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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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안으로 모든 것을 놓고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일주일 만에 또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설법을 들으실 때에 설법 아닌 게 없지만 해당치 않은 말이라고 해서 허술히 듣지 않으시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귀머거리가 천둥 번개가 치는데 딴 사람이 천둥 번개 쳤다니깐 귀머거리는 천둥 번개가 어디 있느냐고 고집을 부리더랍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누구나가 다 이 오묘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해가 안 가는 점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해가 가게 하려니까 여러분이 알고 있는 물질을 방편으로 써서 얘기할 수밖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끌어내기 위해서 우리 생활에서 이렇게 부합을 시켜서 얘기해드리는 겁니다.
우리가 전자에는 쓰고 배우면서 공부했지마는 지금은 쓰고 배우고 읽고 그래서만 되는 거는 아닙니다. 한생각을 하고 그것도 더불어 같이 한생각을 해서 우리가 탐구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마음 한생각에서 탐구하는 것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인간 자체가 고정됨이 하나도 없기에 이 사대(四大)와 세상, 오온(五蘊)이 다 공(空)한 줄 알게 된다면….’하는 겁니다. 그거를 알게 된다면 계향(戒香), 정향(定香), 혜향(慧香), 해탈향(解脫香), 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 이 뜻을 이미 몇천 년 전에 말씀하셨다는 게 너무나 감개무량하고 참 깊은 뜻이 있다는 걸 알 겁니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그냥 ‘이건 부처님 앞에 정성들이는 소리다.’ 이렇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한번 생각을 하면서 탐구할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계향’하면 우리 스님네들만 계를 지켜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스님네들과 더불어 같이 있는 거지 스님네들 따로 있고 여러분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향’ 한다면 질서를 문란치 않게 하는 마음과 더불어 모든 것을 정도에 넘치지 않게 하는 것. 일체 만법에 대해서 말입니다. 생활면에서 있어서 모든 것을 한생각 뉘우치면서 남을 원망하지 않아야죠. 가정에서나 내 몸으로나 밖으로나 모든 것이 계율에 어긋난 살림살이라면 그 살림살이는 벌써 어느 한 구석이 터지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향’했습니다.
그런데 다섯 가지를 말씀을 하실 때에 끄트머리에 꼭 다 향, 향, 향, 향, 향 했습니다. 왜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이라 한지 아십니까? ‘향’이라는 것이 어떠한 데에 쓰는 것이 ‘향’이냐? 우리가 향을 피우는 것만이 향이 아니라 내 마음의 아름다운 향을 피우는 것. 종합해서 일체 만법을 행하는 데에, 마음 쓰는 데에, 뜻을 행하는 데에, 뜻과 행과 말이 한데 떨어지지 않는 행의 계율이 돼야만 되겠습니다. 그래서 ‘계향’ 한 것입니다.
‘정향’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사대와 오온이 전부 공한 줄을 알았다면 일체 만법의 마음을 내며 일체 만법의 행을 하며 일체 만법의 눈을 뜨고 빛을 보며 또 일체 만법의 염파를 들으며, 또는 우리가 몸을 움죽거리면서 행을 할 수 있는 마음을 내며, 뜻을 가지는 모두를 겸해서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면 그 주인공 자체, 그 자신의 실상, 근본을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해서 그것을 믿고 거기에다 일임해서 맡기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물러서지 않는 것을 말해서 ‘정향’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떠한 문제든지 나로부터 이 세상이 생긴 거지 나 없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내 바탕인 나의 주인공의 그 뜻을 가지고서 일체 만법의 마음을 내면서 활용을 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모든 것이 공했다는 걸 알고, 거기다가 놓고 일임하고 믿고, 거기서 전부를 다 지켜볼 수 있는 오관을 통한 감각, 이것을 지켜볼 수 있다면 우리 모두 공부하는 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또 ‘혜향’했습니다. ‘혜향’이라는 것은 청각이나 시각이나 또는 미각이나 촉각, 지각을 한데 합쳐서 마음 근본에 모든 것을 놓고, 돌아가는 그 자체를 가만히 안팎으로 유(有)의 법이나 무(無)의 법이나 상황을 잘 판단을 해서 지혜롭고 능동적이게 마음을 쓰게 뒷받침을, 정향의 뒷받침을 해주는 것입니다. 물러서지 않는 마음에 거기다 뒷받침을 해주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혜향’ 한 것입니다.
