빠진 걸 건졌다고 했으니 이거는 대덕을 너무나 자기네들이 함정에 빠트리고 자기네들이 마음대로 건지고 농락을 했다 이 소립니다. 얼마나 농락을 했습니까?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그래서 말을 하게 돼 있는 거는 예전에 대덕 스님들이 말씀하시기를 “야, 지금 네가 덕산 스님이라면 설봉이 그렇게 했을 때에 너는 뭐라고 대답을 했을 거냐? 요거 한 가지를 일러봐라.” 이렇게 했을 거고, 또 한 가지는 “암두 스님이 말후구를 몰랐구나 하는 거를 또 한 가지를 일러봐라” 했을 거고, 그게 천칠백 공안(千七百公案)에 다 들어 있다, 이 소리겠죠. 그거는 의당 다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거라고 생각을 할 때에 천칠백 공안만 되겠습니까? 모두가 화두고, 모두가 공안 아닌 게 없는데 말입니다. 천이라는 거는 천지를 말하고, 칠백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들 사는 이 자체를 보고 칠백이라고 했을 거라고 저는 뜻을 보고 생각합니다. 왜? 예전에도 삼혼칠백(三魂七魄)이라고 그러죠, 죽었을 때도.
그건 그렇고, 또 “암두 스님 들어오라고 해라. 이놈이 그래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생각할 때입니다. 그래도 공부 좀 했다는 놈이, 이렇게 할 수가 있나 하고 들어오라고 했더니, 들어와서는 귀에다 대고 소근소근하니까는, 그냥 끄덕거리고 그만뒀단 말입니다. 그건 또 뭐며, 또 그 이튿날 설법하시는데 예전보다도 더 쩡쩡하게 설법을 하시고선, “삼년만 있으면 내가 죽노라.” 했다니 그 삼년은 어디에다 둔 말씀이냐, 이걸 일러라.
이래서 우리가 천칠백 공안 속에 들어있는 이 자체를 다 ‘말없이 이를 수도 있고, 말을 하고 대답을 할 수도 있고, 말을 하면서도 대답 없이 대답을 할 수도 있는 그 공안의 이치를 알라.’ 하는 것을 내놓은 것인데, 아, 그렇게 설법을 하시는데도 또 암두 스님은 “야! 우리 스님이 이제는 말후구를 알았구나!” 그러고선 손바닥을 쳤다니 말입니다. 내가 이것이 벌써 서른 안짝에 들은 소립니다만 참, 이 모두가 생각을 어떻게….
달마 대사께서도 육조 대사께서도 혜가 대사께서도, 어느 스님 쳐놓고 대덕이신 스님들은 면벽 안 하신 분이 없어요. 무슨 면벽을 했다고 해서 꼭 어디 죽치고 앉아있는 것만은 아니에요. 오줌 누고, 밥 먹고, 똥 싸고 허허, 움죽거리면서 움죽거리지 않고 면벽을 했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 우리 한생각이 무르익어서, 즉 말하자면 여러분이 나무라면 제 나무에서 제 열매가 열려서 그 열매가 무르익는다면 만 가지 맛이 날 수 있고 만 가지 열매를 열리게 할 수도 있고, 만 가지 맛이 날 수도 있는가 하면 만 가지 맛이 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제 나무에서 무르익지 않은 열매라면 한 가지 맛이나 낼지 말지 그렇죠. 한 가지 맛을 내가지곤 아니 돼. 이 천칠백 공안도 한 가지, 두 가지 그것 좀 알아가지고선 대답해 봤자야, 그거는.
정말 뿌리 없는 기둥이 하늘을 받칠 수 있어야 되는 거고, 또 뿌리 없는 기둥을 자루 없는 도끼로 다듬어서 받칠 수 있어야 되지 않는가? 그래야만이 발 없는 발이 두루 할 거고, 손 없는 손이 두루할 거고, 말이 많아도 말 한마디도 아니 하고도 한마음으로 돌아갈 것이고…. 지금 이 시점에서 돌아가는데도 그렇게 무수히, 무시무시하게끔 땅 속이나, 물속이나, 들이나, 허공이나 도대체 이 실체 없는 생명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우리는 그래도 생명이기 때문에 제재하고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몰라서 이 집을 비워 놓는다면 누가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해도 도대체 이거는 가늠을 할 수가 없어서 여러분은 몸을 망가뜨릴 수 있고, 그 속에 들어가서 난리를 치면 그 속에 들어간 놈이 주인이 돼서, 온통 괜히 신경질 나게 하고 말이야, 괜히 차분한 사람을 그냥 신경질나게 하고, 막 그냥 달아나가게 만들고, 그냥 답답하게 해서 나가서 바람 쐬게 만들고…. 이렇게 하는 것도 다 자기 마음이 아니에요, 이게. 자기 집을 비워놓았기 때문에 딴 놈이 들어와서 자꾸 그런 짓을 하는 거니 그걸 알고 절대 그러지 말라 이거야. 속지 말고. 그러나 ‘주인공! 만 놈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한 놈이니까.’ 하고선 용광로에다 넣는다면 거긴 그냥 한 놈밖에 없어. 그 한 놈도 여러 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기 때문에 한 놈도 한 놈이란 말을 못하리만큼 돼 있지만 말야.
