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좋은 결과 또는 올바른 목적이라는 명분 아래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과 절차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올바른 과정과 절차가 결국은 올바른 목적의 성취와 좋은 결과를 담보한다는 것을 망각한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에 어떤 행위를 하면 그것이 습성화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업이다. 업은 반드시 결과를 산출하기 마련인데, 어떤 결과를 겨냥한 행위가 꼭 그 결과를 산출하는 데서 그 영향력이 다한다는 법은 없다. 누적된 행위의 방식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결과이며, 그것은 그러한 방식에 익숙한 중생들이 사는 세상을 구성하는 힘이 된다.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은 그 속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습성, 즉 업이 가장 친숙하고도 편하게 여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겠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가 어떤 좋은 결과나 목적을 내세우며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그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어떤 방법과 과정, 그리고 절차를 밟아나가는가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주목하지 않아도 주목을 받을만한 곳에서 절차와 과정을 무시한 일이 일어났기에, 이러한 문제를 좀 깊이있게 논하게 된 좋은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바로 KBS 수신료 인상 문제가 그것이다.
민주사회는 여론이 이끌어가는 사회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고, KBS는 여론을 형성하고 수렴하는 대표적 기구이다. 바로 그런 곳에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계획을 수립하고 여론을 수렴하여 완성된 안을 마련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미리 결정된 안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공청회 등을 이용하여 졸속한 결정을 내리려 했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여론을 조작하고 이용하는데 도가 텃다는 자신감의 발로가 아니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내놓은 안이 누가 뭐래도 가장 좋은 안이며, 또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식으로 변명하지 말 일이다. 지자천려(知者千慮)에도 필유일실(必有一失)! “지혜로운 사람이 아무리 깊이 생각한다 해도 반드시 하나 빠뜨리는 일이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 마음으로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모아나가는 방식이야말로 언론 기관에서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것인데 왜 이리 오만한 행태를 보이는가?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참으로 한심스럽다.
또 하나, 힘들고 어렵게 돌아가는 것 같은 절차가 실제로는 가장 안전하고 또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KBS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겸손하게 뜻을 묻고, 다른 대안은 없는 것인가를 묻는 기관에 대하여는 자연 호감이 증폭될 수 있고, 그것이 힘이 되어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방송매체의 대표라 할 수 있는 KBS야 말로 이러한 국민적 호감을 바탕으로 해야 할 대표적인 기관이기에 이번의 졸속한 행태에 대한 실망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다. 시청율의 부침에 곤두세우는 신경의 몇 %만 쓴다 하더라도 이러한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한다. 여론 조성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KBS와 같은 기관이 가장 앞장서서 여론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여러 사람을 뜻을 모으는 데 최선을 다하고, 그 뜻을 모아 앞날의 방향을 결정하는 엄정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털끝만큼이라도 그렇지 않은 모습이 보인다면, 이는 바로 우리 사회의 민주적 운영에 경종을 울리는 불길한 조짐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KBS의 수신료 인상을 둘러싼 납득할 수 없는 행태는 조그만 조짐에 그치는 것이 아닌, 상당히 심각한 경종이라 할 수 있다. 준비된 결론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절차를 형식적으로 밟는 방식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작해 내는 행태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큰 기둥인 공영방송이라는 위치, 살얼음 밟듯 조심해야 할 엄하고 두려운 자리라는 자각이 있어야 할 것이다.
성태용건국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