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되려면
마음공부를 해 나간다고 하면서도 타력으로 빠지거나 사주와 팔자를 물으러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그런 의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부처님의 정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부처님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부처님의 참다운 제자가 될 수 있을는지요?
우리가 무조건 부처님 앞에만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부처님의 진짜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깎고도 더부룩하게 기르고 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머리를 안 깎고도 아주 단정히 깎고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생명이 있고 마음내고 몸이 움죽거리는 이 삼위일체가 회전되고 있다는 것이죠. 다른 말로 또 얘기하자면 대승 불교니 소승 불교니 선 불교니 이렇게 말을 하죠. 그러나 동시에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이름입니다만 주인공(主人空)이라고 하는 그 뜻을 항상 얘기해서 잘 납득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이름을 내세울 수 없는 게 주인공입니다. 한 물건도 없다고 육조 스님은 말씀하셨죠. 뒤집어서 놓고 보면 봄동산에 한 물건이 꽉 차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어떤 것이든 내세울 게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신발을 휙 벗어 놓고는 아무 걸림이 없이 여기 들어오듯, 집 안에서 걸레를 빨아서 휙 던져 놓듯 우리 인생은 그렇게 지금 찰나찰나 나투면서 진화되면서 발전하면서 돌아가고 있죠.
그런데 우리가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병고는 어떤 것인가. 여러분이 모두 절에 다녀도 똑같은 소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넓은 사람도 있고 좁은 사람도 있고 그렇죠. 사람들이 절에 다니면서 기도를 한다든지 기도를 부친다든지, 또는 백 배를 하든지 천 배를 하든지 또 일 배를 하든지 그건 여러분의 정성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마음에 따라서 몸이 움죽거려지는 거니까요.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과거에 어떤 죄업이 있느니 업보가 많으니 이런 데에 걸리지 말란 말입니다.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문제들이라든가 또는 그걸로 인해서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팔자가 이렇다느니 운명이 이렇다느니 이러시는데, 이런 데 걸리지 않아야 되겠다는 얘깁니다.
물론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한테 그런 의식을 씌워 주기도 싫을 뿐만 아니라 씌워 주기 이전에 벗겨 줘야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벗어진다면 여러분도 벗어질 거고 내가 씌어졌다면 여러분도 씌어질 겁니다. 길잡이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닙니다. 내가 배가 부르면 일체 만물만생 일체제불이 다 배가 부르듯이, 내 한생각으로 비가 내리게 해서 일체 만물만생을 전부 촉촉하게 배를 불리듯이 말입니다. 이 마음이라는 게 참 묘한 겁니다. 그러니 새달에, 훗달에 어떠니저떠니, 내년에 좋으니 나쁘니, 이런 것에 속지 말라 이 소립니다. 말로 따져서 하자면 무여(無如)라는 것도 있고 일여(一如)라는 것도 있고 여여(如如)라는 것도 있고 즉여(卽如)라는 것도 있겠죠. 이것을 바로 사구공법(四句空法)이라고 말할 수 있죠. 이것을 타파하지 않으면 우린 자유권을 얻지 못해요.
우리가 지금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움죽거리고 있는데, 끝간 데 없는 이 평등 진리 속에서 우리는 항상 그런 데 끄달려서 속고 삽니다. 속아서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끝간 데 없이 모습을 바꿔 가지고 또 나올 겁니다. 내가 항상 이런 말을 되풀이합니다만 팔만대장경이 글자로만 쓰여 있는 게 아닙니다. 병풍 둘러치듯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게 팔만대장경의 근본이자 바로 실행으로 들어가는 즉행이며 즉여란 말입니다. 우리가 말 한마디라도 즉설이 돼야 법으로 행해지게 되죠. 한데 떨어지면 안 되거든요. 말 한마디 해서 한데 떨어지면 위로는 부처님께 누가 되고 또 아래로는 따르는 사람에게 햇빛을 줄 수가 없어요. 햇빛! 묵은 빚을 갚지 못하고 햇빛을 줄 수 없으니 자라는 애들은 어떻게 자라겠느냐 이 소리지요.