그러니 내 몸을 건강하게 끌고 다니는 것도 거기에 달려 있어. 내가 가난을 면하는 것도 거기에 달려 있고, 화목을 가져오는 것도 거기에 달려 있고, 행복을 가져오는 것도 거기에 달려 있고, 자손들을 잘 두는 것도 거기에 달려 있어.
젊은이들 중 아직 어린애를 낳지 않은 사람들은 이 소릴 잘 듣고 잘 해야 돼. 낳기만 하면 자식인가? 자식이 아니지. 인과 업으로 인해서 원수로 만났다면 질그렁질그렁, 만날 화목하지 못하고 이거는 이익은커녕 오히려 손해가 나고 복장을 쳐야 옳으니 말이야. 내가 여러분을 만나면서 한두 건 본 것이 아니에요. 한 집에 그러니까는 불구가 셋씩, 넷씩 되는 집도 있어요. 다섯 식구가 사는데 한 사람만 남겨놓고 불치의 병을 넷이 다 앓고 있어요. 너무 가혹하지 않아요, 이거? 그리고 어떠한 공직에서도 도대체 승진이 되질 않아, 자식이 그러니까. 그러면 이게 뭡니까. 이게 다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이 공부하는 데는 스님네가 따로 없고 속인이 따로 없고, 여자가 따로 없고 남자가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 없고 중생이 따로 없어. 여러분이 부처라고 하지만 속의 중생들이 운행을 해줘야 부처가 있지. 자기 부처를 자기가 형성시켰으니 자기는 운행을 해줘야만이 그 부처가 자기와 더불어 같이 벗어날 수 있으니깐 말이야. 같은 배를 타고 지금 운행을 하고 있죠. 여러분 몸 하나하나가 별성일 수도 있고 혹성일 수도 있고 배일 수도 있어. 한시도 몸뚱이는 쉬지 않고, 배는 쉬어 놓고도 자기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밤이면 기껏 돌아다니다가 다시 저희 집으로 들어와서는 또 움죽거리고.
그러니까 자나 깨나 숨을 쉬고 있으니 시공이 없이 일초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이 소립니다. 우리는 과거로 지나간 걸 배우는 게 아닙니다. 그걸 거름 삼아서 내가 깨친다면 부처님의 그 높은 뜻은 내 몸을 갈아서, 정말이지 내 몸을 갈아서 실을 꼬아 짚신을 만들어서 부처님한테 바쳐도 거기에 다 못 미칩니다. 그러나 그것을 거름 삼아서 내가 만약에 깨친다면 그 부처님과 진짜 둘이 아니요, 진짜 선배 후배가 아닌 바로 그분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이런 말이 있죠. 만 가지 골짜기에서 한 강으로 물줄기가 다 흘러드는데, 똥물이든 구정물이든 핏물이든 깨끗한 물이든 다 모여서 여여하게 마다하지 않고 흐르더라. 그런데 거기에서 고기와 용은 그저 들락날락 자유스럽게 놀고 있더라. 그것은 어떠한 연고인가? 한번 일러보시렵니까?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들락거리고 자유스런 그 용은 오백 비구를 다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서 석존마저 죽였노라. 이것은 또 무슨 연고냐? 대답해 보실 분 있으면 대답해 보십시오.