‘해탈향’이라는 것은 우리가 전자에부터 수없는 억겁을 거쳐 오면서 진화되고 창조되고 또 창조되고 진화돼서 여기까지 올라온 인간이지마는 아직 50%가 모자라는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모든 것을 주인공에 일임하고 맡기고 믿고 지켜보면서, 모든 것은 이 허수아비가 하는 것이 아니니 모든 것을 주인공에 놔라 이겁니다. 놓게 되면 나중에 억겁에 걸친 업의 과보라든가 억겁에 대한 죄업이 얼기설기 다 묶어진 것을 풀게 하는 것이 ‘해탈향’입니다. 그러니깐 억겁의 업보가 풀리는 그 자체가 바로 ‘해탈향’의 뜻입니다.
그러면 ‘해탈지견향’이라는 것은 뭐냐? 항상 모두를 놓고 항상 밝아서 유의 법, 무의 법이 같이 밝아서, 내 생명의 근원과 마음내는 것이 항상 밝으니까, 이 육신도 밝게 행하게 되니까 여러 가지로 다 밝아서 통달하고 보니깐 무엇인들 거기에 걸릴 바가 있겠습니까? 걸리지 않고 돌아가는 것을 ‘해탈지견향’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요 한마디는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무(無)’자 화두를 가졌다 또 ‘이 뭣고?’ 화두를 가졌다, 어떤 화두를 가졌든지 간에 그 화두는 바로 이름인 것입니다. 또 내가 주인공이라고 부르라고 한 것도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인공이라고 이름을 낸 것은 내 마음 안으로 모든 것을 놓고 믿으라는 것이죠. 내 자아를 발견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니깐요, 이 바탕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이 이 세상에 나온 것을 화두라고 생각하고 근본에 바로 들이대라. 이것이 근본의 지표가 될 수 있고 바탕이 될 수 있는, 이게 제사 지낼 때 위패 놓는 거와 마찬가지고 우리가 또 부처님을 조성해놨을 때에는 ‘바로 저 부처님의 몸이 우리의 몸이요, 저 부처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니.’ 이렇게 알게 하기 위해서 모셔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그 화두 든 것은, 우리의 이 몸이 벌써 화두로 정해졌고 이 세상에 나왔을 때 이미 화두로 정해졌는데 바깥에 또 화두를 쥐고 있으니 이거 용납이 되겠습니까?
이거를 비유해서 한번 들어봅시다. 모든 기계가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 쭉쭉쭉쭉 빠집니다. 그런데 기계 한 귀퉁이가 고장이 나가지고선 만약에 막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뒤따라 나오는 것이 막히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파산이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인간 생활도 바로 놓고 그냥 돌아간다면 그렇게 밀리지 않을 것을, 밀려서 부닥치고 부닥치면서 사람이 고를 겪고 그러지 않을 것을 자꾸 만들어서 자업자득으로 생활을 해나간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우리 자체를 한번 비유해서 얘기해보십시다. 이 우주 전체가 말입니다, 이 우주 전체가 금강자석이라고 한다면 금강자석에 의해서 그 빠른 힘이 있어서 물이 이 지구 바깥으로 돌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이 지구는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자석과 같은 힘은 누가 가져왔느냐? 바로 우리들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의 별성입니다. 바로 우리의 능동적이고 활용적이고 움죽거릴 수 있는 그 무한의 능력을 가진 생명선입니다. 그 생명선이 떠다니다 떠다니다가 한데 모아진 것이 바로 지구덩어리라고 본다면 그 능력에 의해서 금강자석이라고 이름을 붙여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돌아가면서 자석에 붙어서 있는 게 아니라, 자석에 의해서 이렇게 마음을 내가지고 자석에 의해서 궤도를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돌아가고 있는데 여러분이 어떠한 물건이든지 내 앞에 닥쳤을 때는 체가 없는 마음이 마음을 동작을 시키는데 이것을 다 놓고 돌아간다면 자석에서 붙을 건 붙고 떨어질 건 떨어지고 해서 분해가 다 되는 것입니다.