여러분은 생각을 깊이 하셔야 합니다. 부처님은 자기 주인공 속에, 즉 말하자면 우주 섭류의 소용돌이, 법계의 소용돌이, 그 소용돌이 속에 나와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있거든요. 한마음 속에 말입니다. 주인공이라는 것이 그것이거든요. 그러니 부처님을 믿고 다니더라도 둘 아니게 볼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법당에 오면 부처님 몸과 내 몸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마음과 내 마음이 둘이 아니요, 부처님 생명과 내 생명이 둘이 아니니 어찌 일체 만물의 생명과 나의 생명이 다르며, 법이 다르며, 움죽거리는 게 다르겠습니까? 그래서 불과 법이 둘이 아닐지언댄 승보도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이 몸은 그냥 따라다니는 껍데기입니다. 그런 껍데기 차와 같은 거죠. 운전수가 가자는 대로 가는 차.
그러나 그 껍데기도 소용없는 게 아니죠. 그건 화두예요!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화두죠! 내가 없었더라면 우주도 있는지를 몰랐고 이 세상도 있는지를 몰랐고 상대도 있는지를 몰랐다 이거죠. 그런데 내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지수화풍의 근원이 있었기 때문에 생명체들이 나왔죠. 그렇듯이 지수화풍이 있기 때문에 일체, 물질적인 이 모든 것이 지수화풍이 모여서 움죽거리고 있거든요. 우리는 이 지수화풍이, 껍데기가 움죽거리는 것보다도 유(有)의 법과 무(無)의 법이 같이 움죽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겁니다. 마음 따로 있고 육체 따로 움죽거리고 이러는 게 아니죠. 마음내는 것 따로 있고 움죽거리는 육체 따로 있고, 마음내는 놈 따로 있고 마음내기 이전 놈이 따로 있고 그런 것도 아니고요. 그놈이 다 하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이 의식적으로 ‘내가 여기다가 갖다 놓지 않으면 죄를 사해 주지 않겠지. 여기 칠성님 전에 놓지 않으면 우리 남편이나 자식들의 명이 길지 않겠지. 약사보살한테 놓지 않으면 병이 안 낫겠지.’ 이런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건 고정됨도 없을 뿐더러 고정관념도 없다 이거죠. 생각해 보세요. 만나는 것도 말하는 것도,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먹는 것도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됨이 있는가. 모두가 공했어요. 공한 것은 없어서 공했다는 게 아니거든요. 한 찰나 찰나 나투며 돌아가기 때문이죠. 어린애 적의 나를 나라고 할까요, 늙었을 적의 나를 나라고 할까요? 나라는 게 없어요. 그래서 한 물건도 없다고 말씀하신 게 꽉 찼기 때문에, 한 물건이 꽉 찼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거죠.
원효 대사는 한 물건이 없다고 하기 이전에, 빗자루로 깨끗이 쓸어 놓으니까 낙엽을 일부러 갖다가 뿌려 놓으면서, 잘못 쓸었다 이거예요. 그거 한번 생각해 보셨어요? 마음을 가난하게 가진다면 항상 바둥거리고 지혜로운 생각이 안 납니다. 왜 놓지를 못해요? 아까 내가 얘기했듯이 신발 벗어 놓고 들어오듯 그렇게 착을 두지 말고 놓아라 이겁니다. 본래 놓고 가는 거니까. 본래 제자리걸음으로 끝간 데 없이 놓고 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항상 이게 옳으니 그게 옳으니 하고 따지거든요. 그렇게 따지는 것은, 이건 배고 이건 돛대고 이건 사공이고 이건 물이고 이렇게 따지는 것은 교리에 관한 건이겠지요. 그런데 지금 저는 목마르면 직접 그냥 마시는 걸 말하는 겁니다. 아무리 여러분이 불제자로서 수십 년을 다녔다 하더라도 실천이 아니라면 소용없는 겁니다. 목마른데 물을 보고도 못 먹는다면 ‘아! 여기 이렇게 좋은 물이 있다더라.’ 하고 보고 듣고 해도 자유스럽게 떠먹지 못하고 떠 주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묵은 빚을 갚으며 햇빛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함이 없이 시험을 보려면…
대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입니다. 며칠 전에 고3 법회에 갔는데 스님께서 나를 버리고 주인공으로 살라는 말씀을 해 주셨거든요. 그런데 제가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지 법문을 들을 때는 ‘그래, 정말 나는 없는 거다.’ 하고 진짜 느끼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또 ‘정말 할 수 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다.’ 그런 마음이 들었는데 스님 법회가 끝나고 얼마 안 있어서 갑자기 자신감도 없어지고 어떤 때는 정말 믿지 못하고 나를 못 버리는 거에 대해서 화가 나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하면 스님 말씀처럼 함이 없이 주인공에 맡기면서 시험을 볼 수 있는가 해서 질문을 올립니다.
