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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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선사(8)
1879년 11월, 경허 스님이 동학사 조실방에서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나귀의 일도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한지 석 달이 지났다. 동짓달 보름께였다. 그때 동은(東隱)이라는 사미승이 스님의 시봉을 들고 있었다.

어느 날, 만화 스님의 제자이자 경허 스님의 사형인 학명(學明) 스님이 동은의 부친인 이 처사를 찾아갔다. 찾아간 학명 스님을 보고 이 처사가 물었다.
“요새 동욱(경허) 대사는 뭘 하나?”
“그저 방안에서 소처럼 앉아 있습니다.”
“중노릇 잘못하면 소가 되는 이치를 아는가?”
“그거야 공부를 하지 않고 공양만 받아 먹으면 소밖에 될 게 있습니까?”
“중노릇을 그만큼 하고 겨우 대답을 그렇게 밖에 못한단 말인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선리(禪理)는 모릅니다.”
학명 스님은 당시 참선 보다는 총무 소임을 보며 사무를 보기에 바빴었다.
“소가 되어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으면 되는 게지.”
동학사로 돌아 온 학명 스님은 그 이야기를 다시 동은 사미승에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하셨는데, 너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그 이야기를 들은 동은 사미승은 경허 스님이 참선하는 바로 옆방에서 다른 사미들에게 수수께끼처럼 물었다.
“너네들, 중노릇 잘못하면 소가 되는 이치를 아니?”
“소가 되는 이치가 뭔데?”
“글쎄, 그게 뭘까?”
“야, 소가 돼도 콧구멍 뚫을 데가 없으면 된단 말야.”
동은 사미승은 커다랗게 말했다.

어린 사미승의 그 말이 참선중인 경허 스님의 뒤통수를 ‘꽝’하고 때렸다. 대지가 그냥 내려앉았으며, 만물과 자신을 함께 잊고 온갖 법문의 끝없는 오묘한 이치가 당장에 얼음 녹듯 풀렸다.(경허집)

경허 스님이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를 타파한 기연이다. ‘여사미거 마사도래’ 화두는 중국 위앙종의 영운지근(靈雲志勤ㆍ771~853) 선사에게서 비롯됐다. 어느 때 한 수좌가 영운 선사에게 “불교의 대의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나귀의 일도 가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고 대답한 공안이다.

경허 스님이 ‘콧구멍 뚫을 데가 없다(無穿鼻孔處)’는 말에 이 공안을 타파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콧구멍 없는 소’가 ‘불법의 대의’와 어떤 연관이 있다는 뜻일까.

원래 ‘콧구멍(鼻孔)’이란 말은 인간의 마음 속에 간직한 불성(佛性)의 기미를 의미한다. 중국 법안종의 종주 법안(法眼) 선사의 어록에 ‘콧구멍 없는 소(牛無鼻孔處)’라는 표현이 실려 있다. 태아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생겨날 때 코가 먼저 생기며, 오관 중에서도 콧구멍이 먼저 뚫린다고 본 데서 ‘콧구멍’은 불성, 본분(本分), 본각(本覺)에 비유되었다. 때문에 해탈한 모습을 ‘콧구멍이 아주 누긋해졌다(鼻孔累垂)’고도 표현했다. 즉 콧구멍이 인간이 본래 지닌 불성을 뜻한다면, ‘콧구멍 뚫을 데가 없는 소’란 새삼스럽게 깨달아야 할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도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문자적인 해석일 따름이다.

토굴의 꽉 막힌 벽처럼 그를 가두었던 미망의 그물이 산산조각 나면서 경허 스님은 이제 당나귀와 말의 일 사이에서 방황하는 일이 없는 ‘콧구멍 없는 소’가 된 것이다. 고삐를 꾈 콧구멍이 없는 소는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일이 없다. 그 자신이 바로 바로 자유와 해탈 자체인 것이다. 경허 스님이 절집의 관례를 깨고 스스로 법명을 ‘깨달은 소’, 즉 성우(惺牛)라고 지은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7-04-03 오후 4:3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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