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산 영우(潙山靈祐, 771~853)는 백장의 큰 제자이다. 중국적인 선을 창출한 육조 혜능의 돈오사상이 마조 도일에 이르러 융성해지고, 또 회해의 백장청규(百丈淸規)에 의해 선원제도가 확립됨에 따라 수백 수천을 헤아리는 운수납자들이 한 분의 큰 스승 회상에 모여 여법하게 수행하는 새로운 가풍이 전국 방방곡곡에 확산된다. 총림(叢林)제도를 최초로 형성한 선문이 영우와 그의 제자 혜적이다. 위앙종이 선종 5가 7종 가운데 가장 먼저 꽃을 피우게 된다. 위앙종이란 말은 위산 영우와 제자 앙산 혜적(仰山慧寂, 807~883)의 첫 자를 따서 만들어진 종파란 뜻이다. 그러나 위앙종은 5대에 150년경과 후 송나라에 이르러 선문이 끊긴다.
위산에 숙세의 인연이 다 됨을 짐작한 위산은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한다.
위산이 대중에게 말했다.
“내가 죽은 뒤엔 산 밑 마을에 가서 한 마리의 검은 암소가 되어 왼쪽 겨드랑 밑에 ‘위산의 중, 아무개’라 쓰겠다. 그때 만일 위산이라 하면 암소를 어찌하며, 암소라 하면 내 이름은 어찌 하겠는가?”
앙산이 나서서 절을 하고 물러갔다.(<전등록>권9 ‘위산우’ )
불교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로 보는 삼세설이 있다. 위산은 대 도량의 방장이지만, 미래세에는 위산 아래 검은(水) 암소(牯)가 된다. 위산은 암소이면서 위산이고, 암소는 위산이면서 암소이다. 위산승이라 부르자니 현재는 검은 암소의 모습이고 암소라 부르자니 일찍이 위산승이었다. 앞 선화에서 위산이 ‘내가 죽은 뒤엔 산 밑 마을에서 한 마리의 검은 암소가 된다’ 함은 이류중행(異類中行)이다. 즉 축생 등, 인간과 다른 종류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위산이 소가 되었을 때 ‘소냐? 위산이냐?’를 이르라는 공안이니 이류와의 차별도 역시 무차별이어서 찾을 수 없음을 말한다. 이 아름답고 현묘한 ‘수고우’공안에 뜻을 밝힌 후세 한 선장의 눈 푸른 게송이 있다.
산 위에선 산승이요 산 아랜 암소라 山上山僧山下牛
털 나고 뿔 달린 무리와 뒤섞였네 披毛載角混同流
온 세상이 부처가 되고 조사 되려는데 普天成佛與成祖
위산만 홀로 검은 소 되었네 獨有潙山作水牛
-불국백 (<선문염송>제9권 375칙)
위의 게송, 1행과 2행에서 ‘털 나고 뿔 달린’이라 함은 이류(異類)를 말한다. 즉 인간이 아닌 다른 종류이다. 영우는 위산에 있을 때는 위산 승이고, 산 아래 있을 때는 검은 암소이다. 위산은 털 나고 뿔 달린 모습으로 동류(同類)인 수선납자들의 눈과 귀를 혼란시키는데, 실제로는 오랜 관습과 고정된 사유를 벗기고 삼세(三世)를 자유롭게 관통케 하여 이항대립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3행과 4행은 누구나 성불작조(成佛作祖)함이 목표인데 위산만은 ‘성자되려는 마음마자 무너져, 이류인, 소가 되어 삶의 현장으로 입전수수(入廛垂手)하기를 원하였다. 이것은 육도(六度)의 행으로 저자거리로 돌아와 중생제도, 곧 이타교화(利他敎化) 함을 의미한다. 아니 위산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하는 이류중행(異類中行)의 법문, 역시 동류의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우리에게 입전수수의 가르침으로, 몰록 자성본원으로 회귀시키고 있다. 이런 사유는 불경 도처를 관통하는 무주(無住)・무상(無相)・무아(無我) 사상의 형상화이다. 곧 위산의 드높은 불이(不二)의 정신세계를 찬탄한 게송이다.
열반의 공안, ‘수고우’ 선화를 우리에게 던져놓고, 위산은 총림을 이끈 지 40여년 좌탈입망한다. 그의 선맥을 이은 제자가 43인. 상족으로는 앙산 혜적, 향엄 지한, 영운 지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