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씨는 몇 년 전 남편이 숙환으로 먼저 가고 나자 어쩔 수 없이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마침 어떤 사람이 근처 건물에 자리를 하나 내 주며 자기가 돈을 빌려주겠다고 하면서 옷가게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곳은 위치가 좋아 이익을 많이 낼 수 있다고 하면서 일 년 후에는 다 갚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가게를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운영해 보는 가게라 경험이 없어 모든 것이 힘들었다. 1년이 지났으나 이익은커녕 가게 임대료도 간신히 내는 형편이 되었다. 매달 들어가는 비싼 이자는 더욱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원금을 갚으라는 것이었다. 당장 그 큰돈이 생길 데가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열심히 해도 잘 안 돼요. 제 형편을 아시잖아요.” L씨가 부탁했다.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건 댁의 사정이고, 내 사정은 어떡해요? 나는 그 돈이 지금 당장 필요하단 말이야.” 은근히 협박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야기 좀 하자고 했다. “그렇게 돈 갚기 어려우면 또 빌려서 갚으면 되잖아요.” “네? 또 빌리다니요. 지금 이자 내기도 힘든데 어떻게요.” “사업하다 보면 다 그런 거요. 일수 대출하는 데를 소개시켜줄 수 있는데.” “일수요?”눈 앞이 캄캄해졌다. 처음부터 인심 쓰며 돈 빌려주고 가게를 시킬 때 이런 계산이 있었구나! 여기가 잘 안 나가는 것을 알고….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협박하듯 독촉했다. 전화를 안 받으면 가게로 찾아오기 때문에 어쩔 수도 없었고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두렵고 무섭기도 했다. 매일 속이 탔다.
절에 가서 울었다. 스님은 “당장 끄달리는 것부터 좀 벗어나야 장사도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우선 배울 것은 그의 말을 들을 때 내가 아니라 마음 속 부처님께서 듣는다고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마음을 고요하게 깊이 집중해야 한다. 바다에 비유하면 마음을 파도치게 하지 말고 바다 밑바닥에 닿듯이 깊이 가라앉히라는 것이다. 마음을 집중하는 연습부터 하라고 했다.
처음엔 어려웠으나 L씨는 열심히 해 보았다.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한 달이 지나가자 뭔가 든든함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돈 내놓으라는 재촉을 또 어떻게 견디나…. L씨는 한숨이 나왔다. 전철을 타고 가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모으게 되었다.
그를 만나 거친 말을 들으며 배운 대로 계속 마음속으로 듣는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점점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말 좀 해 보라고, 언제 줄 거야!”라고 해도 당황되지 않고 침착하게 답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시달린 후 나오는데 놀랄 일이 생겼다. L씨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 것이다. 상대는 L씨의 얼굴을 보더니 “이제 아주 미쳤군, 미쳤어. 이 마당에 웃음이 나와?”하고 소리쳤다.
전철을 타고 돌아가는 동안에도 계속 미소가 지어졌다. ‘이상하다. 이 힘든 와중에 왜 이러지’ 하며 ‘이건 도저히 내가 짓는 미소가 아닌데….’하고 생각했다.
그 길로 절에 가니 스님은 “그게 바로 보살님 속에 있는 부처님의 미소이고 힘입니다. 이제 마음의 힘이 생기기 시작한 겁니다. 열심히 해 보세요. 일은 잘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마음의 힘을 기르는 겁니다. 파도 한 조각으로 살지 마시고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사세요. 항상 끄달리는 마음을 깊이 가라앉히세요.”
L씨의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제 마음속에 든든한 자성(自性)부처님이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 마음이 힘이 무엇인지 느끼며 부지런히 키워가려고 한다.
■황수경(동국대 선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