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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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부처님 없는 데는 없다!
참다운 예배가 되려면….
법당에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것이 단지 2500년 전에 돌아가신 석가모니 부처님께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근본에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뿐 아니라 많은 불자들이 중생인 내가 완벽한 부처님께 예를 올리게 됨으로써 기독교에서 예수님께 기도하는 타력과 다를 바 없이 돼 버리는 것 같습니다. 스님, 어떠한 마음으로 예를 올려야 부처님께 참다운 예배가 될 수 있으며 부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수행을 해 나가야 할는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부처님은 높이 계신 것도 아니고 낮게 계신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계신 데 반드시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그러죠. 법당에 계신 그 부처님 모습이 내 모습이고, 부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고, 부처님의 법이 내 법이고, 부처님의 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게 나하고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올릴 때 진짜로 거기다가, 한군데에다가 그냥 올리란 말입니다. 한군데에다 둥글려서 올리게 되면 전체의 이름이 거기에 포함됩니다. 전체가 포함되고, 또 우리가 포함되기 때문에 삼 배를 올리든지 바쁘면 일 배를 올리든지 올리고는 자기한테다가 다시금 일임해서 놓고 나오시란 얘깁니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부처 없는 데가 없죠. 그게 여러분을 두고 말씀드린 거죠. 여러분이 살아 계시지 않으면 부처님이 어떻게 살아 계십니까?
그런가 하면 또 하나의 사실은, 한마음 속으로 들면 하나도 없을 것이요 한마음 속에서 질량이 나오면 헤아릴 수 없이 광대무변하게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불성은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만법을 들이고 내기 때문에 그 능력을 바로 여러분이 다 가지고 계시다는 거를 아셔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태초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그게 화두요, 화두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알아야 된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인하여 괴로움이나 고독함, 액난이나 병고가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자기한테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면 한번 뒤집어 생각해서 바로 자기한테 고칠 수 있는 능력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바깥으로 끄달리는 이 마음은 한계가 있지만 안으로부터 바깥으로 좇아 나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진짜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창조력입니다. 우린 정신력으로써 사대에 다 통신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불가에서 오신통이라고 합니다만 오신통에 관한 건은 여러분이 다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똥마려우면 똥 누고 졸리면 잠자고 일어나고 싶으면 일어나고 앉아 있고 싶으면 앉아 있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배고프면 먹고 이러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과학이 따로 없고 진리가 따로 없고 부처님 법이 따로 없고 우리 생활이 따로 없다는 겁니다. 우리 생활 속에 부처님 법이 다 있는 것이지 나를 떠나서 무슨 부처님 법이 있겠습니까?
나는 그전부터 이런 생각을 했죠. ‘만약에 어디에서 능력이 있어서 나를 장구벌레로 만들어 놓는다 하더라도 난 그걸 탓 안 하겠다. 내 이 생각이 잘못이라면 부처님도 없다.’ 이런 생각을 하고선 밀고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가난하든 가난치 않든 간에 자기 마음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서 스스로 지금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마음 한생각이 자기를 구덩이에 빠뜨릴 수가 있는가 하면 한생각이 구덩이에 빠진 걸 건져 낼 수도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못 알아들으실까 봐 때때로 여러분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육신이 움죽거리듯, 생명이 있기 때문에 에너지가 되듯 이렇게 삼합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운전수가 차를 끌고 다니는데 자칫 잘못 끌고 가면 구덩이에 박힙니다. 그래서 그 차는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게 되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뚱이도 마음에 따라서 일그러지고 찌그러지고 병이 들고 또 가난해지고 망하고 이런 수가 많죠. 이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홍인 선사께서 육조 스님을 삼경에 말없이 불러서 말 없이 말을 하시면서 『금강경』을 설하셨는데 그 대답을 어떻게 하신 줄 아십니까? 난 말을 똑같이는 못합니다만 지금 현실에서 내가 느끼고 체험한 걸로 봐서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본래 우리 자성이, 본래 내 속에 내가 있는 줄 어떻게 알았으리까.” 한번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 살림살이 빼놓고 나 빼놓고 뭐가 남는가? 또 “본래자성불은 일체가 둘이 아닌 줄 어떻게 알았으리까.” 모두가 고정됨이 없이 공용 공체 공식 하고 돌아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현실적으로 생각을 한대도 그것은 조금도 어김이 없다고 봅니다. 또 “우리가 둘이 아닌 까닭에 본래자성불이 둘 아니게 나투는 걸 어떻게 알았으리까.” 자세히 말을 해 드리느라고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본래자성불은 움죽거리지 않으면서도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는 것을 어떻게 알았으리까.” 이겁니다, 바로.