그 자석이 떨어질 것도 없고 붙을 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이냐? 왜 그런가? 이 금강자석이라는 것은 물건인 쇠자석이 아니라 체가 없는 자석이라서 예를 들어 헝겊 쪼가리도 붙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헝겊 쪼가리든지 쇠 쪼가리든지 다 거기에 의해서 돌아가게 돼 있고 분해가 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지금 현실에서 보십시오. 그 자석에다가 쇠를 하나 붙여보면 그 쇠 붙인 데가 또 자석이 돼서 다른 게 또 붙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이 마음의 능동적이고 묘하고 광대무변한 이 금강자석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못 믿어 하고 업신여기고, 바깥으로 신을 찾아서 ‘아이고 저 위대한 신을 내가 찾으면 잘될 테지.’ 하는데 타의에서 찾는 그 마음은 다 지금부터라도 소멸시키고 모든 것을 안에서 구하는 데에 역점을 두시고 탐구하는 데에 역점을 두시는 것이 옳을 줄 압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책 한 권 끼고 공책 하나 들고 연필 하나 가지고 책 보따리를 어깨에다 척 둘러매고 가서 공부를 하면 됐습니다. 지금은 안 그렇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시대가 벌써 변천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또 옛날에 하던 그 방식으로 자손들을 키운대도 아니 됩니다. 지금 시대는 마음의 에너지로 하여금, 그 금강자석의 에너지로 인해서 거기에서 마음과 마음이 이끌려서 한데로 새지 않게 만드는 자석을 가지고 해야지, 몸을 붙들려고 하고 말로 하려고 하니까 이거는 가뜩이나 창살 없는 감옥에서…. 지금 끌려가는 형국인데 말입니다. 허허허, 가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끌려가서 죽는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이 공부는 죽고 사는 게 없고 또 생사윤회에 끄달리지 않으며 또는 우리가 자유권을 가질 수 있는 공부입니다. 자기가 뿌려놓은 씨들도 자기 자석에 의해서, 그 자석의 위력이 딴 데로 새지 않는 마음, 올바른 마음을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여러분한테는 다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이 육신, 허수아비 같은 육신만 잡으려고 하니까 그것은 안되는 법입니다. 육신은 개방시키면서 마음으로는 항상 그렇게 자석과 같은 마음으로 서로 잡아당긴다면 그것이 바로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지금 여기서 주인공이라고 하는 그 이름을 버리고, 버린 게 아니라 저절로 스스로 놔지고 능동적으로 지혜 있게 활용을 하면서 걸림 없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대로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벌써 견성해가지고 성불로 가는 도중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또 아직 발로가 되지 않은 분이 있고 발로가 돼도 지금 발걸음 하나 떼놓을 수 없는 형상인 분들이 있고,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세 층으로 나누어봅시다. 발로가 된 분에 한해서는 그때는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그냥 그 금강자석은 내면에서 묵직하게 뒷받침이 되죠. 그래서 유위의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나 무루(無漏)의, 진여(眞如)의 무한 능력을 가진 마음이 동시에, 몸이 일을 할 때는 진여의 능력이 뒷받침해 주고, 또 무루의 마음을 한생각 내서 체가 없이 일을 하는 데는 또 오관을 통해서 몸이 뒷받침을 해 주죠. 이렇게 양면을 다양하게 도와줄 수 있는 것이 바로 불(佛)과 법(法)입니다. ‘불성과 법이 둘이 아님으로써 승보(僧寶)도 그러하니라.’ 한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자 바로 우리의 행이며 말이며 뜻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부처님 법이 따로 있고 우리의 생활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부터는 그것을 고치십시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그렇게 놓고 참선을 하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오손도손 얘기를 하는 것도 참선이요, 말다툼을 한다 하더라도 참선입니다. 만약에 그 근본을, 그렇게 돼 있는 근본을 아실 것 같으면 우리는 화가 나도 화를 자재할 수 있죠. 놓고 돌아가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싸움을 했다고 일년 이년, 생명이 다할 때까지 화가 나 있는 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고정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웃음도 한계가 있고 우는 것도 한계가 있고 속상한 것도 한계가 있고 잘사는 것도 한계가 있고 못사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고정된 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공했다는 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셋째 일요일날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 것과 또 첫째 일요일날 설법을 들었어도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으면 질문하시기 바라고 또 내가 이렇게 말한 것도 이해가 안 가시는 분이 있으면 질문하는 것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거 이렇게 아는데….’ 그건 그분의 생각입니다. 똑같은 말을 했어도 다 각자 다르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일하게 돌아가나 하고 한번 툭툭, 다리를 건너가는데 이 다리가 제대로 됐는지 한번 쳐보는 것도 좋다 이겁니다.
