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때묻지 않도록 하라
- 신수
깨달음에 본래 나무 없고
거울 역시 대가 아니니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 일어나리오
- 혜능
후학 납자들이 6조가 의발을 전수 받은 이야기를 공안으로 삼은 많은 게송이 있다. 그 중 두 수만 음미하자.
㉮
그 옛날 황매가 이 뜻을 전하니 當日黃梅傳意旨
불법을 아는 이가 갈대같이 많았네 會佛法人如竹葦
기린과 용의 두각이 모두가 허사되니 麟龍頭角盡成空
노도령은 그들과 비슷하지 못했네 盧老無能較竺子
-불인원
㉯
못 끊고 쇠 자르니 큰 재주는 도리어 바보와 같다 斬釘截鐵大巧若拙
한 마디로 한 사람에게 전하니 불법을 알지 못하네 一句單提不會佛法
제 멋대로 잎이 지고 꽃이 피나니 儘他葉落花開
봄가을의 춥고 더움을 묻지 않으리 不問春寒秋熱
다르다 다르다 別別
만고의 푸른 못엔 하늘의 달이니라 萬古碧潭空界月
-원오 극근
(<선문염송>권4, 112칙)
㉮의 게송 1행과 2행에서 ‘5조가 뜻을 전하니 불법을 아는 이가 갈대같이 많다’라고 함은 지식이나 좀 더 나아가 직관지로서의 진리의 구경처, 본래면목을 간파한 사람이 많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아는 것은 가능하다. 진리 당처와 계합하는 것은 이미 안다는 차원이 아니므로 이미 알았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은 단지 알았다 이해한다는 차원일 뿐, 바로 그것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노호를 아는 것은 허락하지만 노호와 영회(領會)함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영회할 것인가? 4행에서와 같이 ‘단지 노행자가 그들과 다를 뿐’ 그 외는 달리 무어라 표현하겠는가?
㉯의 게송은 선문 제일 서라는 <벽암록>을 편찬한 원오 극근의 시다. 이취(理趣)와 선지(禪旨)가 물씬 풍기는 게송이다. 1행과 2행에서는 ‘뛰어난 견해를 가진 대중이 무수히 많지만 오직 불법을 혜능에게만 전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불법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다. 진리의 당처인 본래면목을 영회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3행과 4행의 “제 멋대로 잎이 지고 꽃이 피나니/봄가을의 춥고 더움을 묻지 않으리”는 불법의 운행을 말한 것이다.
자, 여기서는 부지불식간에 피고 지는 만물, 봄이다 가을이다를 잊는, 함이 없는(無功用) 삶. 이것은 일체 만물, 불법, 구경의 당처인 본래면목을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그럭저럭 산다는 의미이다. 마지막 행인 “별별, 만고벽담공계월”(別別 萬古碧潭空界月)에서 ‘다르다 다르다’는 세계가 숨기고 있는 진면목에 대한 계합契合이니, 놀랍고 놀라울 뿐이다. 그 놀라움을 알고자 하는가? ‘만고의 푸른 못, 하늘엔 달, 달 속에 갇힌 푸른 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