그러니 저 부처님 형상이 바로 우리의 형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저 부처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요 저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니 둘이 아니게 회전 즉, 공존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될 겁니다. 무조건 맹종하고 무조건 노예가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죠. 그래서 여러분은 언제나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나의 중심, 중용, 중도로서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심으로 자기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물러서지 않는 그 마음에 도달해야만이 나 자신을 자신 속에서 발견함으로써 이 세상이 둘이 아니게 공존한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둘이 아니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나투면서 진화된다는 그 사실을 또 알게 될 것입니다.

관상과 부적에 대해서

요 근래에 경기가 어렵고 취직이 안되다 보니 점집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점집에 가 보면 꼭 부처님을 모셔 놓고 부적을 해라, 사주가 어떻다 관상이 안 좋다 이런 말들을 많이 하던데요, 관상과 부적이 불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예전엔 너무 사람들이 모르고, 사람이 지금처럼 이렇게 많았던 게 아니라 이렇게 마을이 있으면 한 십 리 나가야 또 마을이 있고 이럴 때입니다. 이럴 때에 어느 스님이 지나다 보니 저 마을에 필연적으로 사태가 나서 마을이 다 죽게 되는 이런 이치가 보이거든요. 참 그, 살아 있는 부처님이죠. 그래서 이 스님이 그 사람들이 모르니깐 방편으로 종이에다가 써 가지고선 “이거를 붙이고 어느 날 어느 시에 피신을 해라.” 이렇게 일러 줬단 말입니다.
그러니깐 스님을 믿고 따르게끔 만들기 위해서 방편을 쓴 거죠. 부적을 믿게 됐죠, 이제. 즉 전깃줄과 전깃줄이 한데 합쳐지지 않으면 불이 안 들어오니까 전깃줄과 전깃줄이 한데, 마음과 마음을 한데 붙이기 위한 방편이죠. 그래서 그렇게 스님의 말을 믿게 하기 위해 방편을 쓴 것인데, 이제는 장사가 돼 버렸죠. 얼마짜리 얼마짜리 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야 이게 무슨 효득이 있겠습니까? 그냥 도깨비장난이요, 귀신짓이요 모두가 다!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 주신 그 뜻과 가르침을 진정코 제대로 받아서 행하지 못하는 소행입니다.
그리고 관상이라 하는 것도 이렇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심상을 올바르게 가진다면 관상도 좋아질 거고 수상도 좋아질 거고 족상도 좋아진다 이겁니다, 심상 하나만 좋으면. 잘나고 못나고 이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 심상 하나가 좋으면 모두가 이 얼굴 자체도 전부 웃게끔 돼요. 그리고 심상을 잘못 쓰면 손장난도 나쁘게 나가죠. 걸음걸이도 나쁘게, 나쁜 일 하려니깐 막 돌아가죠? 그러니깐 족상이 나쁜 거고 수상도 나쁜 거고 관상도 나쁜 거죠. 그러니깐 ‘심상 하나만 올바르게 생각을 잘 해낸다면 관상도 수상도 족상도 다 좋으니라. 이래서 공덕이 되느니라. 그러니 족상이니 수상이니 관상이니 볼 게 아니라 심상 하나만 진짜로 잘 보고 잘 쓴다면 이거는 세세생생에 공덕을 이룰 것이니라.’ 이런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생각해 보면 허탕한 짓들을 하고 있다 이 소립니다. 보면 병이고 안 보면 약이에요. 때에 따라서는 모르걸랑 아예 보질 말아요. 차라리 모르면 편안하게 마음을 둠으로써 편안한 일이 닥칩니다. 그런데 이거를 ‘아이구, 올해는 뭐가 또 언짢지는 않을까?’ 하고선 가서 온통 관상도 보고 부적도 사고, 뭐 또 점도 치고 이렇게 보죠. 그러면 좋은 게 세 가지라면 언짢은 건 일곱 가지나 돼요. 그러니 누가 언짢고 누가 언짢고 누가 좋고 이러니까 그냥 나올 수가 없죠.
