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 회해(百丈懷海, 720~814)에게는 30여인의 제자가 있으나, 그중 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와 황벽 희운(黃檗希運, ? ~850)이 드러났다. 위산은 백장청규를 최초로 실천하고 총림을 형성하여, 1500명이 넘는 대중을 이끈 선문의 대 존숙이다. 그리고 제자 앙산 혜적과 더불어 위앙종을 성립시켰다. 5가 7종의 선문 가운데 가장 먼저 형성된 총림이다.
영우는 대소승의 계율을 두루 섭렵하고 23세 때 강서지방으로 행각하여 백장을 참문하였다. 백장은 영우를 보고 대승 법기임을 간파하고 입실을 허락하였다.
어느 날 스승 백장이 영우에게 물었다.
“옆에 선 사람은 누구인가?” “영우입니다.”
“화로에 불이 남아 있는지 헤쳐 보게.”(汝撥爐中有火否) 영우가 화로를 뒤적거려 보았지만, 불씨를 발견하지 못했다. “불이 없습니다.”
백장이 일어나서 몸소 불을 헤쳐 작은 불씨를 찾아들고서 말했다. “이게 불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말끝에 영우가 깨달음을 얻고 절을 하면서 사례하였다.(師發悟禮謝)
이에 백장이 진중하게 말하였다.
“이는 잠시의 지름길일 뿐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불성을 보려하거든 반드시 시절과 인연을 관찰하라’ 하였으니 시절이 이르게 되면 미혹했던 이가 문득 깨달은 것과 같고 한 번 잊은 번뇌망상을 영영 기억함이 없는 거와 같은 것일세. 그러므로 조사께서 말씀하기를 ‘깨달음은 깨닫지 못함과 같아 본래 마음도 없고 법도 없다.’ 하신 것이네. 이렇듯 허망한 범인과 성인들의 마음이 없는 本來心法이 원래 스스로 갖추어 구족해 있으니 이제 이미 네가 그러한 터이니 스스로 잘 護持하여라.”(<전등록>권9 ‘담주위산영우선사’)
백장의 가르침은 일체의 삼라만상을 바라보는 세심하고 면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최대한 주의 관찰해야 한다는 것. 불을 통하여 보여주는 그곳, 사량분별이 멈추는 대용(大用)의 세계. 끝없이 움직이는 행동의 세계. 일체의 제2차적 정상화(定相化)된 관념의 세계를 넘어 바로 활활발발한 찰나의 세계를 계합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스스로 힘써 실참실수하므로 시절인연이 닿도록, 그 시절인연을 여시하게 투시해야 함을 간곡히 부탁한다. 그러할 때, 축적된 일상의 세계, 개념의 세계에 덮여 있던 자성본원이 여지없이 드러낸다고 백장은 간곡히 영우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주며 인가한다.
곧 시절인연이 익으면 자연, 미혹했던 사람이 마치 천년 동굴의 어둠이 한 줄기 빛으로 가득 참을 알듯이, 이것은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던 스스로의 빛이며 다른 곳에서 들어온 것이 아님을 설한다.
후대의 한 선객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화로 속을 한가로이 한 번 헤쳐서 等閒一撥紅爐裏
별똥 같은 불을 찾아내니 재는 죽지 않았네 擧火如星灰不死
잡히는 대로 들어 올린 잠깐 사이에 信手拈來瞬目間
불법이 얼마 안 되는 줄 비로소 알았네 始知佛法無多子
-지비자(<선문염송>제9권 355칙 ‘有火’)
위의 게송 1행과 2행에서 풍겨오는 담담함과 예사로움은, 우리를 한층 가라앉히며 더욱 창연한 적요의세계로 몰아간다. 무엇이 이리도 당당함을 넘어서 저 밑바닥까지 평범하게 하는가. 2행에서 ‘눈동자에 붙어서 반짝이게 하는 별똥 같은 불’. 이 불은 우리 자신의 영롱한 불이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다. 그러나 단지 타오르는 불의 씨앗을 보지 못하고 잿더미를 볼 뿐이니, 우리는 잿더미이다. 잿더미 역시 불씨와 바람을 만나면 타오르는 불이 된다. 이럴 때 4행에서 지비자가 노래하듯이 “불법이 얼마 안 되는 줄 비로소 알았네”(始知佛法無多子)로 된다. 사실 佛法은 不法이다. 얼마 안 된다고 말해도 안 되는 것이니, 오직 그렇게 알면 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