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와 전법제자인 혜가(二祖慧可 487~593)와의 선문답이다.
달마 대사에게 혜가가 물었다.
“부처님의 법인을 들려주십시오.”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 들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네.”
혜가가 다시 물었다. “제 마음은 편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제발 제 마음을 진정시켜 주십시오.”
“그래,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러면 내 편안케 해 주지.”
“마음을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
“네 마음에 이미 진정한 평화를 주었네.”
(<선문염송> 제3권, 100칙 ‘법인’)
이것이 우리의 사유를 끝없이 비상시켜 고독하게 하고 동시에 황홀하게 하는 현제 조사선의 전등, 그 시작이다.
이 선화를 살펴보면, 제1조 보리달마 2조 혜가로 이어지는 부정적이며 역설적인 선문답의 전형이 된다.
혜가가 애써 찾고자 한 마음은 자성인 참마음(眞心)이 아니라, 수초와 같이 일렁이는 진심의 응용인 마음인 것이다.
바깥 경계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는 깜박이는 마음을 찾은 것이다. 자성인 진심은 늘 고요하며 어디든지 그대로 있다. 진심의 변화는 없다.
이 참마음은 생각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각 그 자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체 그 자신이다. 그래서 이것을 찾고자 한다든가 어떻게 하고자 하면 이미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 변화하므로 참마음일 수 없다.
그래서 진심이 진체(眞體)다. 곧 마음은 없다. 그래서 “마음을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습니다”(覓心了不可得)라고 한 대답에서 이미 혜가는 자기도 모르는 순간 마음을 찾는 행위를 하고 있다 할 것이다.
바깥 경계에 흔들리는 마음으로 참 마음인 자성을 찾았음이 아니라, 자성과 영회된 순수진공 상태의 행위로 다음에 이어지는 “네 마음에 이미 진정한 평화를 주었네”(與汝安心竟)하는 달마의 말을 듣는 순간, 줄탁동시( 啄同時)가 되어 활연돈오(豁然頓悟)한다.
위의 선화에 대하여 뒷날 한 선장이 읊은 게송을 읽어보자.
2조가 소림에 서 있던 날
二祖當年立小林
뜰에는 눈이 쌓여 허리에 닿았었네
滿庭積雪到腰深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아무 일도 없었
으니
叉手當胸無一事
구하지도 찾지도 않고 마음마저 편치
않았네
不求不覓不安心 -죽암규
위의 게송에서 3행은 ‘아무 일 없었다, 아무 일 없었다’를 연발하고 있다. 무슨 일이 있었으면 어떻게 하나 가슴 졸인다. 특별한 일이란 바로 평상심에서 벗어난 마음의 작용이어서 진짜로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다음 4행 “구하지도 찾지도 않고 마음마저 편치 않았네”는 ‘반드시 구하였고, 찾았고 드디어 마음이 편하여졌다’의 역설적 반어법이다.
찾아서 마음이 편하여진 것은 본래 그대로 그 자리를 떠나 있지 않은 진여자성을 찾은 것일 뿐이다. 우리의 견해로는 ‘구하고 찾아야 다소 위안을 얻게 되니 마음이 편하다’로 읽혀지나 사실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고 찾으려야 찾을 수 없으며, 마음이 편해지려고 해도 편하지 않다’ 함은 바로 자성인 주체와 꼭 맞게 포개어 만난다(領會)는 뜻이다.
곧 일체의 진리를 안과 밖을 꿰뚫어 봄이니 이렇게 표현됨이 당연한 것 아닌가. 이 당착적인 모순적 어법은 선사들이 이원적인 상대세계에서 그들이 보았던 일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데 사용한 주된 선시의 모순적 수사법이다.
이들은 일상적인 것을 비틀고 돌이키고 융화시켜 다른 수승된 일원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곧 선시의 반상합도(反常合道)의 솜씨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데, 이것은 우리를 더 심원한 세계로 몰아넣기에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