그런데요,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고 또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진다고 그랬죠? 그것이 가만히 편안하게 다 버리고 있으란 말이 아니죠. 어떻게 들었어요? 연방 발이 고정되게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떼어 놓는 거죠. 그러니까 아까 얘기할 때 ‘나를 버려야 된다.’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자불이 하는 거다’ 한다면 나를 완전히 버리는 거예요. 안 그래요? 간략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나를 버려라’ 하는 것은 나를 버리고 중심 즉, 자불(自佛)만 믿어라 이 소리거든요. 학생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이 없으면 몸은 송장이 되거든요. 내 몸이 없는데 어떻게 자불이 있겠나. 그러니 몸뚱이는 자동차와 같고 자불은 운전수와 같고 기름과 같거든. 그러니 차는 운전수를 믿어야지.
또 딴 걸로 비유한다면 저 나무들이 뿌리 없이 사는 거 봤나요? 본래 자불과 학생의 육신은 같이 집을 삼아서 있어. 저 봐. 나무도 뿌리와 싹과 같이 달려 있지? 본래 그렇게 돼 있다고! 그러니까 믿고 안 믿고가 없이 믿어야 돼. 학생을 리드해 나가고 학생의 보디가드가 돼 줄 수 있고 학생을 이끌어 줄 수 있고 해결해 줄 수 있고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그런 바로 자기의 참 기사니까. 그러니 시험을 보더라도 이거는 자불 주인공만이 이거, 이런 과목은 이렇게 할 수 있고 저런 과목을 볼 때 저렇게 할 수 있고 또 뭐, 동그라미를 그린다든가 거길 찍어서 놓는다든가 이런 데도 다 거기서 그렇게 하면서 찍고 돌아가야 돼. 모르는 거는 이 안에서 하게 만들어야 돼. 바깥에서 하면 도저히 올팡갈팡이 돼서 잘못돼.
이런 소리를 들었어. 누가 방콕으로 처음에 갔는데, 여기서 시험을 봐도 안 된다 그러기에 그리로 가라고 그랬어. 그랬더니 가서 아마 절정에 도달했던 모양이야. 자기가 말도 통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냥 아주 간절하게 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말의 뜻을 바깥으로 자꾸 마음에서 내 주니까 그 뜻대로 했던 모양이야. 그러니까 방콕에서 말을 얼른 얼른 배웠다는 거지. 금방 배워서 거기 졸업을 하고 또 중국으로 갔어요. 중국에 가서도 그렇게 할 거야.
그러니까 이게 사람의 지혜로운 요량에 많이 달려 있어요. 그런데 부모들은 지금 이렇게 시급한 학생들을 놔두고도 그거 한마디 얘기 안 해 주는 부모들이 많아요. 그거 뭐 돈이 들으니 못해요, 재산이 없어지니 못해요, 글쎄. 자손들이 아무리 해도 말을 안 들으면 ‘너의 주인공과 나와 둘이 아닌 까닭에 다 너에게도 불이 켜질 것이다. 이거를 그저 배우고 또 앞으로는 점점 잘 알게 될 것이다.’ 하고 관해 줘야 정작 싫다고 하는 사람에게까지도 뜻이 가지요. 그리고 따르는 사람한텐 연방 해 주고요.
어떤 사람은 하도 자기 엄마 말을 안 들어서 밥 먹는 테이블에도 붙여 놓고 벽에도 붙여 놓고 변소 안에도 붙여 놓고 그랬더래요. 그랬더니 그저 그렇게 하는 거니까 한번 해 보자 했던 모양이지요. 그렇게 해 보고 가니까 살면서 아주 좋거든요. 그러니까 그 후에 엄마더러 그러더래요. “나는 처음에는 ‘어디 정말 되나 안되나 보자.’ 하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누가 해 주고 가져가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시시때때로 그렇게 대치를 하고 보호를 하고 그렇게 나가는 겁디다.” 하고 고맙다고 하더래요. 그랬듯이 우리가 아무리 싫다 그러더라도 마음으로 관해 주고 벽에 붙여 놓고 한번 해 본다면…. 그건 진저리나게 하는 거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공덕이 있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요. 하여튼 모든 것이 우리가 생각하고 마음먹기에 달린 건데 마음을 제대로 먹지 않아서 분란이 일어나고 그러는 거지, 마음을 제대로만 먹는다면 분란이 날 것도 앞서 대처해서 없애 버릴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렇게 처음에는 항상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자불 불성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참나가 있는 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 참나가 있으니까 그걸 믿고 여여한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여여한 줄 알았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걸 알아야 하고,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걸 알았다면 일체 만법을 들이고 내고 아무리 끝없이 해도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알아야 구경경지에 이른다 이런 소리입니다.
