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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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따로 임제종의 종지를 밝히다
앞에서 선종의 다섯 종파에 대한 가풍을 말했는데 여기서는 따로 임제종 종지만을 밝힌다. 그 까닭은 우리나라에서는 임제종을 선종의 정통으로 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산 스님도 임제종의 간화선을 주장하며 평생 그 길을 밟아왔고, 또 후학들을 지도하기 위하여 간화선을 중심으로 <선가귀감>을 저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제종의 종지를 밝히는 데에 있어 먼저 ‘3구(三句)’ ‘3현(三玄)’ ‘3요(三要)’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선가귀감> 78-2장에서는 이것과 함께 임제종의 종지를 이해할 수 있는 ‘4료간(四料簡)’ ‘4빈주(四賓主)’ ‘4조용(四照用)’ ‘4대식(四大式)’ ‘4할(四喝)’ ‘8방(八棒)’을 간략하게 말하고 있다.

大凡 一句中具三玄 一玄中具三要 一句 無文綵印 三玄三要 有文綵印. 權實玄 照用要.

무릇 ‘일구(一句)’ 가운데 3현이 갖추어져 있고 ‘일현(一玄)’ 가운데 ‘3요’가 갖추어져 있다. 일구에는 말이나 글로 언급할 수 있는 여지가 없고 삼현과 삼요에는 말이나 글로 언급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방편과 실상으로 드러나는 것이 ‘현(玄)’이요 그 진리를 통찰하는 힘이 있어 그 힘을 현실에 바로 쓰는 것이 ‘요(要)’이다.
‘3구’에서 첫째 구는 ‘사람의 몸을 잃게 하고 목숨을 잃게 하는 것’이고, 둘째 구는 ‘입을 열기도 전에 잘못된 것’이며, 셋째 구는 ‘똥을 담는 삼태기와 마당을 쓰는 빗자루’이다.
‘3현’에서 첫째 ‘체중현(體中玄)’은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생각에 다 들어 있는 것들’이니 본바탕에서 깊은 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구중현(句中玄)’은 ‘말길이나 뜻길이 다 끊어진 말 한마디와 같은 것들’이니, 이 한마디 가운데서 깊은 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셋째 ‘현중현(玄中玄)’은 말없이 침묵 속에 한참 있게 되는 ‘양구(良久)’ 방망이질하는 ‘방(棒)’, 고함치는 ‘할(喝)’과 같은 것들이니 깊은 도리에서 깊은 도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3요’에서 ‘첫째 요지’는 ‘진리를 통찰하는 힘[照]’이 곧 오롯한 바탕으로서 ‘대기(大機)’이고, ‘둘째 요지’는 ‘진리를 통찰하는 힘’이 곧 현실에 바로 오롯하게 쓰이는 대용(大用)’이며, ‘셋째 요지’는 진리를 통찰하는 힘‘과 ‘그 힘이 현실에서 바로 오롯하게 쓰이는 것’ 곧 ‘대기’ ‘대용’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부를 점검 받고자 하는 상대방의 근기를 네 가지 부류로 헤아려서 후학들을 맞이하는 ‘4료간(四料簡)’에서, 사람은 죽이지만 경계는 죽이지 않는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은 낮은 근기를 상대하는 것이고, 경계를 죽이나 사람은 죽이지 않는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은 중간 근기를 상대하는 것이며, 사람과 경계를 다 죽이는 ‘인경구탈(人境俱奪)’은 높은 근기를 상대하는 것이고, 사람과 경계를 죽이지 않고 다 살리는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은 뛰어난 대장부를 상대하는 것이다.
