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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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스님(2)
어느 날 용성(龍城, 1864∼1940) 선사가 전강 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第一句)냐?”
전강 스님이 답했다.
“예!”
“틀렸다.”
이에 전강 스님이 손뼉을 치고 웃어 보였더니, 용성 선사가 다시 말했다.
“틀렸다.”
“제가 묻겠습니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이때 용성 선사가 느닷없이 “전강아!” 하고 불렀다.
“예!”
“그것이 제일구니라.”

용성 스님이 후학을 일깨우는 수단은 능수능란한 달인의 경지이다. 두 번이나 대답이 틀렸다고 분심(憤心)을 일으킨 후 약이 바짝 달아올랐을 때, 학인의 근기에 맞게 선교방편(善巧方便)을 베푸는 것이다. 이런 단련을 받은 전강(田岡, 1898~1975) 스님 역시 당대의 선지식으로 이름을 떨친 것은 물론이다.

제자의 이름을 부른 후, ‘예!’ 하고 대답할 때 ‘이것이 무엇인고?’ 하는 공안을 제시하는 이러한 문답은 ‘이뭣고?’ 화두가 정형화되기 이전, 백장 선사의 문답에서도 나타날 만큼 학인의 본래면목을 일깨우는 효과적인 방편이라 볼 수 있다. <백장록>에는 이런 공안이 나온다.

“하루는 백장 스님이 설법을 마치니 대중이 법당에서 물러가자, 스님이 대중을 불렀다. 대중이 고개를 돌리자, 백장 스님은 ‘이것이 무엇인고(是甚麽)?’ 하고 물었다.”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묻는 ‘이뭣고?’ 화두는 다양한 공안집에 등장하지만, <벽암록>에 등장하는 운문 선사의 법문에 더욱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향림징원(香林澄遠)이 18년 동안 운문 스님의 시자를 했는데, 그를 가르침에 다만 ‘원 시자(遠侍子)!’라고 부르면, 원 시자는 ‘네!’ 하고 대답하였고, 운문은 ‘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기를 18년 만에 어느 날 바야흐로 원 시자가 깨달으니, 운문은 ‘내가 지금 이후로 다시는 너를 부르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앞에서 용성 스님의 질문에 전강 스님은 똑같이 “예!” 라고 대답했지만, 용성 스님은 한번은 “틀렸다”고 했고, 한번은 “맞다”고 했다. 같은 말이건만, 이렇게 맞고 틀린 차이가 벌어진 것은 과연 왜일까? 용성 스님은 ‘이뭣고?’ 화두의 열쇠인 이 물건 아닌 ‘한 물건(一物)’에 대해 “찾으면 더 멀리 도망하고 그냥 두면 여러분 앞에 있어 항상 손바닥 안에 머문다”고 말한 바 있다. 진리의 당체(當體)를 직접 지칭하는 말인 ‘제 1구’는 딱히 정해진 바가 없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인 동시에, 구하려고 하면 얻을 수 없는 ‘무소득법(無所得法)’이다. 하지만 찾지 않고, 갈망하지 않고, 원하는 바가 없으면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라제 존자는 “성품(性品)은 작용하는 데 있다”며 “눈에 있으면 보고, 귀에 있으면 듣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으며, 혀에 있으면 말을 한다”고 풀이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무개야!” 하고 부를 때, “예!” 하고 대답하는 이 작용에서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두 공부는 ‘모르는 게 약’일 때가 훨씬 많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7-05-15 오후 4:4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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