그런데다 그냥 나올 수 없어서 주고 나오는 건 또 좋아요. 와서까지도 이 뇌리에 아주 알쏭달쏭하게 잠재해 들어가죠. 그러면 그걸 어떡합니까? 조금만 일이 안돼도 ‘아이구, 그걸 안 해서 그렇구나!’ ‘아이쿠, 이것이 이렇게 돼서 그렇구나!’ 아, 이렇게 인생을 살아나가면 복잡하지 않아요?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 아주 올바로 먹고살기도 급급하고 참 고통스러운데, 하물며 왜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 가지고 고통을 받느냐 이 소립니다.
애고나 질병이나 망상 같은 거, 업보 같은 거 이 모든 것이 애당초부터 붙어 있던 게 아니죠. 여러분에게 잠재해 있는 그 관습 때문에 아이구, 요런 건 요렇게 생각을 하고, 요런 건 요렇게 생각을 하고, 요거…. ‘아이구, 내가 무슨 죄가 이렇게 많기에 이래?’ ‘에이그, 죄를 그래도 많이 졌기에 그렇겠지.’ 하면서 이제 생각이 되는 겁니다. 급한 일이 생기거나 어떠한 애고가 생기면 더 그런 마음이 일어나죠. 즉 그 일어나는 마음이 그 업보를 가져오는 겁니다.
항상 내가 이런 말을 하죠.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간다고요. 시공이 없이 돌아간다고. 그렇게 빨리 돌아갑니다. 빨리 돌아가는데 업보 붙을 자리가 어디 있고 아니, 우리들의 마음이 쉴 자리가 어디 있고, 거기 먼지 앉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세상이 정맥 동맥이 똑딱똑딱 똑딱똑딱 그냥 막 뛰고 돌아가는 판국에 거기 어디에 붙을 자리가 있느냐 이 소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마음에는 살아나온 관습들이 잠재해 있죠? 또 이 마음속에서 일어나죠? 또 바깥에서 보고 듣고 일어나죠? 그러니까 일어나는 그 자체는, 그것이 망상이다 업보다 이러질 마시고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자유인이 될 수 있는 100%다 이런다면, 자꾸 생각이 나와야, 요것도 나오고 조것도 나오고, 요것도 보고 조것도 보고,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나올 수 있어야 목석이 아니지, 그리고 성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지, 아니 요런 생각 조런 생각이 나오지 않는다면 목석이지 그게 사람입니까? 아, 그것더러 망상이라는 거예요.
바로 자기네들이 자기를 발전시키기 위한 이 자생중생의 업식들이, 업식들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자생중생들이 자기가 자꾸 생각을 나오게 하는 건데 그 나오게 하는 것을 업보니 무슨 망상이니 이러니까, 퇴박을 하니까 ‘에이, 망상이라 그러는데 망상 좀 실컷 해 봐라.’ 이러곤 그냥 망상으로 밀어 가는 거죠. 아, 생각해 보세요! 회사엘 다니면서 극진히 정성스럽게 하는데 ‘너 요놈 도둑놈! 너는 요놈아, 만날 그런 것도 못해!’ 하면서 만날 지청구하고 그렇게 해 보세요. 정말 도둑놈 됩니다. 네? 그와 같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여러 가지를 말씀해 드렸는데, 불교라는 이 단어는 포괄적인 불교기 때문에 일체 생명 어느 거 하나 불(佛) 아닌 게 없으며 말로 전달, 뜻으로 전달, 통신으로 통신, 마음과 마음이 전달, 이렇게 해서 시공이 없이 돌아가는 이 자체가 바로 교(敎)입니다. 그러니까 이 불교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나 실감이 나고 실천적이고 실행적이고 또는 진리적이고 아주 타당한 이름이죠, 이름만으로도. 예전에 조선시대 때에 탄압을 받아서 산속으로 들어가서 공부를 하는데, 부처님 한 분만 모셔 놓고 하면 그 앞에만 갖다 놓으니까, 여기도 놓고 저기도 놓으라고 방편으로 그렇게 써먹었으면, 지금 이 시대에서는 개선을 해야죠. 그렇죠? 잘못된 거는 고쳐가면서 써야죠.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데…

저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림 그리는 일이 불교에서 가르치는 참선하는 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을 하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때, 그림에도 물론 새로운 안목과 새로운 영역이 있으니까 어떻게 나 자신이 나로부터 벗어나서 거기에 도달할 것인가 하는가를 여쭙고 싶습니다. 그리고 요 근래에 그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높아졌는데 사실 저의 그림은 잘 팔리지를 않아서 힘이 듭니다.