참으로 지금 공부하는 분들, 우리 한마음선원 도량에 흡족하고 기쁜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공부를 함으로써 우리가…, 또 한마디 하고 넘어가야 될 일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문제에 대해 여러분은 납득을 하십니까? 세계적으로 납득을 하고 국가적으로도 납득을 하고 우리 생활적으로도 납득을 하시고 사회적으로도 납득을 하시겠죠. 물론 저보다도 더 잘 아시겠죠. 그렇게 아시고 가는 분들이 만약에 이 공부를 하신다면, 한생각에 모든 걸 아주 자재력있게 해결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도 지혜적이고도, 여러분의 불성의 그 능력을 다 같이 한 주먹에 쥐고, 이것은 한 손에 들은 걸로써 한생각을 해서 해결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86, ’88 문제도 아주 심각한 문제지마는 우리는 지금도 가난한 전세방에 그것도 반쪽으로 나누어진 이 전세방에서 그나마도 모두가 참 공평하지도 못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가 참 살기가 극난하다고 봅니다. 살기가 극난한 게 아니라 겁난다 이겁니다.
왜 겁나느냐. 나는 6ㆍ25를 지내봤으니까 압니다. 지금은요, 6ㆍ25처럼 그렇게만 싸운대도 또 겁 안 납니다, 달아나가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지금은 공중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조그마한 새우 싸움이 만약에 고래 싸움이 된다면 큰 문제가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공부가 좀 안됐다 하더라도 한생각으로서 급하면 급한 대로 보이면 보이는 대로 ‘이건 이렇게 돼야겠어!’ ‘지금 우리 방석을 튼튼히 해야 되겠다.’ ‘천만에! 여기에는 너희들이 손을 못 댄다!’라는 마음으로 나서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몸도 그렇습니다. 모든 게 작으나 크나 ‘이건 못한다’ 하는 약한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금강자석은 약하지 않은 겁니다. 모든 자석은 한데 합쳐져서…, 우리는 조직입니다. 지금 지구 안에 있는 여러분이 바로 조직체입니다. 한 그릇 안에서 우리는 한 살림을 하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이 자체가 큰 살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살림을 하는 데는 한생각이, 그 생각이 아주 필요합니다. 만약에 어떠한 머저리 같은 문제가 일어난다면 모두가 한생각, 지혜를 이런 때 써야 하는 겁니다. ‘아하, 저 사람네들은 안하무인이니까 저 사람네들의 주장심, 즉 말하자면 금강자석이 있는 것을 홀딱 여기다 붙여버리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 됩니다. 또 그 사람이 아주 유망하다 할 때는 금강석을 그쪽에다가 붙여주죠. 그쪽 자석에다 붙여준단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 백 명의 능력보다도 한생각이 커지게 됩니다. 만약에 열 사람의 능력을 거기다 보충해 준다면, 바로 금강자석의 그 능력에 투입을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기울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자유권을 가졌기 때문에…. 이걸 말로 어떻게 다 하리까? 하나하나 모든 것이 달리 나투어서 돌아가는 것을 여러분이 지혜로써 닥치는 대로 하는 것을 알아야지 어떻게 내가 이건 이렇다 저건 저렇다 하고 이루종차 가르칩니까?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깨닫는 데만 역점을 두시는 게 좋다. 그러면서도 가정이라는 조그마한 데의 문제를 놓고 검토하고 실험해라. 만약에 내가 이것 때문에 지금 큰 문제가 생긴다 할 때 이것을 자석에다 탁 놓는단 말입니다. 놓으면 이 자석은 자기의 근본에서 나오는 분신이라서 에너지처럼 돌아다니며 다 해결을 합니다. 무에서는 무대로 해결을 하고 유에서는 유대로 부지런하게 뛴다면 이거는 정말 시쳇말로 ‘왔다’입니다. 응? 그렇게 걸리지 않고 능히 한생각에 우주가 들릴 수 있다면, 또 한생각에 우주를 덮을 수 있고 돌릴 수 있다면 이거보다 좋은 일이 어딨습니까? 이것은 바로 50%의 미완성을 되찾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억겁 전년서부터 이렇게 진화돼서 나오면서 인간까지 등장을 했는데 이 등장한 자체가 바로 여기에서 배우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를 학습 도장이라고도 볼 수 있고 공부하는 학교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연구하는 연구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구실에서 연구를 하고 탐구해 가지고 지구 자체의 색상에서 벗어나서 우리 한생각으로서 일체 만법의 능력을 바로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손이 안 닿는 데가 없고 나 아님이 없고 내 자리 아님이 없어서 바로 우주적으로도 삼천대천세계적으로도 우리는 능히 한생각에 그쪽으로 고개를 끄떡만 해도 벌써 거기 가서 같이 상응하면서 한번 거기서 하루 동안 살아보기도 할 겁니다. 하루 동안 살고 여기 왔더니 벌써 일주일이 걸렸다고 하던가요? 또 하루 동안 살았더니 아, 일년이 됐답디다. 하루 동안 살았더니 만년이 됐다 합디다.