예전엔 천칠백 공안이 아니더라도 그런 일이 많았죠. 어느 스님께서 조용히 산등성이의 돌 위에 가서 떠억 앉아있으려니까 어느 노승이 지나가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여보게 자네, 앉을 때가 옳은가, 앉았다 일어날 때가 옳은가?” 하더랍니다. 그러니깐 “앉고 서고 그런 게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하니까 “허허, 그래! 그러면 솥에 넣어서 푹 삶은 자갈은 물렀겠지?” 하거든. ‘솥에 넣어서 푹 삶은 자갈은 익었겠지.’ 도대체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경이라는 경은 다 봐도 그런 문구가 없어. 그 스님을 찾으려고, 경을 다 버리고 찾으려고 애써도 이름도 성도 묻지 않은 것도 실책이고, 그 스님을 찾으려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마을에 들어섰는데 동짓날이 됐더랍니다. 동지가 됐는데 마당에다 큰 솥을 걸어놓고선 팥죽을 쑤고 있거든. 팥죽을 쑤면서 큰 주걱으로다가 휘휘 젓거든. 그런데 그 팥죽이 벌렁벌렁 끓는 걸 보고서 그때서야 ‘아이구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무릎을 탁 치면서 ‘스님 찾았습니다, 스님!’ 이랬답니다. 그러니 거기서 그 소리를, 그 대답을 못한 스님이나 그 말씀을 하고 간 스님이나 둘이겠습니까? 무슨 까닭에 그걸 보고서 (손바닥으로 법상을 쳐 보이시면서) “아이구, 찾았군!” 했는가 말입니다. 그 팥죽 끓는 걸 보고서 그 솥 안의 돌이 말랑말랑한 걸 알았겠느냐 이 소립니다.
천칠백 공안이라고 하더라도 이 삼천대천세계 어느 것이 화두 아닌 게 없고, 어느 것이 법 아닌 게 없고, 우리 생활 자체가 그대로 공안 아닌 게 없고, 참선 아닌 게 없으니 여러분이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똑바로 일러줬는데도 불구하고 얼마 가다보니까 단전이다 명상이다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딴 데로 나가고 있어, 기껏 가르쳐봐도.
본래 이 세상에 여러분이 “응아!” 하고 나왔으면 그게 칼이 될 수도 있는가 하면 화두입니다. 어느 어린애든지 나올 때 “응아” 하고 소리 안 지르고 나오는 애가 없어. 그리고 물주머니에서 안 나오는 애가 없고. 내가 있다는 겁니다, 있다는 거야! 그럼 갈아야지! 그게 화두라. 내가 난 게 화두고, 바로 우리가 이렇게 움죽거리고 생활하는 것이 참선이야. 일분일초도 끊어지지 않는 참선! 숨 들이쉬고 내쉬고 이러는 게 참선이야, 그냥. 숨 들이쉬고 내쉬는 데서, 그 한 구멍으로 들고 한 구멍에서 나니 두드러지지도 않고 줄지도 않더라.
여러분은 날더러 “스님은 경전에 있는 심오한 뜻은 얘기 안 하고, 왜 이렇게 만날 저런 얘기만 할까?” 하고 그러시겠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다면, “솥 안에 넣고 그 솥 안의 자갈은 말랑말랑하게 익었겠지?” 한 거는 뭐며 팥죽을 쑤는 걸 보고선 (법상을 치시며) “아이쿠, 이제는 익었구나!”, 돌이 익었다 이거야. 돌이 그랬다는 소리는 무슨 소리냐 이겁니다.
여러분이 몸은 살려놓고 저승에 가서 죽은 사람을 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몸을 살려놓고 미지의 저승세계에 가서 죽은 사람을 보고 얘길 하고 죽은 사람들이 사는 도리를 다 알고서야 산 사람을 똑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똑바로 행할 수 있고, 똑바로 자비를 베풀어 에너지를 공급할 수가 있는 겁니다. 자기를 자기가 모르고서야 어찌 공급을 할 수가 있으며, 길을 인도할 수 있으며 또는 여러분의 눈을 띄울 수가 있겠습니까? 밥은 내가 대신 먹어줄 수 없지만, 그 밥을 먹게끔 할 수 있는 길잡이로서, 자기가 해 먹어 봐야 해 먹을 수 있다고 말을 하고, 해 먹을 수 있는 물리를 틔어주게끔 해줄 수 있지요. 그렇게 같이 마음을 내줄 수 있는, 하나가 돼줄 수 있는 그러한 에너지, 광력·전력·자력 이런 게 다 동시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에 오시는 분들은 그냥 얘기만 듣고 가려고 하지 마세요. 얘기만 하려고 그러면 뭐, 만담하는 식이게요. 그건 소용없는 거라. 어느만큼 얘기하는 사람이 얘기하면서도 함이 없이 하느냐? 그만큼 둘이 아니게 할 수 있겠느냐? 그만큼 자비를 베풀 수 있겠느냐? 그만큼 네 아픔과 둘이 아니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내 몸과 같이 생각할 수 있겠느냐? 이것이 거기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우스운 얘기 한마디 하고 그만 그치겠습니다. 산 사람 앞에서는 절을 한 번을 하고요, 죽은 사람 앞에는 두 번을 하고 부처님한테는 세 번을, 삼배를 올립니다. 내가 이 소리를 왜 하느냐 하면 물리가 터지고 지혜가 있으면 반드시 거기에서는 자기란 놈이 일할 때마다 착착 나와서 부(父)와 자(子)가 둘이 아니게 돼. 그렇기 때문에 행도 같이 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로.
