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가에서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라’고 하였으니 나무로 만든 부처를 불살라 땔감으로 쓰고 아기 석가모니를 때려잡아 개밥으로 던져 주겠다고 한 선사가 나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사실 이 뜻은 부처나 조사에 대한 집착도 떨치라는 말이다. 공부가 무르익어 부처나 조사의 경계가 나타나더라도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그 경계마저 뛰어넘으라는 것이다. 그 경계에조차 ‘나’와 ‘부처’라는 미세한 탐욕이 깃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경계마저 없어져야 참 부처요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선가귀감> 80장에서 말한다.
大丈夫 見佛見祖如 家 若着佛求 被佛縛 若着祖求 被祖縛 有求皆苦 不如無事.
대장부라면 부처나 조사를 원수처럼 보아야 한다. 부처의 경계에 집착하여 구하는 것이 있으면 부처의 경계에 얽매이는 것이요 조사의 경계에 집착하여 구하는 것이 있으면 조사의 경계에 얽매이는 것이다. 구하는 것이 있다면 이는 모두 괴로움의 뿌리가 되는 것이니 아무런 애도 쓰지 않느니만 못하다.
<임제록>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도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도 죽여라”고 한다. 이상향을 추구하는 대상으로서 ‘부처나 조사라는 경계’까지도 얽매이지 않고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근기야말로 참된 부처요 바른 안목이 열린 대장부이다. ‘눈 푸른 납자’는 어떤 인연을 따르더라도 그 속에서 무심하게 모든 일을 성취해 내는 아름다운 성자의 삶을 만들어 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산 스님은 말한다.
佛祖如 者 結上無風起浪也 有求皆苦者 結上當體便是也 不如無事者 結上動念卽乖也. 到此 坐斷天下人舌頭 生死迅輪 庶幾停息也. 扶危定亂 如丹霞燒木佛 雲門喫狗子 老母不見佛 皆是 邪顯正底手段 然畢竟如何.
‘부처나 조사도 원수처럼 보라는 것’은 첫머리에서 말한 “바람 없는 큰 바다에 거친 풍파 일으킨 것”이라고 한 말을 매듭짓는 것이고,‘구하는 것이 있으면 이는 모두 괴로움’이라고 한 것은 “그 밑바탕에서는 모든 것이 옳다”라고 한 말을 매듭짓는 것이며, ‘아무런 애도 쓰지 않느니만 못하다’라는 것은 “한 생각 움직이면 근본 뜻에 어긋나느니라”고 한 말을 매듭짓는 것이다. 이 경계에 도달해야 앉아서도 천하 사람들의 혀끝을 다 끊고 생사의 빠른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다. 위급한 순간에 어지러운 경계를 정리한 이것은 마치 단하(739~824) 선사가 나무로 만든 부처를 불살라 버린 것과 같고, 운문 스님이 부처를 때려잡아 개밥으로나 던져 주겠다고 하는 것과 같으며, 노파가 문을 닫고 부처님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모든 것이 다 삿된 법을 꺾고 바른 법을 드러내는 수단이다. 그렇더라도 끝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부처나 조사도 원수처럼 보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부처와 조사들이 이 세상에 나오는 일도 깨달음의 근본자리에서 보면 바람 없는 큰 바다에 쓸데없이 거친 풍파를 일으키는 헛된 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구하는 것이 있으면 이는 모두 괴로움’이라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설해진 팔만사천법문이 깨달음에 다가가기 위한 임시방편인줄 모르고 그것에 얽매여 알음알이를 내고 그것이 옳은 법이라고 시비 분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비와 분별이 사라진 마음의 당체(當體) 그 밑바탕에서는 세상의 모든 법이 부처님 법으로서 같아지니 모든 것이 옳은 것이 된다. 이 당체(當體)를 벗어나 한 생각 움직이면 바로 근본 뜻에 어긋나니 ‘아무런 애도 쓰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 선사가 길을 가다 날이 저물어 혜림사라는 절에 묵게 되었다. 그때가 추운 겨울이라 방에 불을 피우고자 하였으나 나무가 없었다. 마침 나무로 만든 불상이 있기에 도끼로 쪼개 불을 때버렸다. 뒤늦게 이 일을 안 절 원주가 노발대발하자 단하는 부지깽이로 불타버린 재를 뒤적이며 “부처님 사리를 찾으려 한다”고 말하였다. “나무 불상에서 무슨 사리가 나온단 말이오?” 하니, “사리가 안 나올 바에야 그게 나무토막이지 무슨 부처님이겠소?”라고 말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것이 나무로 만든 부처를 불살라 버렸다는 ‘단하소목불(丹霞燒木佛)’인데 이 이야기는 <오등회원(五燈會元)> 5권에 나온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정반왕의 아들로 태어날 때 “하늘 위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天上天下唯我獨尊]”라고 말했다. 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해석을 하며 이 말을 찬탄했는데 운문 선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아기를 몽둥이로 때려잡아 개밥으로나 던져 주고 세상을 태평케 했겠다” 이 말을 전해들은 선지식들이 “아! 운문이야말로 나 홀로 존귀하다는 유아독존의 뜻을 잘 설명했구나. 과연 부처님의 제자답다”라고 칭찬하였다. 이것이 운문 스님이 부처를 때려잡아 개밥으로나 던져 주겠다고 하던 ‘운문끽구자(雲門喫狗子)’인데 이 이야기는 <선문염송(禪門拈頌)> 1권에 나온다.
부처님이 사위성을 방문하셨을 때 사람들이 물밀듯이 몰려나왔으나 성 동쪽에 살고 있던 한 노파는 부처님을 보지 않으려고 문을 닫고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자 노파의 열 손가락 끝에서 부처님이 뚜렷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이 문을 닫고 석가모니 부처님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는 ‘노모불견불(老母不見佛)’인데 이 이야기는 <오등회원(五燈會元)> 1권에 나온다.
노파의 손가락 끝에 나타난 부처님은 누구라도 저마다의 성품에 다 갖추어져 있는 ‘자성불(自性佛)’로서 참 부처님이다. 손가락 끝에서 부처님이 나타나는 까닭은 노파가 모든 집착을 벗어나 노파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경계가 참 부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참 부처가 아닌 형상으로 나타난 석가모니 몸에 집착하고 그가 한 말에 집착하여 참 부처를 보고 찾으려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것을 알고 있으므로 단하는 목불을 태우고 운문은 석가모니를 때려잡으며 노파는 석가모니를 보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모두 자신의 성품에 본디 갖추어져 있는 부처님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만 부처를 찾아 헤매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위한 자비심의 표출이다. 중생들의 잘못된 소견들을 깨뜨리고 올바른 앎을 드러내려는 방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서산 스님은 말한다.
常憶江南三月裡 啼處百花香.
언제나 저 강남 춘삼월이 그리우니
자고새 지저귀는 곳에 온갖 꽃향기.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