꼭 명심해야 될 것이 있다면…
얼마 전 캄보디아로 여행을 갔던 여행객들이 탄 비행기가 추락을 해서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 이제 좀 여유가 생겨서 평생 가 보지 못했던 곳들을 좀 다니면서 노년을 마무리하려고 계획 중인데 정말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든 부처님을 의지처로 삼아서 부처님의 가피력을 잃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고 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부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짧은 거리를 움직일 때마다 부처님께 사고나지 않게 기도하면서 차를 타고 있습니다. 스님, 어떠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마음을 내야 좋은 모습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을까요? 살아생전에 꼭 명심하고 유념해서 마음을 내야 할 것들이 과연 어떤 것인지 가르침 주십시오.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우기 이전에, 부처님께서도 진리를 탐구하셨고 그 진리를 깨치셔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부처님 법을 배우기 이전에 꼭 명심하고 알아 둬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
대신 살아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거, 밥 먹고 똥 싸고 잠자고 죽는 것을 대신 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린 이 지구라는 한 주머니 속에서 미생물 하나도 버리지 않고 복닥복닥 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잘 아시죠? 그렇게 거기 한 주머니 속에서는 미생물 하나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속에서 개개인들이 모두 탄생됩니다. 우리가 생산처라고 하는 그 문제에 의해서 샛별을 받고 정자 난자를 받아서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인생이 태어난단 말입니다. 태어나는 그 까닭은 생명의 근본이 바로 거기에 결부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몸을 가만히 보세요. 지구의 공기주머니나 내 모습의 공기주머니나 다르지 않다 이런 겁니다. 다를 리가 없다. 많은 생명체들 중에 하나가 바깥으로 뛰어나온다면 죽습니다. 그리고 이 지구에서도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죠. 죽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지구 주머니 한 주머니에 담겨 있기 때문에 공체로서 이렇게 살고 있다. 우리가 전부 공체다. 우주가 달리 있고 지구가 달리 있고 우리 사는 게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 더불어 같이 지금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그 마음 씀씀이는 자유스러운 겁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저기다 써 달라고 돈을 가져 왔는데 내가 마음대로 딴 데다 썼다고 합시다. 이건 자유스럽게 쓸 수 있으면서도 근본을 지키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 거라고 등한시해서 중요시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생각한다면 그건 내 탓이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부 하나로 돌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아무 말도 없이 갖다 놨다 하더라도 그 갖다 놓은 사람이 알고 있어요. 얼마 넣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죠. 알고 있기 때문에 불성이 알고 우주간 법계에서 다 알고 있죠. 그래서 거짓이라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엉뚱하게도 남을 고달프게 하면서 돈을 긁어모아 불사한다면 이것도 위법이죠. 단돈 얼마라도 진짜 내가 생각이 있어서 할 때에 그것이 바로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몸이 공체로서 사는데 우리가 알고 보면 우주와 더불어 공생이면서 공심입니다. 그리고 공체입니다. 그리고 공용을 하고 삽니다. 그리고 공식하고 삽니다. 공식은 만법을 들이고 내는데 하나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 있는고?’ 하고 옛날 선지식들이 물었습니다. 정말 만법을 들이고 내서, 들이고 내는 법을 굴려서 그 하나가 어디 있는가를 진정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굴리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 씀씀이에 달려 있겠죠. 잘못된 건 잘못된 것대로 회개를 하고 거기다 놔 버리고 잘되는 건 감사하게 놓고 굴려야 올바로 굴려진다 이겁니다. 그리고 끄트머리에 가서는 반드시 ‘네가 있다는 것은 네가 증명할 수 있어.’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전체가 모두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습니다. 이 둘이 아닌 도리를 여러분께서 잘 아신다면 정말 시쳇말로 ‘왔다’죠. 견성만이 아니라 성불까지도 거기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견성이다 성불이다 하는 것도 이름이지 그걸 누가 갖다 주는 게 아닙니다.
