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1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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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한국의 다성(茶聖)
조선 후기 왕권이 약화되고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전통적 성리학에 반기를 드는 주장이 대두된다. 사실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고자하는 학문적 경향을 가진 지식인들은 승려들과 교유를 통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한다. 승려들 역시 사원 경제가 더욱 어려워지자 새로운 사상과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사찰의 승려들과 문사들 사이에서의 교유로 이어져 차(茶)는 승려들의 수행이나 청빈한 문사들의 마음(心)을 전하는 하나의 매개물이 된다. 이처럼 한국의 차문화는 동면(冬眠)에서 깨어나 새로운 영초(靈草)를 피우듯 조선의 침체기를 거치면서 차(茶)와 선(禪)의 경지가 하나라는 다도(茶道)문화를 꽃 피우게 된다.
이처럼 열악한 우리의 차를 중흥시킨 인물은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선사(1786~1866)이다. 그는 조선 후기 해남 대흥사 12대 종사로 15세에 출가하여 선(禪)과 교(敎), 시(詩), 차(茶)에 밝았다. 초의가 교유한 인물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를 비롯하여 많은 지식인들로 그들의 사상은 초의 선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초의가 다산을 만나자 승려들은 그가 유림의 세계로 돌아갈 조짐이 있다고 보아 스승까지 의심을 하게 된다. 이에 다산의 훌륭한 덕에 누가 될까 염려하여 왕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초의는 유학자들과 신분을 초월한 교유를 하고 우리의 산천을 두루 여행하면서 많은 문사들과 시회(詩會)에 참석하기도 한다.
한편 이 당시 문사들 사이에 중국차를 마시는 풍조가 유행하였는데 초의는 자신이 직접 만든 차를 지식인들에게 보내면서 중국차에 익숙해있던 문사들에게 우리 차의 우수성을 일깨워 준다. 초의가 보내준 차를 마시고 많은 문사들은 차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산천도인 김명희는 “중국의 차는 품질이 조악하고 수놓은 비단 주머니에 싸서 겉치레만 요란 할 뿐 썩은 가지와 단단한 잎이 들어있어 입에 넣을 수가 없으나 초의가 보낸 차는 한 잔을 마시기도 전에 답답함과 갈증을 해소시킨다. 지금까지 조선에 차가 있었던 것을 몰랐으니 찻잎을 따고 덖는 오묘한 삼매에 들어 이것을 터득한 공은 참으로 한량이 없다”는 글을 지어 초의의 차를 칭송하였다. 추사 김정희 역시 매번 초의에게 차를 구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어느 때는 차를 품평하여 불을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고, 밀린 차를 보내달라는 투정을 부리기도 하였다. 명선(茗禪)이라는 아름다운 호를 초의에게 지어주기도 한다.
초의 나이 52세에 저술한 <동다송>은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가 북산도인(北山道人) 변지화에게 다도에 대하여 물어오자 초의에게 부탁하여 초의가 다도에 관하여 지어 올린 글이다. <동다송>은 우리 차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침체되어 있는 우리의 차 문화를 부흥시키는 지침서가 된다. 이렇게 한국의 차 문화는 초의 선사에 의해 그와 교유했던 많은 문사들 사이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초의 선사는 찻잎을 가리고 차를 만드는 일을 자연의 순리로 파악하였다. 이에 김명희는 ‘노스님 차 고르기 마치 부처님 고르듯 한다’고 하여 초의 선사의 차 다루는 솜씨가 선(禪)과 일치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한국의 다도는 자유로움과 평상심 속 있다.
■이창숙(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 연구원)
2007-07-25 오후 5:5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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