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옹 상순(西翁尙純, 1912~2003)선사를 만나게 된 것은 내 삶의 크나큰 광영이었다. 스님께서 80노구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강릉에서 찾아 올라간 나를 한 번도 마다하시지 않고 7년간 일곱 차례나 일천한 공부를 점검해 주시는 두터운 법은을 내리셨다. 참으로 지극한 낙초자비(落草慈悲)였고 간절노파심절(懇切老婆心切)이었다. 백골(白骨)이 난망(難忘)되어도 잊을 수 없는 은혜다.
그 중 잊혀 지지 않는 법문이 바로 파초산 혜청선사의 주장자 법문이다.
파초선사는 우리나라 신라인이며, 위앙종의 4대에 속한다. 그의 스승은 남탑 광용이고 광용은 앙산의 제자이다.
이 파초선사의 주장자 공안은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선방에서 살아 움직이는 현역 공안으로 빛을 발한다. 필자 역시 이 지팡이에 경을 친 적이 있다. 1990년경 서옹 선사를 참문 할 때, 나의 분별심을 향하여 비수같이 날아들던 지팡이였다.
㉮
있음과 없음은 고금에 두 겹의 관문이니 有無今古兩重關
바른 안목 가진 선객도 지나기 어렵다 正眼禪人過者難
장안으로 가는 큰길로 통하게 하려거든 欲通大道長安路
곤륜이 활개 펴고 다니지 못하게 하라 莫聽崑崙敍往還
-투자청
㉯
그대에게 있으면 일체에 있고 你有則一切有
없으면 어디에도 없다 你無則一切無
있고 없는 것은 有無
오직 본인이 준다 뺏는다 할 뿐 自是當人與奪
파초에게 무슨 관계있으랴? 關芭蕉甚事
이럴 때, 어떤 것이 그대의 주장자인가? 正伊麽時作麽 生是你拄杖子
-천동각
무더운 한 여름 서옹화상을 뵈었다. 스님이 나에게 말했다.
“억울하냐? 그래도 억울하면 다시 한 번 해보자. 나에게 보배로운 지팡이가 하나 있는데, 네가 가졌다면 나는 이것을 너에게 줄 것이고, 너한테 이 지팡이가 없다면 내가 빼앗아 가겠노라는 법문이 있는데, 그럼 이 도리를 네가 한 번 일러봐라.”
잠시 양구하다가 말씀을 올렸다.
“스님, 스님과 저, 모두 같은 지팡이 안에 있는데, 무얼 주고받는단 말씀입니까?”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아니야, 아니야 탕기에 때가 묻어 때가 묻어나. 다시 참구하라. 왜 국민학생이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 철봉대에 마지막 턱걸이를 하듯 그렇게 다시 참구하라.”
<선문염송>에 파초선사의 주장자 공안에 대해 후대 선객들의 게송이 몇 수 실려 있다.
꼼꼼히 살피며, 위 선시의 의미를 살펴보자.
투자 의청의 ㉮ 게송에서 보듯이 ‘이 유/무 양변의 관문은 실로 눈 푸른 납자들도 통과하기 어려움’을 읊었고, 또 ‘무상대도(無上大道)의 길을 사통오달되게 하려면, 4행에서 곤륜인이 활개치고 다니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곤륜족은 티베트 북쪽 일대에 사는 흑인종족이다. 곧 나의 마음이 나이며 자성이고, 이 자성의 활성화가 평평범범의 일상사이니, 특이한 생각으로, 밖에서 자성본원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을 짖지 말기를 당부하고 있다.
㉯는 천동 정각이 시중한 염(拈)이다. 자성본원은 큰 거울과 같은 원만한 지혜로서, 일체 삼라만상이 비추어지지 않는 것이 없고 비치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비친다/비춘다’를 완전히 벗어난다. 그러니 파초 자신이 괜히 ‘준다/뺏는다’ 하며 분별하여 사람을 속일 뿐. 이 자성의 형상화인 주장과 파초와 사실 무슨 관계가 있으리오. 이럴 때 무엇이 주장자이고 무엇이 나인가?
서옹 스님께서 입적한지 5년도 채 안된 지금 스님을 떠 올리며 이 글을 쓰니 더욱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