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조 혜능(638~713)의 단상 말씀을 <법보단경(法寶壇經)>이라 할 만큼, 선종사에 미친 영향은 절대적이다. 이 단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말할 것 같으면 돈오법문(頓悟法門)이다. 돈오법문을 가장 알맞고 명료하게 요약한 사구게(四句偈)가 바로 아래 게송이다. 물론 혜능 당대에 지어진 것은 아니지만, 이 사구게는 선종의 특질을, 혜능의 사상을 가장 극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물론 6조 이후에 정립된 게송이지만 이 사구게야 말로 육조혜능의 말씀인 <육조단경>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인 동시에 선의 황금시기에 다각도로 전개된 5가7종의 종지가 된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不立文字
가르침 밖에 따로 전하니 敎外別傳
사람의 마음을 곧 바로 가리키니 直指人心
자성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 見性成佛
문자에 매이지 않는다(不立文字)
여기서 문제가 되는 ‘입’立은 세운다, 정립한다는 뜻이다. 불립문자의 전체적 이해는 언어나 문자에 매달리지 않아야 하며, 단지 불립문자란 자구에 집착하여 고지식하게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편집된 생각의 노예가 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나 죽은 후에 그대들은 한 곳에 스승이 될 것이니, 그대들은 삼과 법문과 움직이고 사용함(動用)에 36대를 말하고, 또 나아가고 사라짐에 양변을 여의고 일체 법을 설하는데 자성을 여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법을 묻는 사람에게 설법은 반드시 쌍으로 하여 대법을 사용하여 오고 감에 서로 원인이 되게끔 하여 마지막에 두 법을 다 제거되어 다시 갈 곳이 없게 해야 한다.’(<단경> ‘법문대시’ 제9) 즉 두 극단의 상호 관계에서 중도(中道)의 의미가 자연 드러난다. 말하니, 여기의 중도는 혜능이 말하는 자성으로 읽힌다.
“만일 완전히 공에 집착하면 곧 무명을 기르는 것입니다. 공을 집착하는 사람은 경전을 비방하면서 바로 문자를 쓰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이미 문자를 쓰지 않는다 할진대, 사람과 말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고 하겠으나, 이 말, 또한 문자의 형상입니다.”(<육조단경> 제9 ‘법문대시’)
이어서 글자 그대로 ‘문자를 세우지 않음’(不立文字)에 집착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 말하되 곧은 도는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不立文字) 하지만, 곧 이 不立의 두 글자도 또한 문자의 형상임을 어찌하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남이 말하는 것을 보고, 곧 비방하면서 문자에 집착했다 합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미혹한 것이 오히려 옳은 것이지, 어찌 부처님 경전을 비방할 것이겠습니까.”
불립문자에 대한 6조의 견해는 문자를 사용하지 않음이 아니라 문자에 대한 집착이 없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은 지혜와 관계가 있다. 반야바라밀다, 곧 지혜의 완성은 중도이고 견성(見性)이다. 자성(自性)을 본 사람은 지혜를 완성한 사람이어서 모든 사물에 자연 응답을 하며, 또한 응답을 할 줄 안다. 6조는 ‘스스로 미망을 제거하여 내외명철(內外明徹)되면 자성 가운데 만법이 모두 나타난다. 견성한 사람도 이와 같다’(<단경>제9 ‘전향참회’)
“견성한 사람은 세워야(立)할지 세우지 말아야할지 훤히 압니다. 그것은 가고 옴이 자유로워 머뭇거림도 없고 걸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물에 순응하여 움직이며 말에 알맞게 응하여 대답을 하며, 자성을 여의지 않고 모든 상황에 자기 처신을 합니다. 이렇게 자재신통을 얻어 유희삼매에 듭니다. 이것의 이름이 견성입니다.”(<단경> 제7 ‘남돈북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