연등부처님께서 “너는 이다음에 석가가 되거라.”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하시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 말을 하신 분도 그분이고 그 말을 듣는 분도 그분이에요. 화했으니까요. 그러니 여러분이 이렇게 간단하게 요체로써 실천해 간다면 250계고 300계고 간에 계율을 일부러 지키려 애쓰지 않아도 그냥 자연적으로 낱낱이 지켜지는 거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내가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윗분들도 돌아가시고 또 아랫사람들도 돌아가고 그래서 영가들이 많습니다. 산 분이 50%라면 영령들이 50%예요. 모르는 분들은 자기 고달픔에 힘들고 또 영령들은 몰라서 고달프니까 힘들고, 자기가 모르는 탓으로 영령들도 모르죠. 죽으면 부딪침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못하게 되니까요. 근데 산 사람이 공부를 하고 모든 거를 거기다가 일임하고 놓는다면 그대로 그냥 공용이 되죠.
그러니 그 모든 것이 영령들도 그렇고 조상들도, 조상이 영령이죠. 그 영령들께서도 그렇고 우리도…, 즉 말하자면 이 세상에 살려면 이름을 붙여야 하죠. 그런데 인과성 영계성 유전성 업보성의 문제 등등이 입력되었다면 여러분께서 그 과보를 꼭 받고야 마는 그런 이치가 있습니다. 오신통이 있는데 그것을 벗어나서 누진으로 가게 되면 누진이 바로 여러분의 자동적인 컴퓨터와 같다 이런 소립니다.
이걸 잘 숙고해서 들으세요. 그러면 지금 생활에도 좋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훨훨 털고 갈 것이니까요. 살아서 훨훨 털지 못하면 죽어서도 훨훨 털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자동적인 컴퓨터에서는 과거로부터 내가 한 대로 수없이 입력된 것이 나온단 얘기죠. 그래서 요다음에 죽어서 또 다시 나와도 그걸 짊어지고 나온단 얘기예요. 그러니까 움쭉 못하고 그걸 받아야만 하겠죠.
근데 그 고를 없애려고 한다면 나온 그 자리에다 다시 놔야 없어지지 그렇지 않으면 없어질 수가 없어요. 컴퓨터에 들어간 입력은 다른 걸 넣어야 없어지지 다른 걸 넣지 않으면 없어질 수가 없죠. 그래서 이 공부를 하라고 하라고 그러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에서 사시면서 얼마나 고달픕니까?
근데 사람이 모두, 자기가 살았다, 자기가 했다, 자기가 망했다, 자기가 흥했다 이렇게 하면서 가니까 문제가 커지죠. 제가 말하는 게 말 같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공부 열심히 하셔야 됩니다. 관하는 거 말입니다. 내가 예전에 이랬죠. 종 문서를 없애려고 종 문서를 들고 맡기는데, 종 문서를 맡겨도 그냥 털썩 믿고 맡기는 게 아니라 못 믿어서 줬다 뺐었다 줬다 뺐었다 하거든요. 그러니까 종 문서가 없어지려야 없어질 수가 없죠.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가 공생이다. 모두가 공심이다. 또 공체다. 공용을 하고 산다. 공식이다.’라고 한 겁니다. 이 공식은 먹는 것만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모두 해 나가는 거를 말하는 겁니다. 들이고 내는 거를 말입니다. 그러니 그 모두가 하나로 돌아간다 이겁니다. ‘만 불이 일 불이요 일 불이 만 불이라 만 불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일 불이 따로 있지 않다.’ 즉 말하자면 일 불도 공해서 일 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거지요. 하지만 일 불로 돌아간다는 것만 알아도 그거를 빨리 수습할 수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될 수 있으면 가정에 이익 되고 화목하시길 바랍니다. 이 공부를 하면 저절로 화목해지고 저절로 의합해집니다. 또 나가서 안 들어오는 자식들도 다 들어오고 나가지도 않게 되고 자꾸자꾸 바뀐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진짜 믿고 그렇게 하신다면 진짜 그렇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