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시대 임제(?-867) 스님은 학인들을 맞이하여 그들의 공부를 점검할 때 큰 소리를 내지르는 ‘할(喝)’을 많이 쓰고 덕산(780-865) 스님은 주장자로 후려치는 ‘방(棒)’을 많이 사용하였다. 이 유명한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을 <벽암록>에서 “덕산 스님이 사정없이 내려치는 주장자의 모습은 마치 소나기 빗방울 쏟아지듯 하고, 임제 스님의 고함소리인 ‘할’은 천둥이나 벼락 치듯 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을 <선가귀감> 79장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臨濟喝 德山棒 皆徹證無生 透頂透底 大機大用 自在無方 全身出沒 全身擔荷 退守文殊普賢大人境界 然據實而論 此二師 亦不免偸心鬼子.
생멸이 없는 도리를 철저하게 증득하여 생사의 맨 꼭대기에서 맨 밑바닥까지 온갖 인연을 꿰뚫고 아우르면서 법을 쓰는 것이 거침없고 자유자재하여 일정한 법칙이 없는 것이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이다. 온몸으로 부처님의 법을 드러내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며 온몸으로 부처님의 세상을 책임지면서 문수와 보현의 경계를 지켜내기도 한다. 그렇더라도 사실대로 말하자면 임제와 덕산 또한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도깨비가 됨을 면치 못한다.
임제는 어려서 출가하여 경전을 보다가 황벽 선사 밑에 3년 동안 가 있을 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목주 스님이 “너는 왜 황벽 선사에게 불법의 참뜻을 묻지 않느냐?”고 하니, 그 말을 듣고 황벽을 찾아가 “불법의 참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갑자기 황벽은 주장자로 임제를 후려쳤다. 호되게 주장자를 맞고 내려온 임제는 목주의 권유로 다시 황벽을 찾아 불법의 참뜻을 물었지만, 이번에도 다짜고짜 주장자로 임제를 내려칠 뿐이었다. 목주의 간절한 권유로 그 다음날도 황벽을 찾아갔으나
또 주장자만 실컷 얻어맞고 말았다. 까닭도 모르고 매만 맞은 임제가 황벽과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떠나려고 하자, 황벽은 대우 스님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대우는 자신을 찾아온 임제에게 “황벽 선사께서 요즘 무슨 법문을 하시던가?”라고 물었다. 임제는 세 번이나 주장자로 얻어맞은 사실을 말하고 자신에게 무슨 허물이 있기에 그처럼 때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때 대우가 “황벽 스님께서 자네를 위하여 그처럼 애를 썼는데도 그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라고 하자, 이 말에 크게 깨친 임제는, “황벽의 불법이 별거 아니군” 하고 중얼거렸다. 대우가 “아까는 잘못이라 하더니 이제는 웬 큰소리인가?” 야단치니, 임제는 대우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이나 쥐어박았다.
그 뒤 임제는 황벽 스님에게 되돌아가 그의 법통을 잇고 가르침을 펴기 시작하면서 임제종의 종조가 되었다. 임제 스님이 학인들을 다룰 때는 깨달음의 근본 자리를 알게 하고자 ‘할’이란 방편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자는 스물둘이나 되었는데 그 가운데 신라의 지리산 화상도 있었다. 그 밑으로 19세(世) 되는 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고려의 나옹 왕사가 법을 받고, 석옥청공(石屋淸珙)에게서 태고 국사가 법을 받아 오니 그때부터 우리나라 불교는 임제종 법맥이 큰 줄기를 이루게 되었다.
덕산은 어려서 출가하여 경에 두루 밝았는데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그의 성씨와 함께 ‘주금강(周金剛)’이라고 불리었다. 하루는 도반들에게 말하기를 “경에서 보살행을 오랫동안 실천해야 성불한다고 말했는데 요즘 남방 스님들은 ‘바로 마음을 가리켜 단숨에 성불케 한다’라고 하니, 이들의 잘못을 바로 잡겠소” 하고 길을 떠났다. 가다가 점심을 먹으려고 어떤 떡집에 들어가니 떡을 파는 노파가 “걸망에 든 것이 무엇입니까?” 묻기에, 덕산은 “<금강경>을 풀이한 책들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노파가 다시 말하기를 “<금강경>에서 ‘지나간 마음도 찾아볼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찾아볼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점심을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말문이 막힌 덕산에게 노파는 용담의 숭신 선사를 찾아가라고 하였다. 용담사를 찾아 간 그는 “용담(龍潭)의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와서 보니 용도 없고 연못도 안 보이는군” 하고 큰소리를 쳤다. 그때 숭신이 나오면서 “자네는 참으로 용담에 왔네”라고 말하자 덕산은 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날 밤 늦도록 법담을 나누다가 객실로 가려 하니 바깥이 깜깜하였다. 이에 숭신이 초에 불을 붙여 내밀자 덕산이 받으려고 하니 숭신은 입으로 훅! 바람을 불어 촛불을 꺼버렸다. 그 순간에 홀연 크게 깨달음을 얻은 덕산이 숭신 선사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숭신이 “자네는 무엇을 보았기에 절을 하는가?” 물으니, 덕산은 “앞으로는 제가 다시 천하 큰스님들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덕산은 애지중지 메고 다니던 <금강경>을 풀이한 책들을 다 불살라 버렸으며 이후로 용담의 법을 잇는 법제자가 되었다. 당나라 무종 때 일어난 법난을 겪은 뒤 가는 곳마다 부처님을 모시는 불전을 없애고 설법하는 법당만 남겨두었던 덕산 스님은 학인에게 가르침을 줄 때 누구든지 보이기만 하면 주장자로 잘 때려주었으니 뒷날 이 가르침을 덕산의 ‘방’이라고 하였다.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은 어떤 뜻으로 쓰이는 것일까? 생멸(生滅)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으며, 시비 분별이 없는 본디 그 자리를 단숨에 깨우쳐 주기 위함이다. 모든 시비와 분별을 떨치고 단숨에 본지풍광(本地風光)의 도리를 사무쳐 깨우치게 하는 것을 생명으로 삼고 있기에, 여기에는 대기(大機) 대용(大用)으로 온갖 인연을 꿰뚫고 아우르면서 법을 쓰는 것이 거침없고 자유자재하여 일정한 법칙이 없다. 온몸으로 부처님의 법을 드러내기도 하고 없애기도 하면서 온몸으로 부처님의 세상을 책임지고 살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참다운 지혜를 드러내어 문수보살처럼 살아가게 하고 끝이 없는 보살행을 구현하여 보현보살의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대인(大人)의 경계이자 부처의 경계이다. 그렇더라도 사실대로 말하자면 임제와 덕산 또한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도깨비가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다. 부처와 조사 스님들이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도 근본자리에서는 그 자체가 평지풍파(平地風波)를 일으키는 소식이다. 그러니 임제의 ‘할’이나 덕산의 ‘방’도 쓸데없는 짓거리로서 다 도깨비장난이 아니겠는가? 이 본지풍광은 모든 시비와 분별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이것에 대하여 서산 스님은 “시퍼런 칼날이니 손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寒光珠媚水 寥寥雲散月行天.
반짝반짝 하얀 물결 옥구슬이 흘러가듯
맑디맑은 푸른 하늘 흘러가는 저 달이여.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