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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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성 스님(1)
용성(龍城, 1864~1940) 스님이 하루는 제자 고봉에게 물었다.
“고봉아, 화과원(華果院: 용성 스님이 함양 백운산에 세운 농장)의 도리원(桃梨園: 복숭아밭) 소식을 한 마디 일러라.”
“화과원에 도리가 만발하니, 그대로가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
용성 스님이 그 말을 듣고, “네, 이 놈. 뭐가 어쩌고, 어째! 이놈이 공부 깨나 하여 안목이 열렸는가 했더니만, 순전히 밥이나 축내는 밥도둑 놈이 아닌가” 하고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고봉이 생각하기를, ‘내가 혹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를 했나?’ 하고 스스로에 대해 의심을 했다. 그리고는 곧 스승께 여쭈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화과원에 도리가 만발하니, 그대로 화장세계로구나.”

화과원의 도리원 소식, 즉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 스승과 제자가 한 말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에 차이점이 있을까. 불법에 대한 안목(眼目)을 갖춰야만 똑같은 말에서도 천지현격(天地懸隔)의 차이점을 훤하게 볼 수 있다.

이 문답에서 제자는 이미 나름의 안목을 갖춘 공부단계였지만, 스승이 던진 낚시밥을 냉큼 물고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바둥대는 가련한 물고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제자는 바로 대답을 했지만, 스승의 시험에 걸려 자신의 견처(見處)에 대해 순간적으로 확신을 잃은 것이다. 이는 고봉 스님의 당시 경계가 체험적 증오(證悟)가 아니라, 이치로만 안 해오(解悟)에 머물고 있었음을 뜻한다. 물론 용성 스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몽둥이질로 고봉 스님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

깨달은 경지가 역대 조사의 견처와 같은지를 점검하는 말에 ‘신득급(信得及)’이란 말이 있다. 대혜 선사 어록에 나오는 이 말은 증오와 해오를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신(信)’이란 확신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며, ‘득(得)’은 그 경지까지 다 체험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신득급을 확인하는 문답은 ‘병정동자래구화(丙丁童子來求火)’라는 유명한 공안에서도 보인다.
하루는 법안문익(885∼958) 선사가 그의 문하에서 감원(監院) 소임을 보면서도 한 번도 법문을 청하지 않는 보은현칙에게 물었다.
“나에게 묻지 않는 이유라도 있느냐?”
“전 이미 청림 화상 문하에서 한 소식을 얻었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보아라.”
“제가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청림 화상이 ‘병정동자가 불을 구하러 왔구나’ 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뜻을 알았습니다.”
“그래? 잘못 알았을까 두렵구나. 설명해 보거라.”
“병정(丙丁)은 (음양5행에서) 불(火)에 해당하니 ‘불이 불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부처가 부처를 구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너는 잘못 알았다.”
현칙이 수긍하지 않고 일어나 나갔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개운치가 않아서, 다시 돌아와 법안 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병정 동자가 불을 구하는구나.”
이 말에 현칙은 크게 깨달았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7-05-08 오후 4:4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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