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 스님이 운력 중에 호미로 밭을 매다가 황벽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는 괭이에 기대 서 있었다. 황벽 스님께서 “이 사람이 피로한가?” 하니, “괭이도 아직 들지 않았는데 피로 하다니요” 하였다. 황벽 스님이 후려치자, 임제 스님이 몽둥이를 받아 쥐고는 황벽 스님을 탁 밀쳐 넘어뜨렸다. 황벽 스님께서는 유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유나야! 나를 부축해 일으켜라.”
유나가 가까이 다가가 부축해 일으켜 드리면서 말했다. “큰스님, 이 미친놈의 무례한 짓을 그냥 두십니까?” 황벽 스님은 일어나면서 유나를 후려갈기니, 임제 스님은 괭이로 땅을 찍으면서 말하였다. “제방에서는 모두 화장하지만 여기 나는 한꺼번에 산 채로 파묻어 버린다.(<臨濟錄> 禪林古鏡叢書, 藏經閣 p129~130)
조동종(曹洞宗)의 원붕 선사 역시 당시 농선(農禪)의 풍광에 대해 “푸른 논두렁은 흩어져 물결에 부서지는데, 향기로운 햇볕은 떠돌아다니며 볏꽃을 살찌운다. 몸소 경작하는 가풍의 명성은 예부터 오래였고, 귀로에는 농요소리 떨어지는 햇빛 속에 흥겹다”라고 읊고 있다. 오가칠종의 농선 가풍은 뒷날 대혜종고에 의해 간화선이 제창된 이후 더욱 발전하게 된다. 간화선 자체가 언어문자로 선을 이해하려는 문자선(文字禪)과 아무 일 없음에 안주하려는 무사선(無事禪) 및 앉아 있음으로 깨달음을 삼는 묵조선( 默照禪)의 병폐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행주좌와의 일체 생활 가운데서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방법론에 입각해 있기 때문에 노동 가운데서 참구하는 활발발한 역동적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혜가 일찍이 경산총림(徑山叢林)에서 한편 ‘반야농원(般若農園)’을 경영하며 간화선(看話禪)으로 접화(接化)한 본보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간화선풍과 노동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간화선의 선농병수의 선풍은 이후 계속 이어져 원대(元代)에까지 전승되고 있다. 박산무이(博山無異)는 다음과 같이 묵조사선(默照邪禪)의 선병을 지적하고 생기발랄한 노동선을 강조하고 있다.
옛 선사는 복숭아를 따다가도 문득 선정에 들고, 호미로 밭을 매다가도 문득 선정에 들었으며, 절의 자잘한 일을 하면서도 선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한 곳에 오래 눌러앉아 바깥 인연을 끊고 마음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선정에 들었다고 하겠는가. 이 를 곧 삿된 정(邪定)이라고 하니, 이는 납자가 가져야 할 마음이 아니다.(<參禪警語> 禪林古鏡叢書, 藏經閣 p36)
사실 송대(宋代) 이후 선종이 중심이 되어 불교의 명맥을 이어오던 시절에는 거의 대부분이 노동생산에 의거해서 수행생활이 영위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농겸수의 가풍은 선문의 일상사가 되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 민국(民國)시대를 살다간 근대 중국 선의 중흥조라 일컫는 허운(虛雲) 역시 이러한 전통에 입각해서 농선과 노동선의 실천을 매우 강조하며 선풍 재진작에 진력하고 있다.
여러 스님들은 날마다 힘들게 장작을 패고 농사를 짓고, 흙을 돋우고 벽돌을 나르며 하루 종일 바쁘게 지내지만, 도를 깨치겠다는 굳은 의지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러한 도를 향한 지극한 마음은 정말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參禪要旨> 여시아문, p35)
그리고 허운은 또한 강조하기를 “물 길어 오고 나무 해 오는 일상사가 묘도(妙道) 아님이 없으니, 밭 매고 씨 뿌리는 것이 모두 선기(禪機)인 것입니다. 하루 종일 다리를 틀고 앉아야 비로소 공부하고 도를 닦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한국의 선종에도 그대로 전입되어 선문의 일상사로 정착되어졌던 것이다. 조선시대 산중에 은거한 선종만이 겨우 현사지맥(懸絲之脈)을 이어가게 되었을 때, 선종은 생존전략의 일환으로 산중에서 논밭을 개간하고 농사를 짓는 노동이 생활화되어 버렸다. 그야말로 억불(抑佛)의 현실 속에서 종교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농선(農禪)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특히 조선말에서 일제의 강점기를 살다간 용성(龍城)은 ‘반선반농(半禪半農)’의 선농불교(禪農佛敎)를 제창하게 되었다. 용성은 선농불교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기 생활에 힘으로 노동하고 남에게 의뢰하지 말 것”(<大覺敎儀式>권下, 十二覺文)을 주창하며, 선농당(禪農堂)과 화과원(華果院)을 건립하여 자급자족(自給自足)을 강조하고 있다.
아! 우리는 괭이 들고 호미 가지고 힘써 노농(勞農)하여 자작자급(自作自給)하고 타인을 의뢰치 말자. 여(余)는 차를 각오(覺悟)한 지가 이십년 전이나 세부득이(勢不得已) 하여 못하고 있다가 오육년전에 중국 길림성 옹성랍자 용산동에 수천일경(數千日耕) 토지를 매입하여 오교인(吾敎人)으로 자작자급케 하였으며 또 과농(果農)을 종사하여 오육년간을 노력중이다.(<中央行政에 對한 希望> 佛敎 93호, p15)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