선지식을 주인에 비유하고 학인을 손님에 비유하여 그들의 수행 정도에 따라 문답형식으로 나타나는 양상을 표현한 ‘4빈주(四賓主)’에서, 손님 중의 손님 ‘빈중빈(賓中賓)’은 학인이 숨쉴 구멍이 없으므로 학인의 물음이 있고 선지식의 대답이 있게 되는 것이다. 손님 중의 주인 ‘빈중주(賓中主)’는 학인에게 숨쉴 구멍이 있으므로 학인이 주인 노릇도 하고 선지식과 오고가는 법도 있게 되는 것이다. 주인 중의 손님 ‘주중빈(主中賓)’은 선지식에게 숨쉴 구멍이 없으므로 학인의 물음만 있고 선지식의 적절한 답변이 없는 것이다. 주인 중의 주인 ‘주중주(主中主)’는 선지식에게 숨쉴 구멍이 있으므로 아무 걸림이 없어 뛰어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종사가 학인을 다루는 방편인 ‘4조용(四照用)’에서 먼저 학인의 역량을 알아본 뒤 법을 쓰는 ‘선조후용(先照後用)’은 어떤 사람이 있을 뿐이고, 먼저 법을 쓴 뒤 학인의 역량을 비추어 알아보는 ‘선용후조(先用後照)’는 어떤 법이 있을 뿐이다. 학인의 역량을 알아보는 동시에 법을 함께 쓰는 ‘조용동시(照用同時)’는 밭을 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고 굶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듯이 학인의 사정을 털끝만치도 용납하지 않고 조사의 법령으로 학인의 신명(身命)을 단숨에 뒤바꾸는 것이다. 학인의 역량을 알아보는 것과 법을 쓰는 것이 동시에 있지 않는 ‘조용부동시(照用不同時)’는 학인의 질문에 종사의 대답이 있게 되는 것이니, 학인의 근기에 따라 학인을 다루는 방편이다.
학인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는 네 가지 격식인 ‘4대식(四大式)’에서, ‘올바른 이익을 주어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격식’은 ‘달마가 소림굴에서 벽을 마주하고 앉는 것’과 같은 것들이고, ‘평상시 도리로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격식’은 ‘화산 스님이 북을 칠 줄 안다는 것’과 같은 것들이며, ‘본분으로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격식’은 ‘산승은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것들이고, ‘방편으로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격식’은 달마가 “알지 못한다”고 말한 것과 같은 것들이다.
‘할’의 성격을 네 가지 쓰임새로 구분한 ‘4할(四喝)’에서, ‘금강왕보검의 할’은 한칼에 온갖 알음알이를 끊는 ‘할’이고, ‘웅크린 사자가 포효하는 할’은 모든 마귀의 머리가 터지는 ‘할’이며, ‘장대로 더듬고 풀 더미 그림자로 기척을 살피는 할’은 스승의 공부를 이어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학인의 역량을 살피는 ‘할’이고, ‘깨달음에 관한 모든 일이 한꺼번에 다 해결되는 할’은 위에서 말한 ‘3현’과 ‘4빈주(四賓主)’를 다 갖춘 ‘할’이다.
종사들의 방망이질에도 여덟 가지가 있는데 그 ‘8방(八棒)’의 내용은, 조사의 영을 내려서 깊은 이치로 돌아가게 하는 방망이질, 헛된 생각을 닥치는 대로 없애 올바른 이치를 따르게 하는 방망이질, 깊은 이치라도 내치고 올바른 이치라도 깎아내리는 방망이질, 모질게 질책하는 방망이질 이 네 가지는 모두 벌을 주는 방망이질이니 ‘벌방(罰棒)’이다. 종지에 어긋남이 없으므로 상으로 때려주는 방망이질은 ‘상방(賞棒)’이고, 헛된 것과 참된 것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을 가려주는 방망이질은 ‘변방(辨棒)’이며, 눈 먼 도리깨처럼 함부로 휘두르는 방망이질은 사리에 어두워서 눈이 먼 ‘할방( 棒)’이며, 범부이든 성인이든 모든 지견을 몽땅 쓸어내는 방망이질이야말로 올바른 이치를 드러내는 ‘정방(正棒)’이다.

이와 같은 법들은 특별히 임제종의 가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모든 중생에 이르기까지 다 본분에 맞아떨어지는 일들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해 놓은 법을 벗어나게 되면 모두 거짓말이 된다.
■원순 스님(송광사 인월암)
2007-08-29 오후 4:4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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