어느 시골에서 떠꺼머리총각이 하나 있었더랍니다. 근데 나무를 태우면 숯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걸로 땅에다 항상 그림을 그렸더랍니다. 근데 하루는 저녁나절인데 자기가 여자 생각이 나니까 여자를 그려 놓고 그냥 집에 가서 기껏 자고선 저녁나절에 나왔더니 아, 거기 예쁜 여자가 그대로 말을 하더랍니다, 그려 놓은 데서. 그래서 ‘내가 숯으로 그려 놨는데 이 그림에서 말을 하네!’ 하는 동시에 그 여자도 없어지더랍니다. 그런데 그 그려 놓은 그 여자가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그림 그릴 때나 살아나갈 때도 말하지 말라.” 그러거든요, 생각하지 말라는 거죠. ‘생각하지 말라.’ 하고선 그냥 없어졌거든. 그래서 그것을 믿고 생각을 안 한 겁니다. 인생 살아나가는 것도 생각 안 하고 그저 가다가 보기 좋으면 그린 겁니다. 그래서 그 총각은 그때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을 했고, 지금으로 치면 미술이라고 하죠. 그림 그리기 시작을 해서 그저 어디고 붓과 먹, 종이만 사 가지고 짊어지고 돌아다니면서 산하도 그리고 그냥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리고 다니면서 어느 산중에 들어서니까 노인네 한 분이 딸을 잃고 혼자 두 다리를 쭉 뻗고 울거든요. 아, 시골 초막집에서 그렇게 울고 있으니까 자기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나서 그 사람을 끌어다 놓으면서 “아 참, 왜 우시느냐?” 하니까 자기 딸이 이렇게 나 혼자만 남겨 놓고 죽었으니 나는 어떻게 사느냐고 하면서 울더랍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어야 살지 않느냐고 그러더랍니다. 딸이 바느질품을 팔았는데, 인제는 살 수가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런 거 걱정 하나도 하지 마시라고, 따님이 죽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그러고선 그날 저녁에 바로 큰 헝겊에다가 종이를 붙여 가지고 아주 찢어지지 않게 만들어서는 거기다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집 딸을요. 야,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딸과 똑같이 그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심안으로서 그 딸을 착 놓고 보니까 아이구, 그 딸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 딸을 그대로 그렸어요. 그려서 큰 배를 하나 그려 가지고 거기 떠억 앉혀 놨단 말입니다. 그러곤 물도 그려 놓고 나무도 그려 놓고 처억 벽에다 걸어 놓고 하는 소리가, 여기서 딸이 저녁이면 나와서 항상 밥을 해 줄 테니 비밀로만 하라고, 내가 딸을 봤다든가 딸이 이렇게 잘해 준다든가 이런 거를 비밀로 하라고 이렇게 그 그림쟁이가 일러 주고는 갔거든요. 그날 저녁부터 그 딸이 거기서 나와 가지고선 고깃국도 끓여 주고 뭐 밥도 해주고 다 하고 그냥 또 새벽녘이면 거기로 싹 들어가면 고만인 겁니다.