어느 시골 선비가 대원군한테 찾아갔대요. 찾아갈 때는 꼭 뭐나 할까 하고 간 거는 아니에요. 가서 며칠을 기다려서 뵈었거든요. 그런데 들어가서 절을 하는데 말입니다, 본척만척한단 말입니다. 절을 하는 걸 봐야 될 텐데 본척만척하고 본 둥 만 둥 했거든. 그래서 또 한 번 했지요. 아, 그랬더니 그냥 야단법석이 난 겁니다. “저놈이 산 사람한테 절을 하지 않고 죽은 사람한테 하듯이 절을 두 번씩이나 했다. 저놈 잡아 족치라.”라고 하니까 “어이휴!” 그 시골 선비가 웃으면서 하는 소립니다.
이 소릴 왜 하는 줄 아십니까? 허허허. 좀 늠름하고, 지혜 있고, 좀 더 인내가 있고 탄평(坦平)해야 돼요. 아주 복잡다단하면 안 되죠, 느긋하고. “아이, 왜 그렇게 급하십니까? 하도 바쁘시다고 그래서, 내가 한 번 절을 하고 또 재차 절을 한 까닭은 앞서는 들어온 절이고 이건 나갈 절인데, 헤헤헤. 그런데 어찌 그렇게 성미가 급해서 그러십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그 일을 그렇게 하십니까?”
대원군이 가만히 생각하니 냅다 그냥 (손바닥을 서로 부딪쳐 보이시고) 맞았단 말입니다. 한 방 얻어걸렸단 말이야. “아, 그렇게 급하신 양반이 어떻게 그렇게 나라 일을 하십니까?” 했거든, 시골 선비가.
그러면서 싱그레 웃고선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나가려고 그러는데 대원군이 한 대 얻어맞고는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거든. 하인더러 “저 사람 불러들여라.” 불러들였거든, 허허허. “너 이놈! 내가 번연히 다 아는데, 내가 보지 않았을까 하고 한 번 하고 또 한 번 한 거는 분명한데, 네놈이 너무 침착하고 대담한 걸로 봐서 한번 할 놈이야. 그러니 원으로 가서 자비를 베풀면서 앞으로 군사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그러한 훈련대장을 해라.” 했답니다.
그래서 절 두 번 하고 참, 글쎄 보지 않았는데도 그만했으면 그대로 그만이지만, 두 번을 했어도 두 번 했다는 걸 그렇게 변명을 했기에 망정이지, 그거 늠름하게 그렇게 대번에 그런 대답 못합니다. 어렵지 않겠습니까. 호통을 치고 있는데 그 소리가 그렇게 웃으면서 나옵니까, 여간한 사람 쳐놓고는. 그러니 얼마나 그 지혜가 풍부하고 참 늠름합니까, 아무리 시골 선비라 할지라도.
여러분이 여자든 남자든 하여튼 모습으로 태어난 거는 태어났으니깐 그 모습 그대로 행은 하지마는, 좀 더 늠름하게…. 아, 마음이야 뭐 여자 남자가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모습은 여자 남자가 있을지언정. 그러니 그저 늠름하게 태연하게 아주 마음을 탁 가라앉히고 이 공부를 해야죠, 공부랄 것도 없지만. 아뇨, 공부라고 하기는 오히려 참, 보잘것없는 이름 같아요.
그러니까 내 마음을 기르는 데 조금도 쉬지 않고, 부처님을 볼 때는 부처님과 둘이 아니요, 형상도 나하고 둘이 아니요, 마음도 나하고 둘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또 어디를 가서 책을 보더라도 어떤 놈이 이 책을 보는가? ‘주인공아!’ 불러놓고 경을 보되 ‘네가 보는구나!’ 하고선 보라고요. 그래야지 만약에 그것을 보고서는 그냥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저승에 가기 전에 그냥 가는 도중에 그런다면 저승엔 못 들어가요. 문이 막혀서 못 들어가요. 그 마음이 막혀서 못 들어간다고요.
오늘은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2007-09-05 오전 11: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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