이 뜻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사람이 이름을 지어서 하루다 이틀이다 한 달이다, 또는 가을이다 봄이다 이렇게 사계절을 정해놓은 거니 우리가 얼마나 참 똑똑합니까? 사계절을 이렇게 정해놓고 말입니다. 그러니깐 하나 버릴 게 없는 거죠.
우리가 하나 쓸 게 없다는 것은 너무 나투어서 빨리 돌아가니까 공했다고 한 거지…. 여러분이 참 그거를 납득해서 공부하는 데 열심히 할 수 있는 근본을 스님들한테도 자꾸 여쭤보고 하시는 게 참 좋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깨달았다 할지라도 겸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 이 마음으로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조금 싹이 났다고 해서 내가 나라고 세우고 모두를 내 눈 아래로 본다면 그것은 이룬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 나가는, 마음 자세가 올바르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또 꿈에 보인다고 하면서 꿈과 현실을 가리는데 꿈에 이러이러해서 나는 요런 게 됐으니까 요렇게 해야겠다 하는데 왜 꿈을 가지고 생각을 하느냐 말입니다. 꿈도 현실이요, 현실도 꿈이니 둘이 아닙니다. 둘이 아닌 데서 내 중심을 잡아서 주인공에 탁 놓고 놓은 자체를 생각할 때 믿음직하게 듬직하게 하면 바쁜 것이 바쁘지도 않아! 그랬는데 내가 바쁘지도 않은 사이에 벌써 일은 돌아왔어. 일은 해결이 됐어.
이렇게 되는 것인데 꿈에 이러니까 내가 이렇게, 이것이 무엇인가? 그것도 꿈에 알았으면 나를 공부시키려는 조짐이구나 하고 좋게 돌려서 놓고, 놓고 또 가다 생각나면 또 한 번 생각해보고 탐구해보고 또 놓아! 그걸 노상 붙들고 가면 그냥 죽죽 오는 것이, 오는 것도 없는 게 오는 것이 그냥 막혀버리면 살림을 어떡합니까? 여러분이 살림을 어떻게 걸리지 않고 하겠습니까? 마음입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도 이런 말씀 하셨지 않습니까? 오조 홍인 선사가 금강경에서 한 대목을 설해 주시면서 말입니다, “너는 말을 하지 말고 말을 해봐라.” 이러니까 육조 스님이 “내 이 몸이 청정한 줄 어찌 알았으리까.” 하셨더랍니다.
청정하다 하는 것은 더럽고 깨끗한 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렵고 어렵지 않은 거를 내가 다 하는 거를, 일체 만법의 모든 것을 하나도 뜀이 없이 내가 한다는,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청정함을 뜻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청정함을 어떻게 알았으리까? 스스로 내가 갖추어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으리까? 스스로 내가 흔들리지 않음을 어떻게 알았으리까? 스스로 일체 만법의 마음을 내는 줄 어떻게 알았으리까?” 이렇게 말 한마디 하게 되자 그것은 바로 오조 홍인 선사나 육조 혜능 선사가 둘이 아니게 하나로 그냥 합쳐져 버렸어요.
합쳐져 버렸으니까 그것은 이쪽 쇳덩어리가 저쪽 쇳덩어리로 한데, 예를 들어서 자석과 같이 붙어버린 것처럼 돼버렸거든. 그러니까 “네가 가는 것이 내가 가는 것이고 내가 가는 것이 네가 가는 것이니 이 바리때와 가사 장삼을 가지고 가다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바리때나 가사 장삼이 법을 주고받는다고 생각을 한다면 만날 싸움이 날 테니 이건 네 대에 없애라.” 이럭하고선 마지막 주셨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거를 가만히 생각해볼 때에, 서로 둘이 말을 할 때는 이게 둘이 아닌 것입니다. 말과 뜻이 맞으면. 뜻이 맞지 않으면 벌써 둘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 공부하는 사람들은 뜻이 맞지 않으나 맞으나, 이것이 뜻이 맞지 않게 말을 해서 저쪽 상대방에게 해로울 기세가 보이고 또 역정을 낼 것 같으면 말은 하지 말고 안에다가 놓으면, 거기에다가 일임해서 놓으면 바로 그쪽 자석으로 염파가 가죠. 오관을 통해서 다 염파로 통하게 돼 있죠. 그래서 이 우주간 법계는 거미줄같이 전부 허공에 쳐져 있다 이겁니다. 아마 천체망원경을 가지고 본다면 한 부분이라도 볼 것입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85년 7월 21일
2007-08-08 오후 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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