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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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 선사(7)
경허 스님이 서산 천장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여름밤이었다. 만공 스님이 큰방에 볼 일이 있어 경허 스님이 누워 계시는 그 앞으로 호롱불을 들고 지나가다 얼떨결에 보니, 스님의 배 위에 길고 시꺼먼 뱀이 척 걸쳐져 있었다.
만공 스님이 깜짝 놀라,
“스님, 이게 무엇입니까?”
하니, 경허 스님이
“가만히 두어라. 실컷 놀다 가게.”
하고는 놀라지도 않고, 쫓지도 않은 채 태연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얼마 후 뱀이 유유히 숲속으로 돌아간 뒤, 선사의 법문이 이어졌다.
“이런 데에 마음이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자기 공부에 정진해 가야 하느니라.”

확실히 깨달음을 얻어 생사의 두려움으로부터 해탈한 대장부의 대무심(大無心) 경계를 엿볼 수 있는 선화(禪話)이다. 어떠한 경계에도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 깊고 깊은 무심의 경지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이와 같겠는가.

선 수행은 사실상, 무심을 체득하는 것이 처음과 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심의 도리를 직관적으로 통달한 뒤, 생활 속에서 실제로 무심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대주 선사는 ‘일체처에 무심한 것이 해탈’이라고 까지 하였다.

가지가지의 번뇌망상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중생이라 한다면, 일체의 망상을 떠나 사는 이를 부처라고 한다. 모든 망상을 떠났으므로 망심이 없기에, 이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하고 무념(無念)이라고도 한다. 물론 참다운 무심은 오직 제8 아뢰야식의 근본무명까지 완전히 끊은 구경각(究竟覺) 즉 묘각(妙覺)만이 참다운 무심이다. 무심이라고 해서 바위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고 일체 망상이 다 떨어진 동시에 대지혜 광명을 자유자재를 쓰고 누리는 것을 말한다.

육조 스님은 <육조단경>에서 “내 이 법문은 위로부터 내려오면서 먼저 무념(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고, 무상(無相)으로 체(體)를 삼고, 무주(無住)로 본(本)을 삼았다“라고 하면서 무념을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대상에 마음이 물들지 않으면 이것이 무념(無念)이니, 제 생각에 항상 모든 대상을 떠나서 대상에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각을 아주 없애버리면, 한 생각이 끊어지면서 곧 죽어 딴 곳에 태어나니, 이것은 큰 착오이므로 배우는 사람은 명심해야 한다.”

이처럼 무심은 바위나 고목과 같은 아무 생각이 없이 흐리멍텅한 무기(無記)의 상태가 아니다. 본래부터 청정하고 밝아서 물들일 수 없는 불심(佛心)인 것이다. 때문에 무심은 바꿔 말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할 수 있다. ‘불생’이란 한 생각 사량분별심을 내지 않아 일체 망상이 다 떨어졌다는 말이고, 불멸이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 ‘불생’이란 적(寂: 고요함)이고 ‘불멸’이란 조(照: 지혜로 비추어 봄)이다. 또한 무심을 경전에서는 정혜(定慧)라고도 한다. 정(定)이란 일체 망상이 모두 없어진 것을 말하고, 혜(慧)라는 것은 대지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정혜등지(定慧等持)를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선(禪)에서는 ‘무심에도 한 겹의 관문이 있다’고 하면서, 적극적인 보살행을 주문한다. 무심과 유심을 초월한 무심으로 부처행(佛行)을 하는 것, 이것이 참된 무심의 생활인 것이다.
김성우 객원기자
2007-03-27 오후 4:3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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