그럼 그 그림 그린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됐기에 그렇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무심과 유심이 둘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무심이라면 유심이고 유심이라면 무심이니 무심도 아니요 유심도 아닌 그 누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유심도 아니고 무심도 아닌 그 마음을 누가 가지고 있을까요? 그래서 그림 하나를 그린다 할지라도 산 그림이요, 글자 하나를 쓴다 하더라도 산 글이요, 말 한마디를 한다 하더라도 산 법이요, 이렇게 되죠.
그러니 오늘부터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손이 그리는 게 아니라 바로 진짜 참나 손이 내 손을 이용해서 그린다는 것을 꼭 믿으세요, 그렇게 자기 주인공을 꼭 믿으란 말입니다. 그러면 꼭 거기서 살 길이 나와요.

내 안의 능력과 업에 대해

불교에서는 내 안의 불성이 우주 전체의 근본과 둘이 아니기에 내 한생각에 업장을 소멸하고 벗어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왜 업을 강조를 하고 심지어는 영가 천도 내지는 해년마다 조상천도 의식이 많은 건지요. 일체유심조라는 말과 상충이 되는 것 같아서 질문을 올립니다.
혼동할 거 없어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꼭 천도를 해야만 좋은 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안 하면 마음이 안심이 안되는 그런 근기를 가진 사람 앞에는 잘 차려 드려야죠. 안 그래요? 또 그렇지 않는 사람은 밥 한 그릇 놓고도, 자기 먹는 밥 한 그릇 놓고도 천도를 하고도 또 남아요. 아, 사람 근기에 따라서 있는 거죠. 그러니 이것도 잘못되는 게 없고 저것도 잘못되는 게 없어요. 안 그렇습니까? 또 이것 보십시오. 사람이 상을 크게 차려 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뭐뭐 뭐뭐 비싼 거 사다 놓은 거, 싼 거 사다 놓은 거 그걸 다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걸 혼백도 다 알게 되는 거죠, 자기가 알고 있기 때문에.
어느 집에 제사를 지내는데 며느리가 돈이 많이 드니까 이거 안되겠거든요. 남편이 돈 십만 원 주는 걸 가지고 오만 원은 떼 놓고 오만 원 가지고 가서 장을 다 봐 왔단 말입니다. “여보, 장 봐 왔소? 어머님이 잘 잡숫던 것도 사 오고?” 그러니까 “예.” 그러기에 아들은 그런 줄로 알고 좋아서 그랬는데, 싼 거를 사다가 상을 이렇게 차려 놨거든요. 그래도 그 아들은 그것을 의심 안 하고 그냥 지극한 마음으로 했는데 며느리가 그렇게 싼 거를 그만큼 해 놨다는 거를 알기 때문에 시어머니 시아버지도 그만큼 차렸다는 거를 알고 있었다 이겁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꿈에 “얘야, 네가 싼 것만 요렇게 해다 놨으니 지금 너의 할아버지도 모두 계신데 내가 가져갈 것도 없느니라.” 아, 그러거든요. 그러고 꿈을 딱 깼어요. 그래서 날더러 와선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이런 꿈을 꿨는데 이건 어떤 꿈일까요?” 그러기에 허, 내가 웃었어요. 세상에 자기 마음먹는 대로 조상도 알게 돼 있고 우주간 법계에서도 알게 돼 있고 보살도 알게 돼 있고 부처님도 알게 돼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겁니다. 또 아직 진화가 되지 않은 어떠한 짐승이 있다 하더라도, 그게 시각이나 촉각이나 후각을 통해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쪽에서 그만큼 아는 사람이 이것을 통해 보면 그쪽에서 그때서야 사람의 마음을, 문을 열어 주니까 그쪽에서 알고 있는 겁니다.
그렇듯이 영령들도 그래서 알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천도시킬 때에 여러분이 그 상 하나 차렸다고 해서 그런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이 모든 걸 둥글려서, 마음의 원을 그려서 원으로서의 그 원심력을 생각하면서 둥글려 놓는다면 이 원 속에는 다 있지 않습니까? 일체가 다 있는데 아니, 뭐 그리운 게 있겠습니까, 거기? 이 세계뿐만 아니라 전체가 다 있는데 모자랄 게 뭐 있겠습니까, 원을 그려 놓으면. 그 원심으로서 제사를 지극하게 드린다면 아마 가게도 도매상이고, 또 어느 호텔이고 음식점이고 뭐, 그런 데로 아니 다니는 데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마음 쓰는 자손들의 영령들 조상들은 그냥 항상 뷔페식 하는 데 가서 잡숫고 상점에 가서 항상 자기 가지고 싶은 대로 갖고 또 상점에 가서 자기 입고 싶은 대로 입을 겁니다, 아마. 벽도 없고 봇장도 없으니까. 물도 없기 때문에 건너갈 것도 없고 오고 가고도 없이, 시간 공간도 없이. 그러니 여러분이 마음을 넓게 쓰세요. 무슨 요거 하나 있다, 요거 차렸다 하면 영령들도 조상들도 요거 하나 차린 것만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좀 넓게 가지세요. 그리고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린 거지 업이 있다 뭐, 이렇게 걸려 있지 마시고 생각을, 이 환상천을 훌쩍 뛰어넘고 또는 그러한 기복적인 생각에서 훌쩍 뛰어넘으세요. 과거도 없고 현실도 찰나 생활이니까 없고 미래는 안 왔으니까 없고, 아예 없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대로 좋게 생각하라. 좋게 생각하면 그대로예요. 아시겠죠? 쓸 것도 없고 씌울 것도 없는 겁니다. 부처님이 벗겨 주려고 애를 썼지 씌워 주려고 애쓴 건 아니에요. 그러니 우린 쓰지도 말고 누구 씌워 주지도 말고 그럽시다.

저의 전생이 무엇인지요?

언제나 대자연의 진리를 체험하신 것을 글과 말씀으로 저희들에게 이렇게 전해 주시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 불법 공부를 10여 년 정도 하면서 지금 계곡에 빠진 게 뭐냐 하면 ''''그럼 내 전생이 과연 뭔가, 내 전생에 대해서 좀 밝혀 주실 분은 과연 이 세상에는 없는가.’ 하는 생각을 수년 동안 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현대불교 신문을 통해서 질문을 올리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의 전생이 무엇인지 일러 주실 수는 없는지요?
지금 전생에 대해서 물어 오셨는데 만약에 여러분이 전생이 없었다면 지금 현생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의 전생이 없다면 송장일 것이고 육신이 없다면, 보이지 않으니까 무효일 것입니다. 또 생각이 없다면 목석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생이 없는데 어떻게 현생이 있겠습니까? 바로 곧 전생이 현생입니다. 현생이 전생이고요. 그거 뭐 다른 거 없습니다. 선생님 그대로예요. 우리가 죽을 때 허무하지 않다 하는 것은 옷이 헐었으니 아무 데나 앉아도 그냥 괜찮거든요. 늙고 그랬다고 해서 이 옷이 헐었다고 그러는데요, 아무 데나 앉아도 흙 묻었다고 걱정할 거 없고 그냥 뭐 그렇거든요. 그래서 새 옷 입는 거보다 헌 옷 입는 게 아주 좋죠.
그래서 아무리 노인네가 늙었어도 허무하지 않은 겁니다. 이 늙었다는 것이 이게 옷이 헐었다는 얘기인데 이왕 늙어 버렸으니 아무 데나 앉은들 누가 어떠랴 이러고요. 참, 그 마음이 지혜롭고 크면 이 우주 안에 그 마음이 꽉 찼는데 무엇이 부러울 게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러한 마음을 가진 분은 밥 굶을 필요도 없고 용돈 안 줄 사람도 없어요, 또.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누가 어디서 나와도 나와서 우리가 허무하게 살지 않게 돼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건. 여러분이 해 보십시오. 그렇게 즐겁습니다. 즐거운 거보다도 허무하거나 그러지 않다고요. 그래서 늙어지면 허무하다고들 그러는데요, 젊은 사람들이 요새 허무하다는 소릴 더 잘해요. 노인네들은 외려 덜해요. 그것 참, 어떻게 거꾸로 됐는지 그래요. 그래서 허무하다는 게 왜 허무한가, 그걸 알아보려면 나부터 먼저 알라 이겁니다.
2007-08-29 오후 5:2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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